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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차르’ 푸틴의 5번째 대선 출마] [이반 4세] ....

뚝섬 2023. 12. 11. 10:51

[‘21세기 차르’ 푸틴의 5번째 대선 출마] 

[이반 4세]

[이번엔 핵 차르 푸틴의 등장]

 

 

 

‘21세기 차르’ 푸틴의 5번째 대선 출마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잔혹한 이반’ ‘이반 뇌제’로 불린 이반 4세를 칭송하곤 했다. 이반 4세는 말년에 아들을 몽둥이로 살해할 만큼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은 폭군이지만 시베리아로 영토를 넓히고 전제왕권을 확립한 러시아 최초의 차르. 스탈린은 그의 공포정치에 특히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반 뇌제는 보야르(특권 귀족)를 너무 적게 죽였다. 그들을 전부 죽였어야 한다. 그랬다면 통합되고 강력한 러시아를 더 일찍 만들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대선 출마 요청에 화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로선 다섯 번째 출마다. 최근 여론조사 지지도가 78.5%나 되는 상황에서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71세인 그는 2020년 개헌으로 두 차례 더 6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내년 5선에 이어 2030년 6선까지 성공하면 84세까지 집권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20세기 차르’ 스탈린을 능가하는 ‘21세기 차르’로 최장수 크렘린궁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셈이다.

▷푸틴은 안팎의 분쟁과 위기로 막강 권력을 키웠다. 소련 붕괴 이후 술통에 빠져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눈에 든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의 야심가 푸틴은 1999년 47세에 일약 제2인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해 체첸 사태 때 대규모 공습 강행으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과시하며 이듬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와중엔 크림반도를 병합함으로써 지지도 90%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푸틴의 정치적 입지가 커갈수록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야당 인사에 대한 구금과 암살이 판치면서 권력자와 주변 세력이 국가 재산을 훔쳐 끼리끼리 배 불리는 도둑정치가 횡행했다. 커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푸틴은 국민의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영토 확장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환상을 심는 전형적 독재자 수법이었다. 작년 우크라이나 침공도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한 ‘피의 꽃길’ 깔기였을 것이다.

▷푸틴은 최근 암 수술설, 초기 파킨슨병 진단설 등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다. 과거 곰과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상의를 벗고 말을 타며 ‘마초 카리스마’를 뽐낸 것과 대조적이다. 푸틴의 롤 모델은 표트르 대제.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도 표트르 대제의 북방전쟁에 빗대며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런 푸틴을 두고선 서구화 개혁을 상징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닌, 잔혹과 광기를 남기고 떠난 이반 뇌제와 겹쳐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이철희 논설위원, 동아일보(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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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

 

1547년 17세에 러시아 '차르' 올라…
국가 통제 강화하고 귀족 세력 약화, 영토 침탈하던 타타르족까지 정복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 죽음 이후 점차 폭력적 성향 조절하지 못해
반대세력 인정사정 없이 숙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르는 앉아서 위로부터 감시하며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는 거울이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나는 매일 일하며, 군림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러한 말이 나온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이후 모두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차르'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모습은 차르로서 처음 왕관을 썼던 이반 4세(1530~1584)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어요.

◇귀족들에게 홀대받은 어린 대공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였던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공 자리를 이을 적장자를 원했던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고 기뻐했어요. 하지만 이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반은 1533년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에게 '대공'은 이름뿐인 직위였어요. 당시 러시아는 귀족 가문인 슈이스키가와 벨스키가로 양분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실 행사가 아닐 땐 이반 4세를 홀대하였어요.

이러한 무질서와 핍박을 경험한 이반 4세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되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반 4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높은 테라스에서 개를 떨어뜨리고 개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형성됐는지 알 수 있어요.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해 개혁 실시

1547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차르'로 즉위합니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입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비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르로 칭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지위였죠.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을 선포합니다.

 

이반 4세의 초상화(왼쪽)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나스타샤의 동상. 17세에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한 그는 초기엔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며 건설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죽음 이후 잔혹한 공포 정치를 펼치며 국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결국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위키피디아 

 

이반 4세가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국내 개혁은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1549년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리, 사족(士族·소지주), 대상인의 대표로 구성된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새로운 법, 지방 제도 개혁 등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이반 4세는 이를 기반으로 사족층을 육성해 모스크바에 가까운 봉토와 중앙 관청의 공직을 주었고, 영지의 규모를 기준으로 국가가 요청할 때 바쳐야 하는 무사와 말 등의 수를 정하는 개혁도 실시했습니다. 이는 대귀족 등 기존 봉건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교회 제도 개혁, 군사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특히 그의 인기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타타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이었어요. 타타르족은 이전부터 러시아 도시들을 침탈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도 했어요. 1552년 이반 4세의 군대는 여러 차례의 사투 끝에 카잔한국(汗國)을 정복했고, 4년 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汗國)도 장악하면서 또 하나의 타타르족 근거지를 무력화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볼가강 전 유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됐어요. 이반 4세를 흔히 '뇌제('그로즈니'라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말로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섬뜩하고 무섭다는 의미)'라고도 부르는데, 훗날 펼친 공포정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친 것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내 죽음 이후 공포정치 시작

하지만 이반 4세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폭력적인 기질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줬던 그의 아내 아나스타샤가 1560년 3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는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믿었고, 그녀의 죽음 이후 이반 4세는 대귀족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어요.

우선 이반 4세는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오프리치니나에 편입된 토지를 자신의 오프리치니크에게 나눠주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지옥의 암흑'이라 불리는 자들로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대 조직이었어요.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빗자루와 개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서 온 나라를 누비며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였어요. 대상은 차르에게 배반을 꾀한 자뿐만 아니라 차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도 포함되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어요.

공포정치로 이반 4세는 막강한 전제 권력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나라는 점점 기울어갔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틈타 1571년 타타르족이 수도 모스크바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고 10만여 명의 시민이 학살됐어요. 이반 4세는 말년으로 갈수록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아들마저 죽였고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양승주 기자, 조선일보(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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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핵 차르 푸틴의 등장

 

2015년 11월 러시아의 극비 전략무기가 방송 사고로 노출된 일이 있다. 러시아 NTV가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회의를 보도하면서 대형 핵추진 어뢰(드론) 도면을 몇 초간 보도했다. 화면에는 '해양 다목적 스타투스(Status) 6 시스템'이라는 어뢰 명칭과 기본 설계, 성능 등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를 통해 처음 알려진 핵추진 어뢰의 성능은 충격적이었다. 어뢰 사거리가 1만km, 위력은 100메가톤에 달했다. 1메가톤은 TNT 폭약 100만t의 위력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15킬로톤(1킬로톤은 TNT 폭약 1000t의 위력)이다. 가장 강력했던 수소폭탄인 구소련 '차르 봄바'의 위력이 58메가톤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무기인 셈이다.

이 폭탄 한 개가 미국·러시아를 제외한 중국·프랑스·인도 등 모든 핵보유국의 핵무기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위력이라는 평가도 있다. 당시 러시아 방송에 잡힌 어뢰 문서에는 이 무기의 목적을 '적 해안지역 주요 군사·경제시설 파괴, 대규모 방사능 오염을 통한 군사·경제활동 장기간 마비'라고 했다. 한편에선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이 무기의 실체에 대해 반신반의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그제 국정연설을 통해 다시 핵추진 수중 드론(어뢰) 개발 성공을 주장하고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의 핵전쟁 시 판세를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들도 공개했다. 그중에서도 핵추진 순항미사일은 서방 전문가들로부터 충격적이란 반응을 낳고 있다. "냉전 시절에도 미국과 소련이 개발하다 이런저런 문제로 포기했던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온다. 실제로 1950~60년대 미국은 '플루토(Pluto)'라는 이름하에 초음속 핵추진 순항미사일 개발을 추진하다 중단했었다. 열핵 제트 엔진을 장착해 마하 3의 초음속으로 1만㎞ 떨어진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었다.

푸틴은 18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자부심을 고취시켜 지지율을 올리려고 이런 무기들을 공개했다. 미국 등 나토 동맹국을 향한 경고 성격도 있을 것이다. 초강력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의 등장은 신냉전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가뜩이나 북핵 문제로 먹구름이 덮여 있는 한반도에 시진핑이 종신 집권 황제로 나타나더니 이번엔 푸틴이 차르의 옷을 입고 등장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은 무슨 운명이 이렇게 사나운지 모르겠다.

-유용원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조선일보(1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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