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 나달의 이별 방식]
[정현의 발바닥]
[당당한 22세 정현에 빠져들다]
[정현·조코비치 둘 다 멋지다]
‘촌놈’ 나달의 이별 방식
부상으로 1년 가까이 코트를 떠나 있었던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이 지난 1일 다음 달 호주 브리즈번에서 테니스 투어에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올해 1월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대회 첫날 경기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스페인이 배출한 남자 테니스 전설 라파엘 나달(37)이 다음 주 호주 브리즈번 대회를 통해 약 1년 만에 돌아온다. 지난해 4대 메이저 대회(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US오픈) 호주·프랑스오픈을 석권했던 그는 올해 1월부터 허리·엉덩이 부상 등에 시달리며 2023시즌을 사실상 통째로 날렸다. 원래 부상 후유증은 6~8주 정도 갈 것으로 예측됐지만, 재활이 길어졌다.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다.
나달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현역 세계 1위이자 ‘영원한 라이벌’ 노바크 조코비치(36·세르비아)는 세월을 만났다. 그는 호주·프랑스·US오픈을 차례대로 제패하며 나달(22회)을 제치고 메이저 대회 최다 우승 기록(24회)을 세웠다. 메이저 대회 다음 위상과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1000 시리즈 대회에선 전인미답의 40회 우승 금자탑을 쌓았다. 이 부문 2위도 나달(36회)이다. 테니스 ‘페나조(페더러·나달·조코비치)’ 시대의 후발 주자였던 조코비치는 이제 이견 없는 선두 주자다.
사실 나달도 테니스 선수로 모든 걸 이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그는 이미 2010년에 ‘커리어 골든 슬램(4대 메이저 대회 제패 +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완성했다. 페더러와 조코비치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이다. 클레이 코트에서 유독 강한 그는 프랑스오픈에서만 단일 메이저 대회 기준 최다인 14회 우승해 ‘흙신’으로 불린다. 마요르카섬 출신의 ‘촌놈’인 나달은 경기 외적으로도 수많은 미담을 제조해 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거나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라켓을 코트 바닥에 내리쳐 박살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10대에 만난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는 순정파이며, 2004년부터 지금까지 국내 기아자동차와 후원 관계를 이어오는 의리파이기도 하다.
내년에 38세로 테니스 선수론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달이 복귀를 결정한 배경엔 절친한 친구이자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42·스위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페더러는 선수 말년에 부상에 허덕이며 결국 종용당하다시피 코트를 떠났다. 그는 2021년 윔블던을 마지막으로 대회에 나서지 못하고, 세계 랭킹도 잃은 채 이듬해 9월 은퇴를 선언했다. 나달은 페더러 은퇴식 당시에 아내가 임신 중이었지만 참석해 눈물을 흘렸다.
나달은 지난 5월 자신의 이름을 딴 마요르카 아카데미 기자회견에서 “(부상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고 싶진 않다”며 “꼭 돌아와 내가 원하는 ‘올바른’ 방식으로 현역 생활을 끝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스포츠에서만큼은 편법과 꼼수, 이름값이 통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박수 받겠다는 그의 열정을 응원한다. 그는 “코트 위에서의 긴장감, 환상, 두려움 등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했다.
-박강현 기자, 조선일보(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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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발바닥
어제 호주오픈 결승을 치른 마린 칠리치와 로저 페더러는 작년 7월 윔블던 결승에서도 맞붙었다. 그때 칠리치는 0대3 완패했다. 중간에 의사가 달려와 메디컬 타임아웃까지 썼지만 발바닥 물집을 어쩌지 못했다. 칠리치는 의자에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경기 전 물리치료사가 서른 시간 넘게 매달렸으나 허사였다고 했다. 칠리치는 "물집이 아파서 운 게 아니라 이렇게 큰 경기에서 발 때문에 제 기량을 발휘 못 해 운다"고 했다.
▶정현도 이번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발바닥 물집 때문에 기권했다. 그의 발바닥 사진은 끔찍했다. 성냥갑만 한 빨간 생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대리인은 "물집 밑에 또 물집, 그 밑에 또 물집이 생겼다"고 했다. 같은 곳에 세 겹으로 부르튼 물집이 생살을 파냈다. 단식 테니스 코트는 좌우 폭이 8.23m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전속력 왕복달리기하듯 격렬한 역동작을 몇 시간 반복하면 젊은 발바닥도 배겨 내질 못한다. "테니스는 팔이 아니라 발로 하는 운동"이라고들 했다.
▶보통 사람은 행군 훈련이나 산악 등반 때 물집과 싸움을 벌인다. 열 시간 걸었더니 발가락 전체에 물집이 잡혀 발톱이 물집 위로 둥둥 떴다. 나름 응급처치를 했다. 실을 꿴 바늘 끝을 라이터불로 소독한 뒤 물집을 찌른다. 물집을 관통한 실을 물집 속에 그대로 놔둔다. 실을 따라 물이 빠진다. 여기에 밴드를 붙이고 양말을 신고 걸음을 떼어본다. 발바닥 물집이 어떻게 육신 전체에 고통을 가하는지 치통만큼이나 절절히 깨닫는다.
▶발레리나 강수진 발 사진도 충격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발가락 마디 마디에 소나무 옹이같이 불거진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백조처럼 무대를 둥둥 떠다녔던 그녀는 토슈즈 안에 무시무시한 발가락을 숨겨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숭고(崇高)했다. 그 뒤로 피겨 여왕 김연아, 축구 전설 박지성, 빙속 여제 이상화, 체조 요정 손연재 같은 여러 스타 발 사진을 보면서 숙연해졌다.
▶정현 발 물집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그 발로 16강전 조코비치를 상대했고, 8강전 샌드그렌을 꺾었다. 코치는 "물집이 생겼다 터지고 생겼다 터지길 반복해서 속 뼈가 보일 지경"이라고 했다. 정현은 경기 뒤 인터뷰에서 농담도 하고 시종 싱글거렸다. 그러나 훈련 때 쏟았을 피와 땀과 경기 끝난 뒤 닥쳐올 영광과 시련은 긴말 필요없이 발바닥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진에 입맞추고 싶었다.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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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22세 정현에 빠져들다
한국 첫 호주오픈 테니스 4강… 박세리·김연아 잇는 스타 탄생
'황제' 페더러와 내일 준결승
개인 스포츠로서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두 개의 종목을 꼽으라면 단연 골프와 테니스다. 한국 스포츠 팬들은 여자골프의 박세리와 박인비, 남자골프 최경주를 보면서 "테니스에선 저런 월드클래스 스타가 과연 나올까" 생각해 왔다.
"난 활활 타고 있다"-경기 종료 직전까지 정현을 고민하게 만든 ‘승리 세리머니’는 이렇게 두 팔을 활짝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세우는 것이었다. 정현이 24일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대회 4강 진출을 확정한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모습. 그는 자유롭고 당당하게 승리를 만끽했다. /EPA 연합뉴스
정현(22·세계 58위)이 팬들의 꿈을 이뤘다. 정현은 24일 열린 테니스 메이저대회 호주오픈 남자단식 8강전(멜버른)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미국·97위)을 3대0으로 완파하며 4강에 올랐다. 한때 세계 1위였던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현재 14위)를 누르고 8강에 진출해 한국 테니스사를 새로 쓴 데 이어, 이틀 만에 자기 기록을 경신했다. 경기는 정현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2시간 28분 만에 끝났다.
이날 승리로 정현은 1932년 사토 지로(일본)에 이어 86년 만에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로 기록됐다. 정현은 지금까지 쌓은 포인트만으로도 세계 30위 안쪽으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역대 한국인 최고 순위는 이형택(42)의 36위였다.
정현은 한국에서 '스포츠 아이돌'급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피겨 김연아, 축구 박지성과 같은 특급 스타로 성장할 기세다. 팬들은 이전의 한국 선수들과 다른 그의 태도에도 감탄한다. 정현은 경기 직후 영어 인터뷰에서 "마지막 포인트를 앞두고 세리머니 뭐 할지 생각했다"고 말해 전 세계 시청자를 웃게 했다. 조코비치를 누르고 중계 카메라 렌즈에 '보고 있나'라고 썼던 정현은 이번엔 '충(CHUNG· 영문 성 표기) 온 파이어'라고 한글로 적어 "난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의미를 국내 팬들에게 전했다. 겸손이 미덕이라 생각하고, 관중 앞에서 영어 한마디를 못해 쩔쩔맸던 이전 선수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기 직후 한국 인터넷 공간은 '정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10위를 휩쓸었다.
정현은 26일 로저 페더러(스위스·2위)와 결승 티켓을 놓고 다툰다. 페더러는 지난해 이 대회 우승을 포함해 메이저 대회에서만 19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린,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
-석남준 기자, 조선일보(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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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조코비치 둘 다 멋지다
어제 미국 사는 친구 전화를 받았다. "정현이 누구야? CNN에 종일 나오네. 한국 뉴스라면 매일 북핵 아니면 평창올림픽에 온다는 북한 사람들 이야기뿐이더니…."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현이 무결점 플레이로 유명한 세계 테니스 전 랭킹 1위 조코비치를 이긴 이야기는 세계를 놀라게 한 화제였다. 엄동설한인데 테니스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이긴 것하고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에 오른 것하고 어느 게 더 어려운 건가?"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효과를 따지면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4강 신화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승패 확률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세계 랭킹 58위 정현은 1회전에서 35위, 2회전에서 65위, 3회전에서 4위, 4회전에서 14위를 이겼다. 1대1로 3시간 넘게 혈투를 벌이는 테니스는 이변이 가장 적은 스포츠로 꼽힌다.
▶남반구 도시 멜버른에서 2주일간 열리는 호주오픈은 '1월의 스포츠 축제'로 불린다. 북반구가 얼어붙은 시점에 열려 더 뜨거운 주목을 받는다. 매년 70만명 이상이 직접 관람한다. 엄청난 돈 잔치도 벌어진다. 남녀 단식 우승 상금 400만 호주달러(약 34억원)에 총상금 5500만 호주달러(약 471억원)다. 남자 골프 최다 상금 대회인 US오픈(1200만달러)을 압도한다.
▶테니스는 매너 스포츠다. 경기가 끝난 후 정현은 "조코비치는 나의 우상이었다"고 했다. 조코비치는 취재진이 팔꿈치 부상에 대해 묻자 "오늘 내 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했다. 둘 다 멋지다. 조코비치는 지난해 후반기 6개월 동안 오른 팔꿈치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했다. 세르비아 출신인 그는 1990년대 내전으로 폭격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 물 뺀 수영장에서 훈련하며 세계 최고 스타로 성장했다.
▶정현은 어디까지 올라갈까. 테니스는 '폭발형 성장 그래프'를 그린다. 정체와 답보가 지속되다 어느 순간 폭발하듯 실력이 느는 운동이다. 정현은 고수들과 대결하면서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모습이다. 한국 선수가 조코비치나 페더러, 나달을 이기는 건 상상에서나 가능했다. 한 팬은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정치에 자리를 뺏겼던 스포츠가 여드름투성이 스물두 살 청년 덕분에 즐겁다.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조선일보(1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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