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거제도 일본군 기념탑과 러일전쟁] 러·일이 대포를 꺼낼 때 고종은 파티를 벌였다.. [을사조약과 군함 양무호] 허세의 제국이..

뚝섬 2019. 11. 5. 06:25

거제도 일본군 기념탑과 러일전쟁


러·일이 대포를 꺼낼 때 고종은 파티를 벌였다 


거제도 러일전쟁 기념탑은 무능력했던 대한제국 집권층의 역설적 상징
뒤늦게 근대화한 러시아, 식민지 노리며 아시아 진출… 제국주의 변신한 일본과 조선에서 충돌
조선은 제국주의로 북새통… 국제정세 무지한 집권층은 껍데기 중립 선언으로 대응
지도자 고종은 국가 예산 10% 넘게 쓰며 등극 40주년 파티에 몰두



경상남도 거제시 계도마을 앞바다에 무인도가 하나 있다. 이름은 취도(吹島). 면적은 570평 정도다. 섬 서쪽 봉우리 위에는 탑이 솟아 있다. 기단 높이는 270㎝ 정도고 위에는 70㎝쯤 되는 포탄 탄두가 박혀 있다. 기단에는 '취도 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세운 때는 1935 8월이다. 세운 사람은 일본 해군 중장 이치무라 히사오(市村久雄), 바로 바다 건너 진해에 있던 일본 해군 진해경비부 사령관이다.

탑 기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 때 함대가 밤낮으로 이 섬을 향해 함포 사격을 행했다. 그래서 섬 원형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 해군의 공훈은 이 섬에서 얻은 바가 많아 이 비를 세운다
.'

전쟁 이름은 대마도해전이다. 1905 5 27일 대마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은 전투다. 그 일본 함대 출항지가 거제도 송진포였다
.

1904
2 10일 청나라 뤼순(旅順)에서 시작한 러일전쟁은 대마도해전을 끝으로 1 3개월 만에 실질적으로 종료됐다. 취도는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함포 사격장이었다. 이후 수십 년 이어진 포격 훈련에 섬은 해골처럼 부서지고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하다
.

왜 조선의 섬 취도는 일본 해군 포격에 파괴됐는가. 왜 러시아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아시아 끝까지 와서 전쟁을 벌였나. 그때 조선 지도부는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했는가. 두 나라 모두 조선을 삼키려고 전쟁을 했다. 그 사이에 조선 지도부는,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

러시아의 동방정책과 조선

때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제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한 대량 살상 무기를 대량의 군함에 싣고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어갔다. 요체는 군사력이었다. 소극적으로는 국가 안보를 지키고 적극적으로는 약소국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켜 국익을 얻는 냉혹한 힘이었다.


경남 거제시 계도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 취도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함대가 포격훈련을 했던 사격장이다. 1935년 일본 해군 진해경비부는 이 섬에 '러일전쟁의 기념물'이라며 기념탑을 세웠다. 형체를 완전히 잃은 섬 한쪽 능선에 기념탑이 보인다. 조선을 노리는 제국주의로 북새통을 이루던 그때, 조선 지도부는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은 황제국 청의 '천하(天下)'를 무너뜨린 일대 사건이었다. 충격을 받은 일본 지도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호를 개방하고 1868년 서양식 근대화에 착수했다. 조선 지도부는 서양을 오랑캐로 배격하며 쇄국을 유지했다. 그 사이 일본은 지구상 최초의 비()백인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해갔다.

유럽에는 가장 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러시아가 있었다. 1682년 황제가 된 표트르1(1672~1725)는 서유럽으로 시찰단을 파견해 기술을 배웠다. 직접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와 영국에 가서 포술과 조선술과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다. 돌아와서는 러시아 판 단발령을 내려 남자들 수염을 강제로 잘라버리고 여자들 치마를 잘라버렸다. 해군을 창설해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발트해에 얼음이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했다. 1762년에 등극한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를 집어삼키고 발칸반도와 크림반도로 영토를 넓혔다
.

서유럽을 배워, 남으로 영토를 넓힌 것이다. 그러고 남은 곳이 동쪽이었다. 1891년부터 러시아는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역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9288㎞짜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해나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는 이를 기념하는 탑이 서 있다
.

서유럽 선발 제국들은 아시아를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인도를 향해 남하하는 러시아와 식민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 사이에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1853 10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벌인 크림전쟁에 오스만 편으로 참전했다. 1854 3월 러시아령인 사할린 북쪽 캄차카 반도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공격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박 터지게 전쟁을 벌이자, 1854년 일본은 두 나라를 배제하고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고래를 따라 온 미국 포경선이 동해를 누비고 다녔다. 영국과 프랑스는 울릉도와 독도(리앙쿠르)를 해도에 그려 넣고 동해를 누비고 다녔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남하하는 러시아 견제책이었다
.




거제도 취도에 서 있는 일본 해군 기념비. 함포 포탄 탄두를 꽂아 만들었다.

북새통이 된 조선과 지도부의 무지


말 그대로 전 세계가 북새통이었다. 그 동쪽 중심에 조선이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조선만이 이 북새통이 된 정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무도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p91). 아니, 가지려 하지 않았다.

1887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조선 공사는 8명이었다. 그런데 18년 4개월 동안 실제로 공사가 현지에 재임한 기간은 6년 9개월이었다.(한철호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 파견과 활동' 푸른역사, 2010, p290) 외교관이 정보 수집과 외교 활동은 하지 않고 국내 정치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조선 지도부는 사회 체계를 갈아엎고 대량 살상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본을 목격할 수 없었다. 서유럽을 흉내 내 스스로 제국주의화한 일본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뤼순을 차지한 사실이 무슨 뜻인지 조선 정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

1882년 수교한 미국은 교역량이 미미하자 2년 만에 조선 주재 공사 지위를 대사급인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총영사급)'로 강등했다.(최문형, p172)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그런 미국을 '큰형(Elder Brother)'이라고 불렀다(1897년 9월 13일 '한미 관계 자료집'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 도무지 세상 물정에 무지했던 그들이었다
.

여기까지가 20세기 초 어느 무렵 조선의 무인도 취도가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 훈련에 형체를 잃게 된 경과다. 조선 옆에 일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조선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몰랐고
.


1904
년 제물포와 1905년 거제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의 맷돌에 끼여 속수무책인 상태였다.(주한 미국공사 윌리엄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1930, p199) 조선 지도부는 러시아를 신흥 강국이라고 판단했지만,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은 ()러시아였다. 1900년 고종의 '큰형'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점유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김원모, '19세기 말 미국의 대한정책') 친청-친일에서 친러로 이어진 조선 정부의 외교 정책은 왕비 민씨 살해사건(1895)과 아관파천(1896)으로 이어졌다.


1904 2 3일 자 영국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삽화. 러·일 양국이 조선 노인의 허리를 밧줄로 조이는 장면인데, '러일전쟁 와중에 조선이 엄중 중립(Strict Neutrality)을 선언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피비린내가 거칠게 퍼져가던 1904 1 21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중립을 선언했다. 믿었던 러시아도 거부했고 일본도 거부했다. 이미 일본은 조선 각지 항구를 통해 군수품을 반입 중이었다. 한 달 뒤인 2 10일 전쟁이 공식 개전했다. 이에 앞서 2 9일 일본 함대는 제물포항에 도착해 러시아 함대에 올라 공격을 예고했다. 러시아는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러시아군은 항구에 정박해 있던 각국 함대의 송별식 속에 팔미도 앞에 포진한 일본 함대에 곧바로 돌진했다. 참패한 러시아 해군은 남은 배를 자폭시켰다.(박종효, '한반도 분단의 기원과 러일전쟁', 선인, 2014, p249~271) 1 3개월이 지난 1905 5월 일본 연합함대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러시아 발틱 연합함대를 궤멸했다. 시작도 끝도 대한제국 영토 내였다. 9 5일 종전협정(포츠머스 조약) 두 달 뒤인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강탈해갔다. 협정을 성사시킨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발칸반도에 있던 몬테네그로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두 나라는 102년 동안 교전상태로 있다가 지난 2006년에 깜짝 놀라서 교전상태를 종식시켰다.)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졌는가.

'
잔치 잔치 열렸네'

최고 지도자 고종은 제후에서 대군주(1894년 갑오개혁), 대군주에서 황제(1897년 대한제국)로 스스로 수직 상승한 지도자였다. 1902년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51세가 되는 망육순(望六旬)의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잔치를 했다. 경운궁에 중화전을 짓고 서양식 석조전을 착공했다. 폐허가 된 경희궁까지 돌다리를 만들고(1902), 프랑스제 촛대와 그릇을 구입해 잔치를 벌이고(황현, '매천야록' 3), 평양에 360칸짜리 궁궐 풍경궁을 지었다.(1902 5 6 '고종실록')

그해 여름 콜레라가 퍼졌다. 10월 본 행사는 1903 4 30일로 연기됐다. 1903년 초 지방에 있던 군사 1500명을 상경시켜 의장대로 훈련시키고 일본으로부터 VIP용 인력거 100대를 수입했다. 2년도 안 돼 100만원이 잔칫상에 사라졌다.(각사등록 근대편, '예식 때 각종 비용에 대한 예산외 지출 청의서') 1902년 국가 예산은 약 759만원이었다. 잔치 준비가 한창이던 1903 1월 주재 외국 공사관 모임은 '현재 재정상 칭경예식은 무모한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0 '칭경식 거행에 관한 각국대표자 의견 보고
')

바로 그달 50만원짜리 군함 양무호를 수입했다. 예포용 공포탄과 '화려한 서양물품이 완비된' 기념식용 고물딱지 배였다. 그런데 여섯 살 먹은 황태자 이은이 천연두에 걸리자 이마저 연기했다. 그해 8 17일 대한제국 정부는 926일로 다시 기념식 날짜를 공고했다.(전우용, '1902년 황제어극40년 망육순 칭경예식과 황도 정비') 러·일 사이에 불어오는 피비린내 속에, 잔치는 무산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50만원짜리 양무호를 6년 뒤 42000원에 팔아버렸다
.

이게 제국주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그때 대한제국 집권층이 한 일이었다
.

끝이 아니었다. 제물포에서 들리는 포성 속에서 황제는 또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미국 공사관으로 도주하려는 '미관파천(美館播遷)'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 때까지 고종이 시도한 파천은 아관파천을 비롯해 미관파천, 영관파천, 불관파천 5개국에 일곱 차례였다
.

다음 주 계속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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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과 군함 양무호

 

허세의 제국이 문을 닫았다.. 110만원짜리 군함의 재판매 가격은 42000


제국, 군함을 도입하다

1903 1 25일 대한제국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군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군함 이름은 훗날 양무호(揚武號)라고 지었다. 석 달 만인 4 15일 양무호가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규모는 3000t이 넘었고 배에는 80㎜ 대포 4문과 소포 2문이 장착돼 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호시탐탐 대한제국을 노리던 때이니 군비 증강은 필연이었다. 그해 7월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이 황제 고종에게 상소했다.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해군 한 명, 군함 한 척이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의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1903 7 29 '고종실록') 16세기 말 이순신이 만든 조선 해군을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론이 이상했다. '시국을 볼작시면 시급한 일을 정리하지 않아 위급하게 되었으니 군함 같은 일은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으리라.'(1907 6 1 '황성신문', '군함 사건을 논함')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본다.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 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又敗漏不可駛 雇倭補苴 前後費巨額).'('매천야록', '1903년 일본군함 양무호 구입') 쓸데없는 고물선을 샀다는 것이다.



1903년 대한제국과 일본 미쓰이물산이 맺은 군함 ‘양무호’ 계약서. ‘군기는 적당히’ ‘즉위 40주년용 접객실 특설’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따위가 계약 조건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수수께끼의 군함


'소문을 들은즉, 정부에서 일본인과 계약하고 군함 한 척을 구입한다는데, 그 가격은 50여만원이라 하고 신품 여부와 톤수(其艦軆新舊與噸數)는 아직 모른다더라.' 1903 2 9일 자 '황성신문'은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해오던 군함 도입 계획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미 1 25일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과 군함 도입 계약을 완료한 상태였다. 3 18일 이 신문은 "황제 폐하가 군함을 '양무(揚武)'라고 명명했다"고 전했다. 배 이름은 원래 가치다테마루(勝立丸), 총톤수 3435t 263마력짜리 엔진을 달고 있다는 기사도 튀어나왔다. 4 15, 계약 석 달 만에 군함이 인천 제물포에 입항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신제품이 아니오, 기십 년 전 일본의 고물인데 누차 파손돼 일본 해상에 세워뒀던 배를 정부가 고가에 매입했더라. 해군이 사용하려면 본래 연로하고 파손된 물건이라 곤란하다더라.'(1903 4 25 '황성신문
')


며칠 뒤 황성신문 기자가 배에 올랐다. '본래 영국에서 제조한 것인데 일본에서 구매한 지 8년이라. 소문과 대단히 다르게(逈殊) 극히 완전 양호하여 우리 한국에 처음 있는 신함(新艦)이니 굉장하더라.'(5 4일 자 '황성신문') 중고품이지만 '신동급(新同級)'이라는 말이었다. 군졸 처소와 식당, 기계, 공구, 의약, 전등, 측량 기구, 병기, 무장 등 군함이 갖출 바를 완비하고 양총 150, 100자루, 육혈포 22, 대포 4, 소포 4문도 기자 눈에 완벽해 보였다. 겉은 그러했다는 말이다.


'
명품으로 치장한 군함'

다음은 19031 25일 군부대신 신기선과 미쓰이물산을 대신한 임시대리공사 하기와라 모리이치(荻原守一)가 맺은 계약 부속 명세서 일부다.

'
군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일' '순양함 혹은 연습함의 목적에 변통(變通)을 위함' '식당에는 미려(美麗)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사령관 이하 함장 사관 25침구는 화려(華麗)한 서양 물품으로 완비' '일체 무기는 적당히 탑재' '각 구경 대포 실탄 외에 예포(禮砲) 연습용 공탄과 소총 탄환도 물론 적당히 둘 일'.



1903년 대한제국은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군함’ 양무호(揚武號)를 구입했다. 4문을 단 케케묵은 화물선이었다. 110만원짜리 배는 그해 예정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용 의전함이었다. 군함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는 애당초 없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사 예산은 412만원이었다. 사진은 1907년 부산세관 선원훈련선으로 전용된 양무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융통해서 쓰려는(變通)' 목적이었으니 대한제국 정부는 이 배가 신품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 '화려한 침구'가 조건이었으니 군사 전용선을 주문한 것도 아니었다. 무기는 '적당히' 완비하고 예포용 공포탄 또한 적당히 두라 했으니 더욱 엉성했다. 양무호 가격은 '일화(日貨) 55만엔', 110만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부(軍部) 예산은 세출 기준으로 4123582원이었다. 한 해 국방예산 26.7%를 투입한 배가 군함으로 봐줄 수 없는 것이었다. 중고라는 사실을 알면서 써 재낀 돈이 그러했다.

오직 황제 기념식을 위하여

지금이라면 방산 비리로 줄줄이 사법 조치될 일이었으나 만사형통으로 넘어간 이유가 있었으니, 명세서 둘째 항목에 세 줄로 적혀 있는 조건 덕분이다.

'
접객실을 특설하여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공할 일.' 당시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기록했다. '1903 1월 군부대신 신기선이 약 55만원() 상당 전함(戰艦)을 일본으로부터 구입하는 발주 계약을 체결함. 이는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발주한 것임.'(호러스 알렌, '근대한국외교사연표', 1904
)

때는 1903, 고종이 나이 열한 살에 조선 26대 왕에 등극한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만 쉰 살이 된 망육순(望六旬) 해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고 문명국가임을 자랑하려는 칭경예식 행사가 곳곳에 예정돼 있었다. 해군과 무관했다. 자주국방과도 무관했다. 군부대신이 주장한 '삼면이 바다인 당당한 제국'과도 무관했다. 오로지 40주년을 맞은 고종 황제 폐하 등극 기념식에 황제를 선상에 앉혀놓고 예포 몇 방 쏘려는 게 상고물 양무호를 수입한 이유였다
.

기왕에 거액으로 구입한 배이니 기념식에라도 썼다면 다행이었으되, '군함 양무호'는 그 어느 바다에도 떠다닌 적이 없었다. 대신 양무호는 가난한 대한제국 곳간을 바닥까지 싹싹 훑어내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

군복은 외제(外製)

1897 10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사흘 뒤 탁지부대신 박정양이 의정부찬정 심순택에게 5만원 지급 요청 업무 연락을 띄웠다. '(즉위식) 제반 비용을 결제해야 하는데, 금고가 텅 비었으니 이 어찌 군색하지 않으리오.' 이보다 열흘 전 박정양이 보낸 또 다른 업무 연락 제목은 '황제 도장(御寶) 제작용 황금 1000냥 구매 요청'이었다. 비용은 45000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세출 예산 419427원 가운데 52만원이 국채(國債)였다. 



한번 솟구친 허세는 꺾일 줄 몰랐다. 고종은 군복·철모를 독일 세창양행을 통해 수입했다. 대한제국은 이 투구를 대량으로 주문했다.(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하인리히 왕자 증언, 이경미, '사진에 나타난 대한제국기 황제의 군복형 양복에 대한 연구' 재인용) 1900년 육군참장 백성기가 이렇게 상소했다. "우리나라 군복을 꼭 외국에서 사와야 하겠는가?"(1900 4 17 '고종실록') 3년 뒤 군부대신 신기선이 상소를 올렸다. "육군 장교 군복 옷감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은 장구한 미래를 위한 계책이 아니다."(1903 1 18 '승정원일기') 1903년 대한제국 세입 예산은 10766115원이었다. 이 가운데 988250원이 그해 갚아야 할 빚이었다.

1903
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했다. 10월로 예정된 40주년 기념식은 이듬해 4월로 연기됐다. 1904 4월 고종 막내아들 이은이 천연두에 걸렸다. 기념식은 무기 연기됐다가 취소됐다. 미쓰이물산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양무호의 관리비와 원금, 이자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경비가 고갈되고 연례적인 지출도 걱정인데 긴요하게 쓸 것도 아닌 것에 거액을 소비한다는 말인가."(1904 7 27 '고종실록', 의정부찬정 권중현 상소) 해군 창설도 취소됐다
.

1905
년 을사조약

1905 11 17일 경운궁(덕수궁) 중명전 1층 회의실에서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11 15일 일본 특명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에게 일본 천황 친서를 내밀며 승낙을 강요했다. 고종이 "사신 왕래 같은 형식은 보존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는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 구별이 없다"고 거부했다. 고종은 "외부대신에게 교섭, 타협에 힘쓰라고 하겠다"고 답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신명호,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재인용) 17일과 18일 사이 심야에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속칭 '보호' 조약이 체결됐다. 22일 이토가 탄 열차에 원태근이라는 사내가 돌을 던졌다. 원태근은 곤장 200대와 금고 2개월 형을 받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

11
27일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가 "조약을 폐지하고 역적을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황제는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니 귀가하라"고 답했다.(1905 11 27 '고종실록') 상소가 이어졌다. 고종은 "다 잡아들이라"고 명했다.(11 28 '고종실록') 11 30일 쫓겨난 민영환이 집에서 자결했다. 황제는 그날 민영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을 추증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 1일 조병세가 자결했다. 고종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민영환의 시호도 충정으로 바꿨다. 을사 역적들이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는 폐하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고 답했다.(1905 12 16 '승정원일기') 세월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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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기념사진과 고종

정미년인 1907 7 19일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나흘 뒤 정미조약이 체결됐다. 군사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8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소령 박승환이 자결했다. 그날 남대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최초로 맞붙은 시가전이었다. 전투는 반나절 만에 일본군 승리로 끝났다. 그해 12월 어느 날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중명전에서 을사조약과 정미조약 당사자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황태자 은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옛 황제가 촬영 장면을 구경했다. 사진가도, 내각도 황제에게 비키라고 하지 못했다. 1909 11 29일 대한제국은 양무호를 일본 오사카의 원전상회(原田商會)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110만원짜리 군함의 재판매 가격은 42000이었다.('고종시대사' 6)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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