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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금도 기계가 받는 세상] ['초상집 喪主']

뚝섬 2024. 8. 27. 06:04

[부조금도 기계가 받는 세상] 

['초상집 喪主'] 

 

 

 

부조금도 기계가 받는 세상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엔 우리 옛 상가의 조문 풍경이 담겨 있다. 주인공의 노모가 별세하자 조문객들이 빈소를 찾아 슬픔에 빠진 아들을 위로하는데 겉보기엔 잔칫집이다. 술상이 차려지고 밤새도록 노름판이 펼쳐졌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초상집 가면 술 마시고 화투 치며 밤샘하는 이가 많았다. 빈소가 쓸쓸해선 안 된다는 사회 통념이 만든 장례 문화였다.

 

부조 봉투를 쓸 때는 격식을 차리고 정성을 다했다. 봉투에 사인펜이나 붓펜으로 賻儀(부의)라고 적었고, 속지에 위로 문구와 조의금 액수를 적을 때도 손 글씨로 정성 들여 썼다. 경조사에 빠지는 것은 큰 결례였다. 그러나 워낙 하객과 조문객으로 북적대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도 적지 않았다. 축의금이나 부의금 봉투를 엉뚱한 부조함에 넣었다가 찾는 소동이 빚어졌고, 부조함 속 돈을 슬쩍하는 범죄도 끊이지 않았다. 영화 ‘축제’에도 조문객이 노름 판돈을 모두 잃자 부의금에 손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결혼식 축의금을 사람이 받는 접수대가 없어지고 대신 컴퓨터 모니터에 축의금을 직접 입력하는 키오스크가 등장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키오스크에 축의금을 넣고 하객 이름을 남기면 주차권과 식권이 나온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데 익숙한 MZ세대는 편리하다며 반기지만 “축의금을 기계가 받느냐”며 낯설어하는 이도 적지 않다.

 

▶축의금 키오스크 이전에도 모바일로 청첩장 돌리고 부고를 알리는 세태는 이미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오랫동안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하기 어려웠던 상황도 ‘SNS로 성의 표시’라는 신풍속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모바일 부조금을 받은 이들은 도난과 분실 위험이 없어서 좋다고 한다. 부조금은 미래의 부채인데 혼주나 상주 이름과 계좌를 모두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돈을 보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는다. 관가에선 모바일 부조가 김영란법 이후 법정 한도를 넘는 부조금을 받았을 때 되돌려주기 편리하다며 선호한다.

 

▶시대가 바뀌면 축하와 위로의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 축의금 접수 키오스크가 생겨난 데는 돈을 대신 받아 줄 사촌조차 드물어진 저출생 시대의 음영도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요즘엔 전과 달리 상가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예의다. 부의금을 속지로 싸면 번거롭다며 봉투에 돈만 넣으라는 상주도 있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이웃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 함께 웃고 우는 마음만은 바뀔 수 없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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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집 喪主'


한국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한다.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으면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좌파는 역대 선거가 보수가 운동장 위쪽을 차지한 가운데 치러졌다고 불평해 왔다. 30% 훨씬 넘는 단단한 보수 유권자들이 그런 지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완전히 반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사태가 지축(地軸)을 뒤틀어 놓은 것이다.

▶자유한국당 대선 주자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27일 TV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 후보가 돼본들 초상집 상주 노릇밖에 더 하겠나"라고 했다. 본선에서 자유한국당을 뛰어넘는 범(汎)보수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얘기였지만 '초상집 상주'란 비유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 보수가 처한 딱한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홍 지사는 '원조 저격수'라 불린다. 논리가 단순하고 표현이 거칠 때가 있지만 전략적인 데다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얼마 전 홍 지사는 박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 "풀은 바람이 불면 눕지만 지금 검찰은 바람이 불기 전에 눕는다"며 검찰을 비난했다. "지금 검찰이 눈치 보는 것은 딱 한 명(문재인)일 것"이라고도 했다. 어제는 "교체할 정권이 없어졌는데 무슨 정권 교체냐"고 했다. 대선 판에 뛰어들면서는 '양박'(양아치 친박) 배제를 천명하기도 했다.

▶정치에서 '초상집'은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와 같다. 2007년 대선이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결판나자 안희정 충남지사는 '폐족(廢族)'을 자처했다. 폐족이란 조상의 죄로 벼슬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는 상황도 맞이했다.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안희정·이광재 등 친노 핵심들이 광역단체장으로 진출하면서 부활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이 초상집이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逆風)앞에서 모두 초주검이 돼있었다. 그때 '초상집 상주'가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도 한나라당을 살려냈다.

사실 상갓집 상주는 그렇게 초라한 존재가 아니다.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예(禮)를 표한다. 상주에겐 슬픔을 이기고, 망자를 품격 있게 보내고, 남은 집안을 지탱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 반면 대접받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을 '초상집 개'(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한다. 지금 보수 정치에 필요한 것은 '상가지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상주(대선 후보)다. 날은 저무는데 가야 할 길은 멀다.

-최재혁 논설위원, 조선일보(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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