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평화 외친 안중근 정신을 한일 양국이 계승해 가야"]
[고치현에서 펼쳐본 역사적 상상]
"동양평화 외친 안중근 정신을 한일 양국이 계승해 가야"
안중근 동양평화 기념비 추진한
니시모리 前 일본 고치현 의회 의장

안중근 의사와 그의 재판에 관련된 고치현 일본인 추모 기념비 설립을 추진해 온 니시모리 시오조 전 고치현 의회 의장이 지난 6일 만찬장에서 “목숨을 걸고 기념비 건립을 완수하겠다”고 말하고 있다./고치현=이하원 기자
안중근 의사와 그의 재판에 관여했거나 그의 사상을 후대에 전한 고치(高知)현 출신 일본인을 기리는 ‘일한우호 동양평화(日韓友好 東洋平和)’ 기념비가 제막 6일 만에 철거됐다. 김황식·이낙연 전 총리와 히로타 하지메 참의원 의원, 고치현 의회의 전·현직 의원 등 한일 양국 인사 80여 명이 참석해 세운 비석이었다. 이 기념비가 갖는 역사적 민감성 때문에 비문에는 처음부터 ‘안중근’ 이름 석 자가 새겨지지 않았다. 부착될 동판 내용도 추후 논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막식 행사가 알려진 후 부지를 제공한 쿠로시오 호텔에 항의 전화가 많이 걸려와 결국 철거 결정이 내려졌다. 왜 이렇게 됐으며 건립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안 의사와 고치현 일본인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 추진 주역인 니시모리 시오조(西森潮三·86) 전 고치현 의회 의장을 지난 6일 현지에서 만나 인터뷰한 후, 전화로 그 경위를 들었다.
안중근과 고치현 8인 함께 추모
- 안 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 기념비 철거의 구체적 경위는.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이 확산되면서 쿠로시오 호텔에 항의 전화와 이메일이 잇따랐다. 예약 취소까지 발생했고,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도 부담이 커졌다. 호텔이 비난의 집중 대상이 되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일단 기념비를 철거하기로 했다.”
- 어떤 부분이 다르게 알려졌나.
“행사 취지는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일한 우호를 기리자는 것이었다. 안중근뿐만 아니라 그에게 감명받아 유묵을 보존해 오거나 그의 동양 평화 사상을 알린 고치현 인사들을 추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고치일한근대사연구회는 행사 취지문에서 “대립에서 화해로. 진정한 선린 우호는 근대 일본 관련 관계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과 상호 이해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고치현 일본인) 8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동양 평화의 영속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철거된 기념비는 어디에 있나.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기념비의 취지를 이해해 주는 분의 창고에 맡기기로 했다.”

지난 6일 고치현에 세워졌다 철거된 ‘일한 우호 동양평화 기념비’. /이하원 기자
― 그렇다면 새로운 장소에 다시 세울 계획인가.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다. 우선 쿠로시오 호텔이 입은 피해와 부담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이다.”
니시모리 전 의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인터넷상에서는 동양평화, 안중근의 말, 심지어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분위기까지 생겼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동양평화 기념비 건립은 어떻게 시작됐나.
“멀리 보면 고치현에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치즈코) 여사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서 시작됐다. 다우치 여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식민지였던 한국에 건너가 6·25전쟁 후 목포에서 고아 3000명을 돌본 분이다. 나는 그분을 다룬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1997년 내가 현 의회 의장 시절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에도 일한 교류 사업을 계속하게 됐다. 고치현과 전라남도는 2016년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러면서 안중근과 고치현의 인연을 알게 됐다."
-구체적으로 어떤 인연인가
“안중근이 뤼순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관, 검찰관 두명, 변호인 두명, 형무소 간부, 기자 등 7명이 고치현 출신으로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나중에 안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미완성 유고 ‘동양평화론’을 필사, 일본 국회도서관에 기증되게 한 이도 역시 고치현 출신이다. 그런데 정작 고치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이런 관계를 알리고 싶었다.”
― 고치현에서 안 의사 유묵을 한국에 많이 기증했다는데.
“2000년대 초 안중근 재판에 관여한 일본인의 후손이 집안 창고에 있던 상자를 열었는데 그의 유묵이 발견됐다. 지금은 한국에 기증된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말에 충성과 신의가 있고, 행동에 독실함과 공경함이 있으면 오랑캐의 땅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곧바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연락해 기증하게 됐는데, 그 후손은 일절 돈을 받지 않았다.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 여러 유묵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 기념비 건립 추진 과정이 순탄치 않았는데.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인 김황식 전 총리가 나의 초청으로 고치현에서 강연할 때 기념비 설립을 제안한 후, 9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일본에서 반대 의견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안중근이 덜 부각되는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표현을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 이번 행사는 일본 측에서도 참의원 의원이 참석하고, 현 의회의 전·현직 의원 등도 많이 참석했는데.
“고치현에는 한국과 직항편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김황식, 이낙연 전직 총리 두 분이 와주셨다. 한국에서 제41대, 제45대 총리를 지낸 분들이 직접 와서 일한 우호를 이야기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 안 의사에 대한 한일 양국의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그것은 당연하다. 한국에서는 안중근이 영웅이다.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위대한 정치가이다. 국가가 다르면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에만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 한국을 자주 방문해 왔나.
“그렇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먼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갔다. 일본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치 사람들도 여러 번 데리고 갔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가서 ‘음식이 맛있다’고만 하고 돌아와서는 안 된다. 왜 한국인들이 일본에 비판적인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 일본이 식민지 시절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배경에는 나의 스승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영향도 컸다.”
― 다케시타 전 총리는 어떤 영향을 줬나.
“그는 늘 ‘한국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벌써 50년 전 이야기다. 당시 일본에서는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인식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같은 눈높이에서 만나야 한다. 위에서 내려다봐서도 안 되고 아래에서 올려다봐서도 안 된다. 그런 자세로는 진정한 우정을 만들 수 없다.”
― 안 의사와 고치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해왔는데.
“많은 사람은 두 사람을 전혀 다른 인물로 생각하나, 나는 닮은 점이 있다고 본다. 사카모토 료마는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다. 일본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립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화해시키고 협력하게 만든 사람이 료마였다. 시대를 바꾸려면 힘 있는 세력이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안중근 역시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일본과 한국, 중국이 협력하는 미래를 구상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평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니시모리는 안 의사와 사카모토 료마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형되거나 암살당한 것도 공통점이라고 했다.
― 앞으로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전망하나.
“지금까지는 한일 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했다. 나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고 싶다. 그 길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고, 역사도 배우고,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씩 앞으로 가면 된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내가 올해 86세다. 나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번 일로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사카모토 료마가 꿈꾼 이상을 함께 되새기자는 취지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고치현과 한국과의 우호를 위해 해 온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 비판이 있더라도 사실에 근거해 설명하겠다. 필요한 책임은 지되, 일한 우호와 동양평화의 뜻은 계속 지켜 나가겠다. 내 목숨을 걸고서 해 보겠다.”
☞니시모리 시오조
약 30년 간 일본 고치현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의장을 지냈다. 고치현 일한친선협회 회장 등을 맡아 한일 교류에 힘써왔다. 2015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라남도 명예도민에 선정됐다. 2016년 지방자치 발전과 공공 봉사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을 받았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조선일보(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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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현에서 펼쳐본 역사적 상상

지난주 일본을 여행하는 어느 모임을 따라 시코쿠(四國) 고치현(高知縣)을 다녀왔습니다. 모임의 총무가 저의 고치에 관한 관심 등을 알고서 함께 가자고 권했는데, 내심 그곳에서 오고 갈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따라나섰습니다.
시코쿠 최남단에 있는 고치현은 인구가 일본 전체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가운데 꼴찌에서 세 번째 정도이고 지리적으로도 한국과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현입니다. 그래서 한국과는 별반 관련이 없을 성싶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좋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와서 성장해 한국인 전도사와 결혼하고 고아 구제시설인 목포 공생원을 운영하다가, 남편이 6·25 전쟁 중 행방불명됐으나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 3000명의 고아를 돌본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치즈코) 여사의 고향이 고치입니다. 지금 고치시에 “사랑의 고향, 다우치 지즈코 탄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후 뤼순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관, 검찰관, 관선 변호인, 형무소 간부, 경찰 간부, 심지어 재판 과정을 취재한 신문기자 등 많은 사람이 고치현 출신입니다. 히라이시 우지토(平石氏人) 뤼순 고등재판소장은 안중근 의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접견하고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집필을 돕기 위해 사형 집행을 미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본국의 조기 집행 독촉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면담 청취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淸四郞) 검사는 직원들과 함께 옥중의 안중근 의사에게 사식이나 내의 등을 넣어 주었으며, “지금까지 만난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안중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 관선 변호인은 안중근 의사의 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향 고치로 돌아간 이후로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재판의 변호는 맡지 않았으며, “나는 안중근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배려했고, 안중근 의사로부터 글을 받았으며 귀국 후 안중근 의사의 인품을 주위에 알리고 유족들은 그 유묵을 한국에 기증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고치 출신 관헌들의 이와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뤼순에 왜 이처럼 많은 고치 출신 인사들이 살았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저 우연일까? 고치에서 들은 이야기와 일본 역사를 공부하여 얻은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메이지 정부에서 고치현(옛 도사번) 출신 엘리트들이 소외당하자 이들이 신천지를 찾아 함께 만주로 떠나간 것입니다. 원래 도사번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사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주선해 막부를 타도할 계기를 만들었고, 역시 도사번 출신인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는 메이지 신정부에 항거하는 막부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 보신 전쟁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정권 수립 직전에 암살당했고, 이타가키는 신정부에 참여했으나 내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고 도사번 출신 엘리트들도 신정부에서 소외됐습니다. 메이지 신정부에서 쫓겨난 뒤 신정부에 무력으로 맞서 서남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과는 달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민중의 권리를 중시하는 프랑스식 자유 민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반면 메이지 정부의 주류 세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프로이센식 입헌 군주주의를 선호했고, 나중에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힘을 합쳤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왕과 국민이 공존하는 영국식 의회정치를 선호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흐름 속에서 도사번 출신 엘리트들이 만주를 신세계로 삼아 함께 떠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토 히로부미를 상대로 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객관적으로 평가 판단하여 존경한 것이고요. 한편 개혁적 생각으로 오로지 일본의 장래만을 걱정하다 33세 나이에 암살당한 고향 선배 사카모토 료마의 모습을 오로지 조국의 장래와 동양의 평화를 걱정한 안중근 의사에게서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상상력을 펼쳐 젊은 나이에 요절한 두 사람, 사카모토 료마와 안중근 의사의 가상 대화를 통해 그들이 꿈꾸었을 평화와 번영의 세상을 궁리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 고치 여행이었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조선일보(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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