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놔둬라. 제 안의 불도 못 끄는 것들이 무슨 절간 불을 끈다고 난리고." 어느 봄날 강원도 양양의 천년사찰 낙산사가 산불에 휩쓸리고 너도나도 불길을 잡겠다고 허둥대자 회주였던 무산(霧山)스님이 '마음의 불'부터 끄라고 일갈했다. 이틀 전부터 인근 솔숲을 삼키고 있던 화마를 막으려고 신도들까지 소화기를 들고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누구보다 애가 닳았을 무산스님은 연기에 갇힌 부처님으로부터 '네 마음의 불길을 먼저 잡으라'는 꾸지람을 들었던 걸까.
▶'설악'이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이자, 신흥사·백담사·낙산사 세 사찰을 아우르는 회주 무산스님이 엊그제 신흥사 조실(祖室)에 추대됐다. 속세 계급처럼 따져본다면, 절의 행정책임자 주지보다 높은 어른 자리가 회주(會主)이고, 절 문중의 고승 중에 경륜 높은 선사이면서 최고 스승으로 받들어지는 자리가 조실이다. 강원도에선 월정사와 신흥사가 큰 절인데, 두 곳 다 조실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다.
▶해인사나 통도사처럼 선원·강원·율원·염불원까지 두루 갖춘 일종의 종합대학을 총림(叢林)이라 한다. 그곳 총장 겸 이사장 격인 어른 스님이 방장(方丈)이다. 우리나라엔 5대 총림이 있고 방장도 다섯 분이다. 총림의 규모를 못 갖춘 사찰에선 조실이 그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조실은 종헌·종법상 위계를 따질 자리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명예스럽고 존경받는 종신직이다.
▶요즘 '남 진제 북 송담'이라는 말은 한국 불교의 선지식을 대표하는 대구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과 인천 용화선원 선원장 송담 스님을 일컫는다. 수행력(修行歷)의 위상과 권위를 인정받는 고승들이다. 송담 스님은 조실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내 스승 전강 스님을 영원한 조실로 모시겠다"며 사양하고 있다. 서른셋에 통도사 보광선원의 조실이 됐던 전강 스님은 생전에 "남의 등불 부러워 말고 내 안의 등불을 켜라"고 가르쳤다던가.
▶화계사 숭산 스님, 쌍계사 고산 스님도 '조실' 하면 떠오르는 분들이다. 그러나 앞으로 조실 자리에 모실 만한 스님은 많지 않다. 속명을 따서 오현 스님이라고도 불리는 무산 스님에 대해선 "마땅히 모실 수 있는 분" "겸양 끝에 수락하신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도 나온다. 비단 산중(山中) 조실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공부와 연륜을 쌓은 '조실'들이 어른의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조선일보(1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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