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혜화동의 철학자들] [남촌(南村)]

뚝섬 2026. 2. 2. 05:59

[혜화동의 철학자들]

[남촌(南村)]

 

 

 

혜화동의 철학자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였다. 대학 교수들이 이 일대에 많이 살았던 것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일조했다. 당대의 철학자들이 혜화동에 살았다. 박종홍(朴鍾鴻·1903~1976), 최재희(崔載喜·1914~1984), 김태길(金泰吉·1920~2009)이 혜화동에 집이 있었다.

 

서울대가 1975년 관악구로 옮겨가기 전에는 근처의 동숭동에 문리과대학이 자리 잡고 있던 것도 혜화동에 지식인들이 많이 산 이유의 하나였다. 박종홍은 ‘국민교육헌장’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명제를 던졌다. 최재희는 칸트철학과 휴머니즘에 평생토록 골몰한 철학자였다. 김태길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종로구는 이 세 철학자를 기념하여 혜화동에 ‘철학자의 길’을 조성한다고 들었다.

 

필자는 1980년대에 대학 다닐 때 좋지도 않은 머리로 도대체 순수이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끙끙거렸다. 교과서는 최재희 선생이 번역한 ‘순수이성비판’이었다. 이 책과 씨름하면서 밑줄을 긋곤 한 추억이 생생하다. 엊그제 그 자제분인 최완진(74·한국외대 명예교수)을 만나 아버지 책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지금도 나갑니다. 1972년에 박영사에서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인쇄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찍는다고 합니다. 출판사에서 처음에는 구색 갖추기로 출판했지만 50년 넘게 계속해서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학술 서적으로 50년 넘게 절판 안 되고 계속 팔리는 책은 드물다고 하네요”. 1972년 당시 이 책을 번역할 때 서울대 철학과 조교는 이한구(81·학술원 회원)였다. 최재희가 번역한 이 책의 교정을 7번이나 봤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교정은 보통 1~2번 보는 데서 그친다. 7번은 그만큼 징그럽게 교정을 봤다는 이야기이다.

 

제자들이 전하는 최재희의 공부 습관은 세숫대야였다. 삼복더위 때도 혜화동 집 2층 서재 책상에서 세숫대야의 찬물에 맨발을 담그고 책을 봤다고 한다. 에어컨이 없을 때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 진짜 학자는 이렇게 공부하는구나’ 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인물이 나오면 어떤 집터에서 태어났는지 살펴보는 게 강호 동양학의 주 관심 분야이다. 최재희가 태어난 고향 고택은 경북 청도군 각남면에 있었다. 4대조가 대사간 벼슬을 지낸 최학승이다. 집터가 좋다. 남산에서 꼬불꼬불 내려온 지맥이 U턴하여 다시 자신의 출발지를 쳐다본다. 회룡고조(回龍顧祖)의 기운이 뭉친 지점에 집터가 있었다.

 

-조용헌 동양학자, 조선일보(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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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南村)

 

[서울시, 158억 들여 회현동 일대 관광명소로 개발] 

 

北村 살린 이명박… 南村 살리려는 박원순 

 

-최근 30년 시간이 멈춘듯
일본인이 지은 적산가옥, 50년 넘은 건축물 80채 보수
'시민아파트'는 예술인 공간으로… 서울로와 이어지는 보행로 조성
 

 

조선 시대 한양의 가난한 선비 마을, 일제강점기 경성의 일본인 집결지, 해방 이후 퇴폐적 욕망의 분출구였던 서울 남촌(南村)이 다시 태어난다. 회현동 일대 남촌은 1980년대 이후 개발과 정비의 손길에서 멀어져 있었다.

북촌과 서촌에 비해 소외돼온 남촌 일대(50만5736㎡, 약 15만3000평)를 관광지로 재단장한다고 서울시가 7일 발표했다. 시는 남촌을 북촌 한옥마을처럼 역사가 숨 쉬는 관광지로 만들 계획이다. 북촌 살리기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중점 사업 중 하나였다. 2006년 이 전 시장은 북촌을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역사 문화 벨트로 만들겠다는 북촌 장기발전구상을 내놨다.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북촌 한옥마을의 본격적인 태동이었다. 이번에는 '박원순의 서울시'가 남촌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곽 있던 자리를 공원으로

시는 2018년까지 158억원을 들여 일본인이 지은 적산가옥(
敵産家屋), 50년 이상 된 낡은 건물 80채를 보수한다. 47년 된 회현시민아파트는 예술인 주거 공간으로 리모델링한다. 서울역 고가공원 '서울로 7017'과 이어지는 보행로도 조성한다. 남촌 살리기는 시가 2015년부터 서울역 일대, 중림동, 서계동, 남대문시장 등 총 다섯 권역(195만㎡)으로 나눠 추진하는 서울역 일대 도시 재생 사업의 일부다. 거점 다섯 곳이 중심이다. 회현동 은행나무, 표암 강세황 집터, 회현 제2시민아파트, 근현대 건축 자산 밀집 지역, 소파로 아래 남산공원 등이다.

현 우리은행 본점 앞에 있는 회현동 은행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 수령(
樹齡) 500년이 넘는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을 시작으로 정승 12명을 내리 배출한 마을의 명문가 동래 정씨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시는 나무 주변(4779㎡)을 광장으로 조성해 은행나무 축제 등 지역 행사를 벌이는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현재 구립 경로당(2018년 이전 예정)이 들어선 단원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의 집터엔 강세황기념관(267㎡)과 역사공원(120㎡)을 새로 짓는다. 

 

남촌에 밀집한 옛 건축물 80채도 고쳐서 보존한다. 현재 남촌엔 조선 시대 한옥 3채, 일본식 가옥인 적산가옥 67채, 60~90년대까지 현대 건축물 10채가 있다. 주민들이 건물 외형을 유지한 채 수리할 수 있도록 시에서 최대 1억원을 0.7%의 낮은 이자로 빌려주기로 했다. 주민 지원 시설엔 새로 선보일 남촌 전통주 가게가 들어선다. 1970년 준공한 회현시민아파트(352가구)는 문화예술인을 위한 장기 임대 아파트가 된다. 남산 소파로 아래에 가려 야산처럼 방치된 남산 일부(1만7872㎡)에는 산책로를 새로 뚫고 아이들을 위한 생태 숲 놀이터를 만들기로 했다.

서울역 고가공원~남산을 걸어요

남촌의 5대 거점을 잇는 총 길이 1906m의 보행로 5곳이 새로 생긴다. 서울로와 남촌 서쪽을 잇는 보행로 2곳과 남촌 내부를 촘촘히 잇는 보행로 3곳으로 나뉜다. 서울로와 연결되는 보행로는 남대문시장부터 백범광장까지를 잇는 소월로(350m)와 회현역과 남산을 잇는 퇴계로2길(250m) 2곳이다. 나머지 보행로는 은행나무, 시민아파트, 강세황 집터 등 거점을 연결하는 길로 조성할 계획이다. 시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서울역 일대 도시 재생 활성화 계획 수립을 이달까지 완료하고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12월 고시할 예정이다.

시는 먼저 시작한 남산 예장자락 재생 사업, 남산 애니타운 사업, 남산 역사 탐방로 사업과 연계해 2019년까지 남산 일대를 새로 단장한다. 노경래 서울역재생사업팀장은 "소외됐던 남촌이 살아나면 서울역 일대 유동인구도 훨씬 늘어날 것"이라며 "낙후된 서계동·만리동·중림동 등 인근 지역도 자연스럽게 활기를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장형태 기자, 조선일보(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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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허균·정약용… 南村은 선비의 마을 

北村엔 권세가들 주로 살아… 일제땐 일본인 밀집 거주지

  

서울 중구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앞의 은행나무는 오는 2018년까지 이어지는 남촌 재생 사업의 거점 중 하나다. 수령 500년이 넘는 이 나무는 조선시대 정승 12명을 내리 배출한 마을 명문가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높이 24m, 둘레 7m로 서울시 지정 보호수다. /서울시 

 

조선시대였던 18세기 이후 서울에선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돌았다. 남촌 사람들은 술 빚어 마시는 것을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잘 만들어 먹었다는 뜻이다. 남촌은 목멱산(남산) 아래쪽 회현동 일대의 마을이었다. 이곳 산기슭은 북사면이라 살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만, 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 양질의 술을 빚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은 최고 권세가인 경화사족(
京華士族)이 사는 북촌과, 역관(통역사)·의관(의사)·율관(법률가) 등 전문직이 사는 중촌(청계천과 종로 일대), 하급 관리와 몰락한 양반이 사는 남촌으로 나뉘었다. 가난한 남촌 선비들은 가죽신이 닳아 떨어질까 봐 그 위에 나막신을 신었다. 걸을 때마다 나막신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남산 딸깍발이 선비'라고 했다.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소설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전형적인 남촌 선비다.

남촌 선비들이 북촌 권세가의 부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 보내자 '남산골 샌님이 자기 벼슬은 못 챙겨도 다른 이 벼슬 뗄 재주는 있다'는 속담도 나왔다.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 1791), 류성룡, 이순신, 원균, 허균, 다산 정약용이 남촌 주민이었다.

남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밀집 주거 지역이 됐다. 이 시기의 경성은 조선인이 모여 살았던 북촌과 일본인이 사는 남촌으로 확연하게 나뉘었다. 193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약 44만 명) 중 25%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남촌 혼마치(

本町·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회현동·을지로·명동 등이 일본인의 공간이었다. 남촌은 일본인이 세운 미쓰코시백화점 등 근대적 상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선 경성의 중심지였다. 광복 후 자산가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남촌 가옥을 사들였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 박용학 대농 회장도 한때 남촌에 자택이 있었다.

  

-신정선 기자, 조선일보(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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