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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년 8월 21일 진흥왕, 황초령에 순수비 세우다] ....

뚝섬 2025. 8. 24. 05:41

[568 8월 21일 진흥왕, 황초령에 순수비 세우다]

[진흥왕 순수비]

 

 

 

568년 8월 21일 진흥왕, 황초령에 순수비 세우다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은 영토를 크게 넓힌 정복 군주였다. 그는 확장된 땅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서 각각 비석이 발견됐다. 창녕비를 제외하면 다른 세 비석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왜 이런 곳에 비석을 세웠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북한산에 있는 순수비는 비봉 위에 있는데 올라가는 길이 없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황초령비는 함흥 북쪽의 해발 1206m 황초령에 있다.

황초령비에 새겨진 연도는 진흥왕 29년(568년) 8월 21일(음력)이다. 마운령비도 비문을 통해 같은 때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산비는 연도 부분이 없어졌지만 비석이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동일한 규격인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들은 신라의 서라벌에서 제작돼 각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비는 무학대사의 비석이다. 마운령비는 남이장군이 세운 비석으로 알려졌는데, 황초령비는 그래도 일찍 탁본이 만들어져 신라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이 비석의 탁본을 뜬 사람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이었다. 신립이 북병사로 있을 때 황초령비의 탁본을 떴고,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은 ‘대동금석서’에 탁본을 수록해 세상에 전했다. 영조 때에는 함경도관찰사 유척기가, 정조 때는 함흥부사 윤광호가 탁본을 떴다 하니 그때까지는 비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석이 높은 곳에 있고 탁본을 뜨는 일이 번거로웠던 탓인지 백성들이 비를 파묻었다고 한다. 떨어뜨려 깨뜨린 뒤에 파묻은 것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함흥판관 유한돈은 홍양호의 부탁으로 비석을 찾아봤는데 부서진 한 조각만 간신히 찾아냈다.

 

북한산비가 무학대사비가 아닌 진흥왕의 순수비란 사실을 밝혀낸 김정희는 황초령비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정희는 순조 32년(1832년)에 친구 권돈인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석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두 조각을 찾아내 관아로 옮겨 놓았다. 김정희는 이어 철종 3년(1852년)에 후배 윤정현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석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 놓으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황초령 위로 올리기는 어려웠는지 황초령 아래 중령진에 비각을 지어 비석을 보관했다. 이로 인해 동네 지명도 진흥왕의 이름을 딴 진흥리가 됐다. 1931년에 또 한 조각이 발견돼 비석은 세 조각으로 복구됐다.

현재 이 비석들은 북한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는 “신라가 이렇게 북방까지 진출했을 리 없다”며 황초령비를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9년 황초령보다 북쪽에서 마운령비가 발견되면서 이 주장은 잘못됐음이 밝혀졌다.

황초령비의 역사는 단순한 석비 발견의 과정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기록이 보존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누군가의 호기심과 집념, 그리고 우연이 맞물릴 때 역사는 다시 빛을 본다. 김정희의 깊은 관심 덕분에 황초령비는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다. 역사는 발견 그 자체가 끝이 아니다. 세대를 거듭한 지속적인 관리 속에서 완성된다.


-이문영 역사작가, 동아일보(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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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수수비

 

패기 넘친 20대 왕, 영토 크게 넓히며 세운 기념비

신라 진흥왕, 백제 성왕과 손잡고 고구려 공격해 한강 유역 빼앗아
100년 나제동맹 깨고 백제 기습해 관산성 전투 승리하며 '승승장구'
자신의 업적 알리는 순수비 세워
 

 

최근 일본에서는 7~8세기 고대 비석 3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대요. 그런데 얼마 전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을 맡고 있는 마에자와 가즈유키 전 요코하마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한국을 방문해 "비석 3점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라에서 건너온 이주민이나 그 후손이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어요. 특히 비석 3점 중 711년 무렵에 만든 '다고비'라는 비석은 신라 진흥왕순수비 중 마운령비를 빼닮았답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 때 세운 4개의 비석입니다. 이 중 마운령비는 568년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 경계에 마운령이라는 고개에 세워진 비석이에요. 진흥왕 때 신라가 이미 함경남도에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지요. 삼국 중 가장 늦게 기지개를 켠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대거 확장하고 이를 기념하는 순수비를 곳곳에 세웠답니다.

백제와 손잡고 한강 유역을 빼앗다

오늘날 경주 일대에서 형성된 신라는 건국 이후 줄곧 백제, 고구려에 뒤처져 있었어요. 제22대 지증왕 무렵에서야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왕의 권력을 키우면서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제대로 갖추었지요.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의 눈치를 보던 나라'에서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 삼국 통일을 꿈꾸는 나라'로 성장시켰습니다. 신라는 진흥왕의 강력한 영토 확장 의지와 뛰어난 전략 덕분에 영토를 넓히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강 유역은 교통이 편리하고 농사가 잘될 뿐 아니라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여 세력을 넓히기 좋은 요충지였기 때문이었죠.

마침 강대국이던 고구려는 왕위 다툼으로 내분을 겪고 밖으로는 돌궐의 침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백제의 성왕이 진흥왕에게 "함께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의를 해왔어요.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막기 위해 100년 넘게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답니다. 한강 유역을 노리던 진흥왕은 성왕의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551년,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았어요. 두 나라는 한강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습니다.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한강의 상류 지역을 차지하였지요.

네 곳에 순수비를 세우다

그런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해버렸어요. 이미 백제를 꺾을 힘이 있다고 판단한 진흥왕이 의리 대신 실리를 택한 것이지요.

화가 난 백제는 554년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러 나섰습니다. 두 나라 군대는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 있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였어요. 결과는 신라의 대승이었습니다. 백제군은 대패해 달아났고, 심지어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성왕은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백제를 누르고 한강 유역을 확고히 차지하며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나갈 수 있었습니다. 556년에는 함경남도까지 영토를 넓혔고, 562년에는 이사부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고령 지방에 있던 대가야를 무너뜨리고 낙동강 너머 가야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삼았어요.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나라가 생겨난 뒤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진흥왕의 나이가 고작 20대였으니 그의 용맹과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가 크게 넓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1년 가야의 영토였던 경남 창녕을 직접 둘러본 뒤 창녕 척경비를 세웠어요. 이어 568년에는 한강 유역과 함경남도 함흥 등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직접 둘러보며 민심을 살피고 백성을 위로하며 상을 내려주었습니다. 더불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어요.

[임금의 업적 알리는 비석 '순수비']

순수비(
巡狩碑)는 임금이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진흥왕은 자신이 손수 넓힌 영토를 돌아보고 나라의 위세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반도 네 곳에 순수비를 세웠지요. 그래서 순수비는 주로 임금의 업적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왕을 수행했던 신하의 이름과 관직 등도 나와 있어 신라의 신분제와 관제 등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지요.

그런데 진흥왕은 단양에 적성비(赤城碑)라는 것을 세우기도 했어요. 적성비는 왕의 업적을 알리기보다 적국이 차지하던 성을 공략한 신하의 공을 칭찬하고, 그 지역에 살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양 신라적성비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성을 빼앗은 이사부와 여러 신라 장군, 또 이들을 도와 공을 세운 사람들을 칭찬하고 이 지역에 살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거예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기획·구성=배준용 기자, 조선일보(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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