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복화술사(腹話術師)의 시대] 석굴암을 세계의 명작으로 평가해 근대적 문화유산으로 끌어올린 것은 일본인..

뚝섬 2020. 1. 1. 06:04

나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대, 우리는 순결한 한글을 찾고
한글로 신문을 만들고 한글을 민중에 보급하는 운동을 펼쳤다

 

석굴암에 대한 나의 지식은 세계적 문화유산이란 사실과 일제가 시멘트를 발라 망가뜨렸다는 속설을 아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 석굴암 모습을 책자에서 봤을 때 정신이 헷갈렸다. 황성옛터 수준의 무너진 입구, 돌무더기 폐허.

석굴암에 대한 책과 논문을 읽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첫째 삼국유사 이후 조선 후기까지 400년 동안 우리 기록에 석굴암은 등장하지 않는다. 석굴암을 문화유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석굴암을 근대적으로 발견하고 복원한 것은 일본이다. 여기서 일본이란 조선을 지배한 통감부와 총독부를 말한다. 셋째 석굴암을 세계의 명작으로 평가해 근대적 문화유산으로 끌어올린 것은 일본인이다. 오늘 우리의 석굴암 인식은 일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평가 '영원한 걸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907년에서 1919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

'
근대(近代)' '현대' 이전의 옛날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옷차림, 소통하는 언어, 지식을 전파하는 교육, 삶을 구속하는 법률, 심지어 미적(美的) 감각의 체계까지 근대의 틀 안에 있다. 다들 '모던(modern·근현대)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완성한 근대를 일제가 국권을 강탈해 전()근대로 되돌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순간 "식민지 근대화론이냐"는 공격을 당한다. 근대성과 식민지성에 대한 헷갈림은 한국 근대사의 영원한 족쇄이자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책 '복화술사들'은 문학과 언어의 관점에서 한국 근대의 복잡함을 알려준다. 1917년 연재를 시작한 소설가 이광수의 기념비적 작품 '무정'의 대화 일부다. "-. 오메데또오(축하해). 이이나즈께(약혼자)가 있나 보에그려. . 나루호도(과연)." 순한글 소설이지만 일본말이 뒤섞인 한국 주인공들의 대화만은 실제 그대로 반영했다. 국권 상실 7년 만에 조선의 언어가 지독하게 오염됐다고 봐야 할까. 김철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 어문에 새겨진 식민성이 아니라 근대 한국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순수하고 완결된 형태의 언어란, 다른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존재하지 않는다.'

윤치호는 역사적 명성만큼 '일기(日記)'으로 유명하다.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한문으로 4, 한글로 2, 그 후 영어로 썼다. 한글을 포기하고 영어로 쓰기 시작한 1887년 어느 날, 그는 이유를 이렇게 기록했다. 'its vocabulary is not as yet rich enough to express all what I want to say.' 한국어는 어휘가 풍부하지 않아 말하고 싶은 것을 다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윤치호와 이광수의 사례는 언어의 측면에서 한국의 근대란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고, 완성된 것을 누군가 완전히 파괴한 것도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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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을 근대의 시선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조선인 미술사학자는 일제 중반기를 넘어설 무렵 배출됐다. 해방 후 한국 미술사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고유섭이 첫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철학과 미학을 전공하면서 일본 미학의 주류를 계승한 도쿄제대 출신 우에노 나오테루를 사사했다. 고유섭과 같은 조선의 인재가 경성제대에서 1000명 가까이 배출됐다. 이들이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 됐다. 대한제국이 그만큼의 근대적 인재를 배출했다면 석굴암은 한국인에 의해 발견됐을 것이며, 나라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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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동인은 "구상은 일본말로 하되 쓰기는 조선글로 썼다"고 했다. '약한 자의 슬픔'을 쓴 1919년 무렵에 대한 회고다. 일제가 한국의 문화유산을 근대적 잣대로 평가하고 있을 때 한국의 지식인은 자신의 내면에 너무나 빠르게 침윤(浸潤)되는 '일본의 근대'에 당황하고 있었다. 김철 교수는 이 시대 한국인 정체성을 "복화술사(腹話術師)"라는 표현으로 상징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자, 두 개의 혀를 가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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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동인이 언어의 정체성에 고뇌하던 1920, 조선일보는 창간됐다. 편집국 대회의실 벽면 전체에 걸린 역대 편집국장 사진 중 일제강점기 편집국장은 10명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을 시작으로 염상섭·주요한·이광수 등 당대의 작가들이 포함돼 있다. '복화술사의 시대'에 그들은 매일 순결한 한글을 찾고, 한글로 신문을 만들고, 한글을 민중에 보급하는 운동을 펼쳤다. 지금 우리는 적어도 "-. 오메데또오. 이이나즈께가 있나 보에그려. . 나루호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절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의 고뇌와 열정을 생각하면서 창간 100주년을 맞는다.

 

-선우정 부국장 겸 사회부장, 조선일보(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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