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친에 이르는 길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고다이로(五大老)의 좌장으로 국정 주도권을 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곧바로 전후 처리 외교에 나선다. 조선 강화(講和)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국교가 재개된 1607년까지
총 23회에 걸쳐 소씨의 사절이 조선을 찾았을 정도로 소씨는 필사적이었다. 전란 직후 교섭은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명군은 일본군 철군 후에도 2년여를 더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군과 연합군 체제를 유지한 채 일본의 재침(再侵)을 경계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올라 일본 권부에서 히데요시의 잔영이 제거되자 조선도 변화를 모색한다.
1604년 여름 사명당 유정(惟政) 일행이 최초로 일본을 방문한다. 적의 동태를 살핀다는 이른바 탐적사(探賊使)였다. 이듬해 봄 교토에서 유정을 마주한 이에야스는 자신이 전란(戰亂)의 병사(兵事)에 관여하지 않아 조선과 원한이 없음을 강조하고, 화친의 증거로 유정이
요구한 포로 1400명의 귀환에 동의한다.
조선 조정은 탐적사의 보고를 토대로 강화를 검토하는 한편, 일본 의향을 재삼 확인하기 위해
국왕 묘를 훼손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하고 일본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라는 '선위치서(先爲致書)' 조건을 제시한다. 교섭이 암초에 걸리는 듯했으나, 1606년 가을 일본으로부터 범인과 국서가 도착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조선은 일본의 성의를 수용하고 강화를 결정한다.
1607년 국교 재개를 상징하는 조선의 사절이 일본을 찾았고, 이후 양국은 에도시대 260년간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전란 종료 후 화친에 이르는 길은 불신(不信)으로
가득 찬 험난한 과정이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꾼 것은 '행동'이었다. 교섭의 고비마다 조선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했고, 일본이 행동으로 성의를 보임으로써 화친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상대의 의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예외를 찾기 어려운 국가 관계의 평범한
진리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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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도 오지 않던 明軍의 속사정
조선의 황윤길, 김성일 통신사 일행이 전쟁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일본을 찾은 1590년. 일본의 침략이 걱정된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명(明)의 또 다른 책봉국인 류큐의 상녕왕(尙寧王)에게도
명을 정복할 것이니 군사와 식량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류큐는 히데요시의 강요에 못 이겨 1589년 사절을 보낸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속(臣屬) 취급을 당하던 터였다.
놀란 류큐 왕부(王府)는 이듬해 3월 조공사 편에 히데요시의 망동(妄動)을 상국(上國)에 고한다. 류큐의 보고에는 히데요시가 200만의 군사를 일으켜 명을 칠 것임을
호언하고 있다는 사정과 함께 엉뚱하게도 조선이 일본의 길 안내를 맡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은 뜻밖의 소식에 반신반의한다.
히데요시의 거병(擧兵) 소문은 이미 규슈 일대에
퍼져 있었다. 같은 해 9월 규슈에 표착했다가 귀환한 중국인
어부도 현지 소문을 명 관헌에게 전한다. 명 조정의 근심이 깊어진다.
사쓰마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히데요시에게 1만 군사 동원령을 하달받은 유력 다이묘였다. 요시히사는 푸젠(福建) 출신의 허의후(許儀後)를 시의(侍醫) 겸 참모로
곁에 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정명(征明) 계획을 접한 허의후는 1592년
1월 동료를 통해 변고(變故)의 조짐이 있음을
명 조정에 급보한다. 허의 보고에도 조선이 일본과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명 조정은 유력 장수의 측근이 된 자국민에게서 동일한 첩보가 제보되자,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힌다.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애타게 명의 원군을 기다려도 명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사태를 관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의도만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의지하던 명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적을 모르고 친구의 신뢰도 얻지 못한 조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컸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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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야의 역사적 교훈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리는 보고를 한다. 외침(外侵)을 경계한 황윤길은 옳았고 일본의 허세로 치부한 김성일은 틀렸는가?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이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을 복속시키겠다는 '당국평정(唐國平定)'을 호언하고 있었다. 류큐와 조선을 먼저 입조(入朝)시키고 저항하면 칠 것이라는 소문이 규슈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소문은 사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귀를 의심케 하는 이 불온한 소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때 중요한 존재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변경(邊境)인들이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조선의 환심을 구하던 소씨였지만
히데요시 치하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히데요시는 소씨에게 조선의 입조 동의를 받아오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포상의 유혹과 처벌의 엄포가 수반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소씨는 일본을 선택한다. 조선 사절을 맞이하는 예를 격하하고 거리를 둔
것은 그러한 의중이 반영된 신호였다. 사절들은 소씨의 무례에 노발대발하면서도 그 이상의 행간(行間)을 읽지 못했다.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 일본은 전례 없는 전력 상승과 대외 인식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통신사들의
보고는 막연한 인물평이나 주관적 추측에 근거할 뿐, 어느 쪽도 정세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입체적 분석이
없었다. 무엇보다 소씨를 휴민트(HUMINT)로 포섭하는
전략적 감각이 있었다면 일본 사정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나, 조선은 소씨를 왜구의 후예라 무시할
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훗날 선조가 황윤길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고 하나 애초부터 피상적 관찰이나 희망적 사고에 불과한 보고를
듣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도리는 없었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임진왜란 전야의 교훈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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