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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안동·경북) 1급 양반 후손들의 특징] [영남 선비 집안] ....

뚝섬 2025. 8. 18. 06:20

[AK(안동·경북) 1급 양반 후손들의 특징] 

[영남 선비 집안] 

[파락호 김용환과 학봉 김성일 종택이 있는 안동

 

 

 

AK(안동·경북) 1급 양반 후손들의 특징

 

대구 팔공산 자락의 어느 유서 깊은 고택 사랑채에서 숙박을 했던 적이 있다. 아침에 그 집 종손과 같이 겸상을 하는데 한마디가 와 닿았다. “해방 이후로 우리 집에 호남 사람이 와서 자고 가는 것은 조 선생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로 전라도 사람이 대구 안동 명문 고택에 필자처럼 자주 출입한 사례는 드물지 않나 싶다. 이것도 희한한 인연이다.

 

전라도 사람의 시각에서 AK(안동·경북)의 1급 양반 집안 후손들과 교류해 보니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는 귀문집(貴文集)이다. 조상들이 남긴 문집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이다. 후손들에게 돈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문집들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데 공을 들인다. 둘째는 중연비(重聯臂)이다. 연비를 중하게 여긴다. 연비(聯臂)는 혈연·학연·지연 같은 인연이다. 수백 년 전에 조상들끼리 맺은 혈연이나 학연을 지금도 들먹이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문화이다. 셋째는 화문중(和門中)이다. 문중 대소사에 형편 되는 대로 참여함으로써 화합하려 노력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도산서원. /안동시

 

다른 지역은 문중이 약화되었다. 여기서는 아직도 문중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유교 문화의 정신적 본부는 도산서원이다. 유교가 중국에서 생겼지만 유교의 심장인 서원이 아직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동아시아에서 도산서원뿐이다. 마지막 보루이다. 도산서원의 원형 가운데 하나가 ‘향알(香謁)’이라는 의례이다. ‘향을 피우고 퇴계 선생을 뵙는다’는 뜻이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의 1박 2일 과정이다. 행사 전날 오후 4시쯤 도산서원에 10여 명쯤 참석한다. 별유사 2명, 재유사 5명, 강독유사 1명, 유림 집안 후손 3~4명이 참석한다. 저녁을 같이 먹고 한문에 해박한 강독유사(講讀有司)의 주관하에 퇴계 문집, 제자들의 편지글, 시(詩)를 밤 10시까지 같이 공부한다. 다음 날 새벽 5시쯤 일어나 퇴계 선생 위패를 모셔 놓은 상덕사(尙德祠)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모인다. 향을 피우고 합동으로 큰절 2번을 한다. 걸리는 시간은 총 30분 정도. 이것이 ‘향알’이다.

 

최후의 서원 전통을 지키는 도산서원 원장은 김병일(80). 예산을 다루는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내고 도산에 들어왔다. 이 양반 사주를 보니 재물이 없는 무재(無財) 팔자인데 희한하게도 국재(國財)를 다루는 부서에만 주로 있었다. “퇴계 선생이 남긴 시 외우고, 봄에 매화 향 맡고, 선비 수련원 앞에 돌가루 깔아 놓은 길을 맨발로 걷는 재미로 삽니다.” 말년에 사치를 누리는 팔자이다.

 

-조용헌 동양학자, 조선일보(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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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선비 집안

 

한 5년 전쯤인가. 대구 팔공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선비 집안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 사랑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까 밥상머리에서 집주인이 한마디 했다. “해방 이후로 호남 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잠을 자고 가는 경우는 조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해방 이후로 제가 처음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리지널 호남 사람으로서 영남의 유서 깊은 선비 집안에 출입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20년 정도 지나니까 그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말이 신중하다는 점이다. 흥분해서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말을 내뱉어서 약속하면 되도록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므로 쉽게 약속하지 않고 신중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수도 많지 않다. 되도록 상대방 말을 경청하는 습관이 붙었다. 이건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부터 어른들한테 교육받은 탓이다. 유년 시절부터 가정 교육을 받은 내용이, 자기 자랑을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선비의 수신(修身)은 자기 자랑을 삼가는 데서 시작한다고 배웠다.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은 수신이 안 된 것으로 간주했다.

 

자본주의 시대는 뭔가를 끊임없이 내다 파는 세상이고, 팔기 위해서는 물건이 되었건 자기 자신이 되었건 홍보를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피알(PR)과 유교적 수신은 이 지점에서 충돌한다.

 

퇴계 학풍이 스며들어 있는 안동 지역을 둘러보다 보면 무슨 무슨 부사, 군수, 현감의 송덕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는 서 푼도 안 되는 송덕비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또 한 특징은 접빈객(接賓客), 즉 손님 접대에 신경 쓴다는 점이다. 손님으로 가면 간소하나마 과일과 식혜, 육포, 보푸럼(대구를 말려서 방망이로 두들겨 잘게 부순 것), 한과가 들어간 다과상을 꼭 내놓는다. 안주인들 처지에서는 상당히 귀찮은 일임에도 다과상을 차려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동의 학봉 종가는 업소용 대형 냉장고 3개, 보통 냉장고 10개, 3평 정도 되는 저온 창고까지 갖추고 있다. 접빈객과 집안 제사를 위한 음식 보관용이다. 가장 결정적인 선비 집안의 특징은 학문과 문장가에 대한 존중이다. 돈과 벼슬보다도 학자에 대한 존중이 남아 있다. 윗대 선조들의 문집 번역과 간행을 위해서 문중 구성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는 전통을 유지한다.

 

-조용헌, 조선일보(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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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 김용환과 학봉 김성일 종택이 있는 안동

 

퇴계 이황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 병산서원… 학봉 김성일의 학봉 종택…
서애와 학봉 서열 문제로 400년 가까이 첨예한 분쟁도
김성일 종손 김용환, 천하의 파락호로 전락해 노름판 전전
그가 죽고 나서야 파락호 불명예 감수하며 전 재산 털어 독립군 지원 밝혀져
안동에서 선비의 향기 그리우면 그 흔적을 남겨놓은 선비들의 삶을 보라

1946년 생전에 투전판 들락거리며 신줏단지를 세 번이나 팔아먹은 천하의 파락호(破落戶) 김용환이 죽었다. 그리고 49년 뒤, 파락호의 딸이라 멸시받던 고명딸 후웅이 이리 회상하였다. "자랑스런 우리 아배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높은 뜻 알고 나니 어느 누가 원망하랴, 에고 에고 우리 아배."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말은 지극히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왜 그런가. 안동에서 한 난봉꾼의 삶을 본다.


조정의 호랑이 김성일
 

 

학봉 김성일의 15대손 김종길.

 

 동인과 서인이 피비린내 나게 대립하던 1590년 3월 5일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은 조선통신사로 왜(倭)를 향해 떠났다. 근 1년 뒤 돌아온 황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침략해온다"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그런 조짐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훗날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김성일이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그리 답하였다"고 변호했으나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김성일은 여러 차례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선조 앞에서 "신하의 간청을 거부하는 폐단이 있으니 왕께서는 걸왕(桀王), 주왕(紂王)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별명이 '조정의 호랑이' [전상호(殿上虎)]였다), 그때만 해도 금기(禁忌)중의 금기였던 단종 임금 복위를 주장하는 앞뒤 가리지 않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동인당은 박멸되고 400년 가까이 제대로 된 정권 교체 한 번 없이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니 동인 김성일의 복권은 꿈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돼 패전한 고을들을 되찾았고 이후 좌도관찰사로 임명돼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니, 이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김성일은 그 진주에서 전염병이 옮아 죽었다.

그가 죽고 87년 뒤인 1679년 숙종 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안동 유림과 문중에서는 그를 '자손이 끊길 때까지 사당에서 위패를 치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제사를 지낸다. 종택은 안동 금계마을에 있다.

15대손 김종길(金鍾吉·77)이 말했다. "전쟁 때 호남 의병장 고경명이 '학봉 댁에 가면 거둬줄 것'이라며 자식 하나를 우리 집에 보냈다. 그리고 400년 뒤 내가 종손이 된 뒤 고경명 선생 13대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덕분에 가문이 이어졌다고." 종택 정원에는 그 후손이 심은 나무가 서 있다.

병호시비(屛虎是非)

조선 중기 위대한 철학자 퇴계 이황은 숱한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서로가 퇴계의 적통이라 주장한다. 그 주장이 400년 가까이 분쟁을 낳았다. 병호시비라 한다.

1573년 퇴계의 제자들이 안동에 호계서원을 짓고 이황 신위를 모셨다. 그리고 1625년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로 모시면서 서열에 다툼이 생겼다. 벼슬은 류성룡이, 나이는 김성일이 위다. 학봉 세력이 승리했다. 서애 측은 납득하지 않았다. 1805년 서울 성균관에 있는 문묘에 영남 선비를 추가로 모시자는 논의가 벌어졌다. 청원문을 쓰는데, "학봉과 서애를 추가해달라"와 "서애와 학봉을 추가해달라"라는 문구를 놓고 또 싸움이 벌어졌다. 석 달 싸움 끝에 정부는 아예 청원을 기각해버렸다. 그러자 서애 측은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던 류성룡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학봉 측도 위패를 임천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퇴계의 위패도 도산서원으로 가져가 버렸다. 

퇴계 이황의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의 후배들은 두 사람의 서열을 놓고 400년 가까이 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호계서원에 모셨던 스승과 두 제자 신위는 뿔뿔이 흩어지고, 서원은 폐허가 됐다. 그래도 안동 땅 선비들은 대부분 살신성인이라는 덕목을 실천한 삶을 살았다.

 

훗날 영남 유림들 힘이 필요했던 흥선대원군이 두 문중을 타협시키려 했지만 무산됐다. 분기탱천한 대원군은 호계서원을 없애버렸다. 서애와 학봉 문중은 통혼도 하지 않는 서먹한 사이로 400년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 호계서원이 복원됐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2013년 경북도지사가 중재해 두 세력은 장장 2m짜리 합의문을 작성하고 호계서원 또한 새로 복원해 세 선비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결정했으니, 호계서원 설립 이후 388년 만이다. 여전히 두 문중은 서로가 적통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언제 또 시비가 재연될지 알 턱이 없다. 그 사이에 호계서원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언덕 위로 이건됐다. 이건됐던 서원은 문 하나 남고 철거돼 다른 곳에 복설 중이다. 선비 정신이 자존심과 세력 싸움으로 엇나가 벌어진 참사다.

 

종손의 거칠고 명예로운 삶

김종길이 말했다. "학봉 할아버지가 단종 복위 상소를 올렸을 때 어떻게 무사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덕에 할아버지가 복위되고 시호까지 받았으니까."

2008년 삼보컴퓨터 사장을 끝으로 은퇴하고 15대 종손이 되었을 때,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대학도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다녔고, 혼례도 문중에서 합의한 진성 이씨 퇴계 후손 이점숙과 이름도 모르고 치렀다. 종부의 길이 두렵던 손녀가 "죽어도 못 하겠다"고 버티자 "그럼 내가 죽지"하며 사돈 할아버지가 사흘 단식으로 뜻을 관철시켰다.

서애 류성룡 신위를 모신 병산서원 만대루. 북은 불량 선비를 혼내기 위해 학생들을 소집하던 도구다.

 

종손은, 종손의 삶은 그렇게 명예롭고, 거칠다. 김종길이 말했다. "경상감사 할래 학봉 종손 할래 하면 학봉 종손이 정답인 때가 있었다. 내가 그게 된 거다." 문중 사람들 자기네는 못 해도 종손은 해야 하고, 자기네는 막 해도 종손은 해서 아니 될 게 있다. 그런데 1887년 남부끄러워 낯 들고 안동 땅을 다닐 수 없는 천하의 패륜아요 파락호가 이 가문에 태어났으니 이름은 김용환(金龍煥)이다.

 

천하의 파락호 김용환

김용환은 하라는 입신양명은 팽개치고 밤이면 투전판을 들락이며 돈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독립운동을 하고서 구속된 적이 있기에 하다 말겠지 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13대 종손이 된 그때 학봉 문중 땅은 13만 평이요 재산은 지금 시가로 230억원이었다. 이 문중 재산을 야금야금 노름판에 털어 넣고 그도 모자라 사당에 모셔뒀던 신줏단지까지 세 번이나 팔아치웠다.

 

판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마지막 판에는 김용환 패거리가 끼어들었다. 김용환이 "내가 이겼다"고 고함지르며 돈을 쓸어담으면 패거리가 몽둥이를 들고 판돈을 자루에 넣고 사라지곤 했다. 시집간 고명딸이 가져온 장롱 살 돈도 판돈으로 사라졌다. 남을 믿지 못하여 하인이 손님 밥상을 가져오면 대청마루로 직접 나와서 상을 받았고, 한여름에도 화롯불을 켜놓고 주판알을 튀기다가 정체불명의 문서를 태워 인멸하는 일을 일삼았다. 문중 그 누구도 감히 얼굴을 들고 안동 땅을 걷지 못하였다.

 

반신반의한 건국훈장

해방이 되고 이듬해 김용환이 죽었다. 평생 동지 하중환이 물었다. "다 털어놓으시게." 김용환이 말했다. "그러지 마소. 당연한 일이거늘, 누가 믿을까." 죽기 전 김용환은 자신에 관한 일체 기록을 소각해버렸다.

입을 다물겠다는 언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8년 김용환의 탈상 때, 하중환이 약속을 어기고 상세한 이력을 쓴 제문(祭文)을 읽었다. 그제야 이 망나니의 정체가 밝혀지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노름판에서 사라진 돈, 신줏단지 팔아 그러모은 돈, 문중 전답 팔아서 해 처먹은 돈은 몽땅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것이다.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힌 문중 장손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파락호 시늉밖에 없었고, 김용환은 문중 재산을 팔아먹었다는 불명예를 죽을 때까지 감수한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이 파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때 고명딸 김후웅이 조카인 15대손 김종길 형제에게 이리 읊었다.

"종길 형제 보아라. 철없는 외동딸 무식한 이 여식이, 누구 앞에서도 떳떳이 우리 아배 변명 한 번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럽다.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농 사오라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삼천리 금수강산 내 나라를 찾았어도 우리 아배 지난 이력 자랑 한 번 아니하매, 영문을 알지 못해 팔십 평생 살다 보니 이런 영광 보는구나, 자랑스런 우리 아배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김종길이 말했다. "할아버지 행적의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가야 될 텐데, 부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현재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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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동이 선비의 고장인가. 도산서원이, 병산서원이, 하회마을이 있고 학봉 종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곳을 거쳐 간 선비들이 남긴 흔적에 선비 정신이 진하게 배어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학봉 가문에 독립유공자가 17명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손자까지 독립유공자 9명이 고성 이씨 고택 임청각에서 나왔다.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퇴계 이황 문중 하계파 후손도 25명이 독립지사였다. 14대 후손 이육사는 시인이기에 앞서 권총술과 수류탄 제조에 능한 독립투사였다. 무실마을 전주 류씨 가문도 16명이 나왔다. 이들이 바로 선비다. 보아라, 이들이 안동이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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