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餘暇-City Life]

[읽는 것은 멋지다 '텍스트 힙'] [건달의 철학]

뚝섬 2024. 10. 29. 06:18

[읽는 것은 멋지다 '텍스트 힙']

[건달의 철학]

 

 

 

읽는 것은 멋지다 '텍스트 힙'

 

베스트셀러 코너에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 책들이 꽂히고 있다. 2021년 1종, 2022년 2종이었던 쇼펜하우어 책은 작년 9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이후 32종이 출간됐다. 작년 말 배우 하석진이 방송에서 쇼펜하우어를 소개하면서 시작됐고, 걸그룹 ‘아이브’ 장원영이 관련 책을 언급하자 판매가 폭증했다. 장원영은 “염세주의적 쇼펜하우어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군자는 떳떳하고 소인은 늘 근심한다는 말이 좋다”며 공자의 ‘논어(論語)’도 추천했다.

 

▶아이돌이 입은 옷이나 들렀던 식당처럼 요즘은 그들이 읽은 책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유행이 된다. 책이나 활자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20대 아이돌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힙(hip)하다(멋지다)는 이미지를 줬다고 한다. 그래서 ‘읽는 것은 멋지다’는 의미의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용어가 MZ세대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독서와 도파민의 합성어인 ‘독파민’도 등장했다. 광화문광장에 누워 책을 읽고, 홍대나 합정동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 국밥 한 그릇을 비운 뒤 올리던 완식(完食) 인증 샷 대신 책 한 권을 읽고 완독(完讀) 인증 샷을 올린다.

 

▶‘지적 허세’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 부모 세대들도 그 나이 때 마찬가지였다. 80년대에는 읽지도 않는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대학생이 수두룩했다. 미국서도 교양인 행세 하려면 잡지 ‘뉴요커’ 구독이 필수였고, 카페에서 ‘르 몽드’를 읽어야 파리지앵 취급을 받았다. 요즘은 잡지 ‘뉴요커’보다 부록인 에코백이 교양인의 상징이다.

 

유명인들이 공항에서 입은 옷들이 유행하면서 ‘공항 패션’이 화제가 됐다. 요즘은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이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출국 때 자주 책을 들고 나온다. 그녀는 메이크업 중간에도 독서를 하거나 인상적 문구를 필사(筆寫)한다. 이유를 묻자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치인도 공항에 책을 들고 나타나고 있다.

 

▶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텍스트 힙’ 유행에 기름을 부었다. ‘힙하다’는 건 남들과 다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에서 ‘텍스트 힙’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책을 읽는 게 남달라 보이고 멋있어 보이겠나. AI 시대에서 읽기와 쓰기로 단련된 사고력은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정우상 논설위원, 조선일보(24-10-29)-

_____________

 

 

건달의 철학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으면 건달이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으면 노예의 삶이다. 건달은 시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요즘과 같은 사회 시스템에서는 50대 중반에 직장 그만두고 나면 건달 된다. 처음으로 건달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면 아주 당황한다. '놀아보지도 못하고, 해 놓은 것도 없고, 내 인생 실패했다'고 자학한다. 매일 골백번씩 이런 생각의 망치로 자기를 때린다. 피가 날 때까지 때린다. 나는 지난 15년 가까이 '1인 기업가'이지만 사실은 출퇴근 없고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전국을 떠도는 건달 비슷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건달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한다.

건달도 철학이 있어야 건달 생활을 견딘다철학을 가지려면 산천을 알아야 한다풍수(
風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저 산이 바위산으로 솟았으니까 저기쯤 가다가 부드럽게 노기(怒氣)를 풀었구나, 저 아래에 절터가 있으니 기운이 좋겠구나, 물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구나, 소쿠리같이 둘러싸고 있어서 기운이 빠질 데가 없구나, 음중양(陰中陽)의 터구나, 처음에 힘이 있다가 나중에 흘러 버렸구나' 등등을 이해하면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산천과 대화하면 외롭지 않다. 별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산천의 기운이 내 몸에 들어온다고 여겨진다. 저 바위산의 기운을 아랫배로 끌어들이면 외롭지 않다. 풍수는 자연과의 교감이 핵심이다. 문명사회의 압박을 해소할 수 있다. 사실은 돈이 없어야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돈이 많으면 주색(酒色)이 눈에 들어오지, 자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건달의 철학을 가지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특히 역사책이다. 구약도 의미가 함축된 역사책이자 '영(
靈)발 책'이다. 역사책 중에서도 전쟁사가 배울 게 많다. 포에니 전쟁, 이스탄불 공방전, 로도스섬 공방전 등이 그렇다. 까딱 잘못하면 몰살당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깨닫는다. 역사를 많이 알면 화제가 풍부해져서 주변에 사람이 모인다.

건달 생활을 견디려면 차(
茶)에 대해서 알면 좋다. 출근도 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혼자서 포트에 물을 끓여 찻잎을 차호에 넣고 한 잔 우려 마시면 자기 위로가 된다. 건달도 철학이 필요하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조선일보(17-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