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죽이기'
軍의 역사적 정통성을 아무리 뒤집으려 해도 전쟁 영웅이 남긴
거대한 기록의 벽을 절대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쳐가는 것이다
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6·25전쟁에 대해 "북한의 침략을 이겨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켰다"고
말했다. 많은 언론이 이 말을 크게 보도했다. 1면 톱기사로
쓴 신문도 있었다. 콩을 콩, 팥을 팥이라고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 당연한 말을 이렇게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3년 전 히말라야에서 쓰고 공개한 글이 있다.
6·25 전쟁에 미군 일원으로 참전한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 대령을 전설적 영웅으로 찬양하는
내용이다. 다음이 걸렸다. 용감한 미군 대령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비겁한 국군 지휘관을 대비해 말 보따리를 풀어간다.
"김 대령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을 당해가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그 시기, 우리군
일부 고위 지휘관들은 전투마다 연전연패해 전선을 무너뜨리고도 훈장을 받았다. 지휘를 부하에게
떠넘긴 채 전선을 무단 이탈한 지휘관도 있었다. 그로 인해 유엔군으로부터 굴욕의 군단 해체 조치를 당하고, 작전권이 미군에 넘어가는 빌미를 제공했다."
국군 지휘관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끝난다. '일부'만
말하고 '다수' 지휘관에 대해선 침묵한다. 용감한 미군과 비겁한 국군. 이 구도를 분명히 해야 전시작전통제권과
같은 안보·전략 문제를 민족 감정의 과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같은 글에서 "아직도 작전권을 미군에 맡겨놓고, 미군에 의존해야만 하는
약한 군대"라고 했다. 그러면 지금 문 정권의 국군도
약하고 비겁한 존재인가. 작전권을 가져오고 미군으로부터 독립해야 강해지고 용감해지는가. 몇 걸음 더 나아간 특정 세력의 '미군 철수' 주장도 맥이 통한다. 용감하면 내보내라는 것이다.
이들은 파편적 사건으로 전체를 규정한다. 무능한 국군 때문에 전작권이
넘어갔다는 주장이 그렇다. 전작권이 6·25 발발 직후 통합적 작전 수행을 위해 전략적으로 유엔군에 위임됐다는 것을 학자들은 다 안다. 그들이 말하는 비겁한 패배는 강원도 현리 전투를 말한다. 이때의
전작권 환수는 전투 현장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던 지엽적 권한에 불과했다. 전투는 치욕적이었으나 그 결과
미군의 집중 훈련이 시행돼 국군은 전쟁 후반기 전선의 3분의 2를
책임지는 강군으로 성장했다. 파편적 사건을 종합하면 국군의 역사적 위상은 달라진다. 국군의 비겁을 말하는 세력의 주장은 실체(實體) 앞에서 무너진다. 진실을 뒷받침할 팩트를 69년 전 국군의 선봉에서 싸운 노병(老兵)이 축적했기 때문이다. 백선엽(白善燁)이다.
그는 6·25 때 한국을 지킨 전쟁 영웅이다. 그만큼 큰 업적이 민주화 이후 이념적 혼란 과정에서 그가 낸 저술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 출간한 '군과 나'를
읽을 때 나는 류성룡의 '징비록'을 떠올렸다. 거짓과 과장을 발라내고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서술한 현장과 체험의 기록이다.
'징비록'이 없었다면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영웅의 역사적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명군(明軍)을 받들고
조선군을 무시하던 선조의 비대칭 세계관은 '용감한 미군과 비겁한 국군'
구도의 역사관과 흡사하다. 6·25 때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리지웨이와 밴플리트는 '군과 나' 서문에서 "이 책 덕분에 한국군이 본분을 다하지 못했고
무능력했다는 잔인하고 그릇된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증거를 찾게 됐다"고 썼다. 문 대통령이 읽었다면 히말라야에서 그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대주의 역사관도 류성룡을 뛰어넘지 못했듯, 국군의 역사를 왜곡하는 어떤 시도도 백선엽을 넘지 못했다. 최근 특정 세력의 '백선엽 죽이기'는
국군의 과거를 흑역사로 만드는 데 실패한 세력이 미친 듯 뿜어대는 독기에 해당한다.
신부 함세웅은 그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악질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야당 대표가 그를 찾아가 국가 안보를 걱정한
다음이었다. 내가 함세웅 이름을 처음 들은 건 35년 전
그가 차를 몰고 가다가 일곱 살 아이를 치어 숨지게 했을 때였다. 자책(自責) 때문에 그가 신부 생활을 제대로 할지 진심으로 걱정하던 동네
신자들을 기억한다. 순진한 시대였다. 그 후 그는 더욱 맹렬히
남의 허물을 물어뜯었다. 팔순에 접어드는 지금도 백수(白壽)가 넘은 노인을 향해 저런다. 치사(致死) 사고 때문에 그를
"살인자"라고 할 수 없듯, 명령을
받고 전출된 부대의 성격을 근거로 "악질 친일파"라고
공격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신부 함세웅은 이 상식적 잣대를 자신, 또는 자신의 패거리에게만 적용한다. 백선엽을 공격하는 사람
상당수의 정신 상태와 처세 방식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선우정 부국장 겸 사회부장, 조선일보(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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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1) 백선엽(1920~
): 하극상에 미련없이 軍을 떠난 전쟁 영웅... 이듬해
5·16혁명이 터졌다
612년
중국 수나라의 양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에는 살수(청천강)에서
침략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있었고,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에 침공했을
적에는 한산도 대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조선조의 이순신이 있었고, 1950년 인민군에게 남침을 당하여
악전고투하던 때 대구, 부산을 향해 돌진하려는 인민군을 칠곡 가까이 있는 다부동에서 목숨을 걸고 저지한
백선엽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그의 어머니(방효열)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자녀를 키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방씨 성을 가진 모든 여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방씨가 시집가면 뉘 집에 가나 그 집이 잘돼"라고
어머니 자랑을 했던 그가 나와 특별히 친했던 까닭이 내 어머니가 방씨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강서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성적이 하도 우수하여 평양사범에 입학하였다. 백선엽은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국민학교 교사 노릇을 한동안 했지만, 군인이
되고자 하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어 새로 탄생한 만주국의 봉천(심양)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던 때 백선엽은 만주군의 중위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일성이 평양에서
적위대(붉은군대)를 창설하던 무렵, 백선엽은 조선민주당을 세운 조만식 밑에서 비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뜻하는 바가 있어 그 겨울에 월남하여 남한에 생긴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그 이듬해 육군 중위로
임명되어 제5연대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국방경비대 내에서 대대장, 연대장을
거쳤고 1948년 12월에는 대령으로 진급되었다. 6·25 직전까지는 사단장으로 근무했고 6·25가 터진 뒤에는 준장으로 진급해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전쟁 와중에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대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별을 단 그 많은 장성 가운데서 서북 출신일 뿐 아니라 아무런 배경도 없는 백선엽을 발탁한 대통령 이승만의 혜안에 새삼 감탄한다. 우남 이승만은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고, 남의 마음을 살 만한 매끄러운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백선엽에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한 것이다.
6·25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사병과 장성은 많다. 그러나
만일 1950년 8월과 9월에 벌어진 다부동 전투에서 제1사단장 백선엽이 발휘한 뜨거운
애국심이 없었더라면 대구는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고 낙동강과 부산도 모두 인민군에 의해 점령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칠곡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해야 했던 백선엽의 제1사단은
미국 제1기병사단과 공동 작전을 펴게 되었는데 여러 날 굶주린 데다가 피로가 겹친 군인들이 고지를 이탈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접한 백선엽은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다부동의 고지를 사수해야만
했다. 사단장 백선엽이 병사들을 이끌고 앞장서 나가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후퇴할 낌새를 보이면 너희가 나를 쏴라"는 엄명을
내리고 선두에서 그 고지를 향해 돌진하였고 다부동 고지를 지킴으로써 대한민국을 지킬 수가 있었다. 칠곡군
가산면에 다부동전투 전적비와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1960년 5월 군 내부의 '하극상'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백선엽은 퇴역을 결심하였다. 그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터졌다. 군을
떠난 백선엽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군의 요직에 있을 때 박정희를 남로당
총책으로 몰았던 김창룡 등이 그를 군에서 숙청하려고 했을 때 박정희의 유능함을 잘 알고 있던 백선엽은 적극적으로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백선엽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으로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 그는 나이가 99세가 되었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다. 군대에
있으면서 그는 별을 여러 개 달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운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받은 훈장을 다 달고 외출을 한다면 군복의 앞자락이 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기의 무공을 자랑해 본 적이 없다. 몇 해
전 그에게 별을 하나 더 달아 주자는 국민 열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조금도
그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하여 군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예비역에 편입된
뒤에는 중화민국 대사, 프랑스 대사, 캐나다 대사 등을 역임했지만, 그가 외교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교통부 장관에
임명됐기 때문에 서울시 전철 1호선 완공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충주비료 등 국영 기업체 사장도 지낼 만큼 다양한 경력을 가졌지만 백선엽의 인생 좌표는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옥에라도 가겠다"라는 한마디뿐이다. 백선엽을 만날 때마다 나는 큰 산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이태백의 시 한 수를 읊어 장군 백선엽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홀로 경정산과 마주 앉아(獨坐敬亭山)
뭇새들 높이 날아 다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한 점 흘러가는데 /아무리 서로 봐도 싫증 안 나는 /그대 경정산 있을 뿐일세.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일보(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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