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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만기친람… ] [정조의 인사 실패와 세도정치]

뚝섬 2026. 6. 24. 10:07

[국왕의 만기친람… 신하들은 책임감 약해지고 허물 피하기 급급]

[정조의 인사 실패와 세도정치]

 

 

 

국왕의 만기친람… 신하들은 책임감 약해지고 허물 피하기 급급

 

개혁의 기회 놓친 정조

올해는 정조 즉위 250주년
"혼자 천 칸의 집을 지키는 형편"
권한 위임 없이 다 챙기는 통치
개혁 여건이 성숙한 시기였지만
원칙과 행동 어긋나며 정국 소모

“당나라 군대는 왜 싸우기만 하면 패했는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남짓 지난 1777년 2월, 조선후기의 국왕 정조(正祖)가 신하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 신하는 “임금이 장수를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다른 신하는 “소인을 등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당나라 군대가 거듭 패한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장수를 임명해 놓고도 끝내 신뢰하지 못한 점. 둘째, 현장의 지휘관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조정의 허락만 기다리다가 전투의 적기를 놓친 점. 셋째,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명령이 내려와 지휘 체계가 흔들린 점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제대로 뽑은 뒤에는 믿고 맡겨야 하며, 현장에 필요한 재량권을 주되, 조직 전체가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도록 해야 일이 성사된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도 원칙 다 실천하지 못해

 

그렇다면 정조 자신은 이 원칙을 얼마나 실천했을까. 내가 보기에 첫 번째 원칙인 인재 선발과 신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정조는 “그가 나를 저버릴지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할 만큼 사람을 믿고 썼다. 소론의 서명선, 남인의 채제공, 노론의 김종수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당파를 넘어 이들을 기용하고 협력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화성 행궁 내 정조를 기리는 사당인 화령전에 걸린 정조 어진. /국가유산청

 

그러나 두 번째 원칙인 권한 위임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하들은 ‘어진 이에게 맡겨 다스리는 정치’를 주장했지만, 정조는 국정을 직접 챙기는 방식을 더 선호했다. 그는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해가 기울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었던” 주공과 문왕의 사례를 들며 군주의 적극적인 통치를 강조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만기친람의 부담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나 혼자서 천 칸의 집을 지키는 형편이라 마음의 노고가 크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이 모든 일을 직접 챙기는 방식은 결국 신하들의 책임 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조정의 대신들은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허물을 피하기에 급급했고, 지방 수령들조차 소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세 번째 원칙인 명령 체계의 일원화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정조는 인사권을 휘두르던 이조전랑(吏曹銓郞)과, 여론 형성에 큰 힘을 발휘하던 한림(翰林·예문관 검열)의 특권을 약화시켰다. 또한 각 군영 대장들의 권한을 줄이는 대신 병조판서를 중심으로 군령 체계를 일원화했다. 그는 “망건의 윗부분을 팽팽하게 묶어야 아래가 펴진다”고 하며, 국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의 위계와 명령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을 떠받쳐 온 공론 정치의 기반도 함께 약화되었다. 언관들의 독립성과 면책 특권이 줄어들면서 면절(面折·면전에서 왕의 잘못을 지적함)이나 절함(折檻·난간을 부러뜨리며 간언함)의 전통도 쇠퇴하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민생과 국정을 둘러싼 공론이 아니라, 이미 몰락한 인물을 공격하는 박격(駁擊)과 권력의 뜻을 헤아리는 침묵과 동조였다.

 

즉위 250주년에 재조명되는 정조

 

올해는 정조 즉위 25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시대(1776~1800)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 학술회의에서는 “정조가 없었다면 정약용도, 실학의 발전도, 수원화성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만은 피하기 어렵다. 왜 정조가 추진한 개혁은 그의 사후에도 이어지지 못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년 뒤인 1801년, 많은 인재가 종교를 이유로 정치적 박해를 받는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군제 개혁의 상징이었던 장용영도 이듬해인 1802년 혁파되었다. 무엇보다 이후 조선은 외척 세력이 어린 국왕을 앞세워 권력을 사적으로 운영하는 세도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조가 정치·경제·군사 등의 목적으로 축성을 지시한 수원 화성의 정문 장안문. 임금이 한양에서 행차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 /박현모 제공

 

이렇게 볼 때, 정조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개혁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특히 1790년부터 1795년까지 약 6년은 ‘좌제공 우종수’로 상징되는 탕평 정국의 전성기였다. 남인의 영수(領袖) 채제공과 노론의 지도자 김종수가 초당적으로 협력하며 국정을 이끌었고, 북인 계열의 인재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신해통공(1791년), 수원 화성 축성(1794년), ‘통청(通淸) 운동’이라 불린 신분 장벽 완화 요구 등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가 개혁의 여건이 어느 때보다 성숙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정조의 관심은 국정과 친인척 문제 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화성 축성과 초계문신제를 추진하며 개혁을 이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인척 문제에 깊이 개입하며 정국을 소모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1794년의 은언군 문제다. 그해 4월, 정조는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비밀리에 궁궐로 데려왔다. 신하들은 혈서까지 써 가며 반대했지만 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은언군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리고 관련 상소와 논의를 일절 차단했다.

 

개혁에 집중할 에너지 소모

 

이 시기 정조는 일종의 ‘이중 몰입(competing commitment)’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몰입이란 새로운 목표와 바람직한 행동 원칙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원칙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이다. 정조는 평소 신하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친인척 문제에서는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직언하는 신하가 없다고 탄식하면서도, 은언군 문제처럼 자신의 뜻이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는 금령을 내려 논의를 차단했다. 간언을 구하면서도 그 말이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에는 입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언행의 불일치는 정국을 끊임없이 ‘은언군 파동’ 속으로 몰아넣었다. 국가 개혁에 집중되어야 할 정치적 에너지는 친인척 문제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소모되었고, 신하들 역시 민생과 국정보다는 국왕의 진의를 헤아리고 금령을 풀기 위해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6년의 기회’(1790~1795)를 놓친 뒤 정조의 모습은 처참했다. 1797년 무렵부터 시력이 크게 떨어져 글을 읽기조차 힘들어졌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도 버겁다고 토로했다. 1799년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전국에서 12만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개혁의 한 축이던 채제공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남인 세력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어렵게 구축한 탕평 체제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런 가운데 1800년 여름, 정조는 종기 치료를 받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6개월의 ‘정조실록’에는 왕의 탄식과 근심, 그리고 자책의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정조는 “반대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나 태평성대를 이루기 어렵겠다”고 한탄했다. 한때 꿈틀대던 사회의 활력은 눈에 띄게 퇴조했고, 왕의 뜻도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역사는 때때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지도자에게 내어준다. 그러나 그 기회는 늘 그렇듯 유한하다. 정조에게는 재위 중반의 6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비전과 역량을 갖춘 군주였지만, 가장 유리한 시기에 개혁의 성과를 제도와 정치문화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이야기가 수백 년 전 한 군주의 실패담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조선일보(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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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인사 실패와 세도정치

 

‘100년 국정 공백은 정실 인사에서 비롯되었다’

'당쟁은 전쟁보다 해악' 탕평책을 내건 정조, '친인척 멀리하고 유능한 인재 기른다'는 우현좌척 원칙 제시
뒤로는 역적 혐의로 유배 중인 고모를 몰래 석방, 자기 눈에 든 관리 김조순을 끝까지 아껴 김조순 스스로 '우현좌척 원칙 깨나?' 의심
김조순 딸 세자빈 간택 후 정조 급서… 이후 원칙 깨고 중용한 김조순이 세도정치 주도, 권력투쟁으로 날린 國政

 

경기도 이천 백사면 내촌마을에는 고택(古宅)이 있다. 너른 마당에 잘생긴 집이 두 채 보이고 그 앞으로 건물 사라진 주춧돌들이 도열해 있다. 고택 이름은 '김좌근 고택'이다. 김좌근. 순조 때 시작해 대원군에 의해 종식된 세도정치(勢道政治) 핵심 인물이다. 주소는 내촌리 222-14번지다.

정조 사후 시작한 세도정치 시대는 조선왕조 국정의 공백기다. 바다에는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양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고 땅에는 민란이 폭발하던 때였다. 조선 정부는 그 국내외 위기에 둔감하고 무심했다. 외척에 의해 장악당한 조선 정부에 관심사는 모순 해결보다는 권력 유지와 확장이었다.

그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핵심 세도가는 김좌근이다. 김좌근은 김조순의 아들이다. 김조순은 순조 장인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사돈에게 아들과 나라를 맡긴 사람은 정조다. 시작은, 탕평책을 버리고 정실 인사를 택한 정조였다.

 

옹고집 애연가의 죽음

정조는 군사(君師·군주요 스승)라 자칭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과 논리로 관료들을 설득하던 군주였다.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만 갈래 강과 밝은 달의 늙은 주인)'이라 불렀다.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고집으로 주장을 관철한 절대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 고집을 상징하는 물건은 담배였다. 정조는 애연가였다.
 

경기도 이천 백사면 내촌마을에는 ‘김좌근 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택이 있다. 김좌근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 문을 연 김조순의 아들이다. 이 집은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선친 묘 관리용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일부는 매각돼 주춧돌만 남아 있다. ‘개혁군주’ 정조의 측근인 김조순은 왕의 정실인사로 순조 장인이 된 뒤 세도정치를 개시했다. 세도정치 기간 내내 국정은 공백 상태였다.

 

1796년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렀다. 제목은 '남령초 책문'이었다. "유익한 식물로는 담배만 한 풀이 없다. 내 심신 피로는 오로지 담배로 풀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금지하자고 한다. 너희는 다방면으로 지식을 꺼내 차나 술보다 나은 이 약초의 효용을 증명하라."(정조, '홍재전서' 52, 책문) 일찌감치 "기우제를 지낼 때도 금주는 할지언정 금연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왕이었다.(1777년 5월 5일 '정조실록') 또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르는데, '승지에게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여 시한을 정했다. 시를 지어 올리자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에 써냈구나" 하고 점수를 세 곱절로 내렸다.'(정약용, '다산시문집' 1권, 시(詩)) 정약용이 써서 1등을 한 시 제목은 '태평만세 네 글자가 그 가운데 있다네(太平萬歲字當中·태평만세자당중)'였다.

훗날 몸져누운 정조 침실로 신하들이 찾아갔다. 정조가 물었다. "그대들이 입실한 지 얼마나 됐는가." 의관 이시수가 답했다. "담배 한 대 피울 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1800년 6월 26일 '정조실록') 이틀 뒤 정조가 죽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입안하고 해결하던 권력자가 죽었다. 정국이 요동쳤다.

 

실천 없는 '친인척 인사 비리 척결' 

 

김조순(1765∼1832).

 

재위 13년째 가을, 정조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병란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편당의 명목을 만들어 서로 주륙을 해왔다."(1789년 10월 17일 '정조실록') 당쟁을 전쟁만큼이나 해악이라고 본 왕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선왕 영조를 이어 탕평책으로 각 당을 두루 임용해온 왕이었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완공이 임박한 수원 화성으로 행차했다. 국가 산업인 농업은 생산성이 높아지고 학문은 나날이 수준이 높아져가던 때였다. 3월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과 왕실 친족을 불러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벌였다. 왕은 신하들 앞에서 1795년을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曠千載一有之慶年·광천재일유지경년)'로 선포했다.

그리고 공무원 임용 기준을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등극 전부터 나는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친인척은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근(貴近·고위직에 있는 친인척)들 폐단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별히 경들을 불러 속마음을 보여주니,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라."(1795년 3월 10일 '정조실록')

이름하여 '우현좌척(右賢左戚)' 원칙이다. 인재를 가까이 하고(우현) 내외척을 멀리한다(좌척)는 뜻이다. 공정한 인사를 약속한 왕에게, 학연이나 혈연 없이 실력으로 무장한 규장각 관료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정조 암살 사건 연루자로 유배 중인 '정치달의 처(妻)'가 풀려났다는 뉴스가 조정에 전해졌다. '정치달의 처'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다. 화완옹주는 아들 정후겸이 정조 암살 기도 혐의로 처형된 뒤 같은 혐의로 파주에 유배 중이었다. 정조는 그런 대역죄인을 아무도 모르게 풀어주고 겉으로는 친척을 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 따지며 법대로 하라는 대사헌, 대사간에게 정조가 이리 말했다.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사람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여러 해를 넘기며 관료들이 극구 반대했으나 정조는 귀를 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4년 뒤 화완옹주를 사면해버렸다. 천년에 한 번 있던 경사스러운 해에 정조가 내걸었던 국정지표 우현좌척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헌신짝이 돼 버렸다.

 

"반성문 하나 잘 썼구나!"

1785년 김낙순이라는 안동 김씨 사내가 과거에 붙었다. 정조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이라 칭찬하며 이름을 '조순'으로 직접 개명시켰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산56-27에 있는 김조순의 묘. 비석 앞면은 순조가 직접 쓴 친필을 새겼다.

 

1792년 10월 정조의 친위 관료격인 규장각 출신 관리들이 '현대 청나라 문체'를 즐기다가 적발됐다. 외교문서 작성관 남공철이 올린 문서에 정조가 혐오하는 '저질' 단어들이 인용된 것이다. 소위 '문체반정'의 시작이었다. 남공철은 직위해제됐다. 성균관 유생이던 이옥은 저질 단어를 혼용해 쓰다가 아예 과거 급제 취소 및 응시 자격 박탈에 강제징집까지 당하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정조는 5년 전인 1787년 잡소설을 읽던 예문관 관원 김조순과 이상황을 떠올리며 이들에게도 반성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청나라 사신으로 막 압록강을 건너려던 서장관 김조순이 서둘러 반성문을 써서 파발로 보냈다. 정조가 말했다. "옹졸한 남공철이나 경박하게 듣기 좋게만 꾸민 이상황, 뻣뻣해 알기 어려운 심상규는 모두 억지 변명이지만 김조순은 문체가 바르고 우아해 밤 깊은 줄 모르고 읽었다. 마음 놓고 먼 길을 잘 다녀오라 이르라."(1792년 11월 8일 '정조실록')

김조순은 정조의 문체반정을 적극 지지하는 관료로 변신했다. 이후 정조 입맛에 쏙 든 김조순은 승승장구했다. 어디까지 승승장구했는가. 정조의 사돈이자 후임 왕 순조의 장인이 된 것이다.

 

국왕의 장인이 된 안동 김씨

재위 24년째인 1800년 2월 26일 창경궁 행각인 집복헌에서 정조 세자빈을 고르는 첫 번째 간택이 거행됐다. 행호군 김조순, 진사 서기수, 유학 박종만과 신집,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간택에 들었다.

그날 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정조는 김조순에게 따로 편지를 보냈다. "상하 모두 (그대 딸을 가리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장인)로서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1800년 2월 26일 '정조실록')
 

 

김조순 묘에 있는 비각. 신도비 글은 순조가 지었다.

 

그런데 김조순이 정조와의 만남을 기록한 '영춘옥음기'에는 한 해 전 김조순이 정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친인척도 사대부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있지만 사대부를 친인척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없다."(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대동한문학 43집, 2015, 재인용) 1800년 6월 정조는 다시 만난 김조순에게 세자를 위해 세도(世道)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조순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께서 표방했던 우현좌척을 바꾸신다는 뜻인가.'

 

세도정치와 정조와 안동 김씨

김조순을 만난 직후 정조는 급서했다. 두 달 전 이뤄진 재간택에서 정조는 김조순에게 "아비라도 함부로 딸 방에 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 간택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지막 간택은 2년 뒤 이뤄졌고, 그 딸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됐다. 1803년 어린 순조 뒤에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섭정을 거뒀다. 국구(國舅) 김조순은 정조 사후 권력을 장악했던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안동 김씨를 대거 등용했다.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정조와 달리 순조는 장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장인 김조순은 '사람이 조심스럽고 넉넉하고 후덕했으나, 외람스럽게도 권세를 거머쥔 간신 흔적이 있었고'(황현, '오하기문') 아들 김좌근은 소실인 나합과 권력과 금력을 휘두르며 왕실과 나라를 뒤흔들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풍양 조씨로 이어져 이후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됐다대원군 실각 후에는 여흥 민씨가 망국 때까지 권력을 휘둘렀다.

그 세상은 볼만했다. "전하께서 침묵이 너무 지나쳐 사무 일체를 신하에게 일임하니 공사 구별이 저절로 권병(權柄·권력자)에게 돌아간다. 온 세상이 이익에만 치닫고 있으니 오로지 뇌물에서 말미암는다." 사간의 상소에 순조는 "구체적으로 누군지 밝히라"며 답을 내리지 않았다.(1819년 4월 8일 '순조실록') 온 세상이 급변하던 19세기였다. 조선은 텅 빈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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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에는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아비 묘막으로 지은 고택이 남아 있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큰 건물 일부는 연전에 후손들이 매각해 주춧돌만 남아 있다. 집과 농지는 서울대에 기증했으나 지금 텅 비어 있다. 그 집 도로명 주소는 '청백리로 393번길 100-131'이다. 입으로 능력 인사를 외치고 손으로는 정실 인사를 펼쳤던 한 왕이 남긴 흔적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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