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실장 "정부, 4주년 된 것 같다"… 그렇게 만든 건 청와대
'적폐 청산' 지켜본 관료들, 다음 정권 생각해
일 열심히 하겠나
'적자생존.' 박근혜 대통령 시절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이 나누었다는 농담이다. 여기서
적자생존은 대통령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어야 산다'는 뜻이다. 실제로 당시 국무회의의 모습은 대통령은 말하고 장관들은 머리 숙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받아 적는 것이었다. 다른 때라고 그런 모습이 딱히 다르지는 않았겠지만 박근혜 정부 때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대통령이 내린 저 많은 지시들이 다 실현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정부의 국정 운영이나 정책 집행은 그다지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이 그렇게 열심히 적은
걸 자기 부서에 가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지시가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 집단에 의해 지연되거나 묵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관료 조직을 제대로 다루는 일은 쉽지 않다. 과거 박정희 시대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유능한 관료들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관료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대기업 총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지시를 잘 따르고 역량을 발휘해서 인정을 받으면 승진하고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들이 처한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5년마다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때와 같은 관료제를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관료, 청와대 지시에 '적당히' 대응할 것
정권이 바뀌면 정말 모든 것이 바뀐다. 보수 정파와 진보 정파가 정권 교체를 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같은 정파 간에도 대통령 간의 관계는 단절적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전임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부정했다. 대표적인 것이 녹색성장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 내에 녹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관료들의 처신도 어려워진다. 이명박 정부에서 녹색 성장을 맡아 열심히 일했던 고위 관료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전 정부 사람이라고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5년 임기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관료들은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지시에 대해 '적당히' 대응하는 것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후환'을 생각할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실무진에서 그 지시는 책상 서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우리 관료제는 과거와 같은 효율성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5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자신의 치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대통령들로서는 애당초부터 관료 조직 통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려면 관료 조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략이 필요하다.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서 이인영(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정부 관료들이 마치 (문재인 정부) 4년이 지난 것처럼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현 정부 주요 인사들의 비난·불평의 대상이 된 공무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서울정부청사를 빠져나가는 모습. /뉴시스·김지호 기자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관료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다. 운동권의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관료 조직을 기득권 세력의 일환으로
보거나 반개혁적 집단으로 바라보았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정부 관료가 말을 덜' 듣고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들'을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료들은 조직 이기주의나 반개혁적 태도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올바른' 정책을 방해하거나 지연할 것이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접 모든 것을
결정하고 주도해 가야 한다는 '청와대
정부'가 된 것도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보아온 대로, 실무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더라도 뭐 하나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다.
◇불신에 적폐 청산… 실무진 안 움직여
문재인 정부는 여기에 더해 관료들까지 적폐 청산으로 몰아갔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나 장관 등 정무직 상관이 지시한 일을 수행했다고 해서 실무자들에게까지 법적 책임을 물은 것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 고위 관료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해도, 정치는 결정하고 행정은 시행하는 것이며 그 결정의
책임은 정치가 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런 적폐 청산으로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정부이다. 적폐 청산의 학습 효과로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원하는 일이라도 실무 관료
입장에서는 '다음 정권의 판단'까지 고려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정책 추진은 늦어지거나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김수현 수석은 '2주년이 아니고 마치 4주년 정부'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관료 집단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청와대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3년 차를 맞으면서 관료 조직은 앞으로 더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는 관료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직업 공무원제의 확립, 관료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청와대가 아니라 각 부처가 중심이 되는 국정 운영 등 관료제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이인영 대표와 김수현 실장의 대화 내용이 알려지면서 많은 공무원이 심한 불쾌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공무원 노조의 성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반발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소심한 공무원들이기 때문일까. 글쎄.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서랍 속에 서류가 파묻히는 일은 더
늘어날 것만 같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조선일보(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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