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에서도 드러날 불편한 진실
발진티푸스가 로우드 학원을 휩쓸고 지나간 뒤 많은 희생자 수가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전염병의 원인을 조사했고 사회를 격분시킬 만한 사실들이 드러났다. 건강에 해로운 학교 부지, 형편없는 급식, 염분이 포함된 냄새나는 식수, 제공된 의복과 시설의 부실함. 그 결과 브로클허스트씨는 경영권을 잃는 굴욕을 겪었지만 학교는 훌륭하게 개선되었다.
ㅡ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중에서.
장학사나 학교장, 학부모가 참관하는 수업이 예정되면 교사도 학생도 괴로웠다. 교사는 창틀 먼지부터 학생들의 자세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평소와 달리 시청각 자료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공개 수업이 시작되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교사는 학습 목표에서 벗어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모범생은 물론 말썽쟁이들조차 "저요, 저요"를 외치며 장단을 맞춰야 했다.
코로나 사태로 대부분 학교가 등교 개학 대신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사는 매일 매시간, 누구든 지켜보고 평가할 수 있는 공개 수업을 하는 셈이다. 전문 지식과 전달 능력, 사소한 언어 습관이나 일상적인 사고 수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교육 방송으로 수업을 대체하는 것도 잠시, 지속한다면 교사 자신의 무능과 불필요성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뿐이다.

샬럿 브론테가 1847년에 발표한 '제인 에어'의 주인공은 일찍 부모를 잃고 친척에게 학대받다가 악덕 이사장 브로클허스트가 운영하는 로우드 기숙학원에 맡겨진다. 지옥과도 같은 교육 환경은 뜻밖에도 티푸스 창궐로 종말을 맞는다. 전체 학생 80명 중 45명이 감염된 초유의 사태에 의문을 가진 지역사회가 참혹한 실상을 알게 된 것이다. 전염병으로 제인은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지만 이사장은 실권하고 학교는 이상적인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 같다. 교육도 예외는 아니어서 온라인 수업의 장기화는 불합리한 공교육의 몰락과 자격 없는 교사, 정치사상과 이념을 강요하는 교사의 퇴출을 불러올 전망이다. 코로나는 예기치 못한 재앙이지만 세상을 바로 세울 기회가 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김규나 소설가, 조선일보(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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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라 하면 안되는 이유
새 고교 교과서 8종 중 6종, 제주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처럼 기술
원로학자 "남로당 입장에선 통일 정부 수립, 6·25도 조국통일전쟁"
이 교과서대로라면, 4·3 희생자들은 다시 북한 편든 '폭도' 굴레 쓸 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4·3 사건 추념사에서 제주도민이 '통일 정부 수립'을 꿈꾸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처럼 말해 논란을 빚었다.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제주도민을 '통일 정부 수립'에 앞장선 전사처럼 묘사한 것이다. '통일 정부 수립'은 4·3 사건 당시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이 내건 정치 선동 슬로건이었다. 남북협상에 참여한 김구·김규식 등 지도자들도 '단독 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 비슷한 구호를 내걸었으나 김일성의 외면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이용만 당하고 끝났다. 대통령의 주목할 만한 발언은 또 있다. "올해 시행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4·3에 대한 기술이 더욱 많아지고 상세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신학기부터 사용 중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은 예전보다 4·3 사건 기술이 대폭 늘었다. 특히 그중 6종은 대통령이 말한 대로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처럼 썼다.
현 정부 '지침'에 따라 교과서 기술
교과서 6종(동아, 비상, 씨마스, 지학사, 금성, 천재교육)은 4·3 사건을 모두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제목 아래 다루고 있다. 동아출판사 교과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주제 아래 중도파의 좌우합작·남북협상과 함께 4·3 사건을 소개한다. 남로당이 일으킨 4·3 사건이 중도파의 좌우합작·남북협상과 동등한 위상으로 서술되는 셈이다. 비상, 지학사, 씨마스 등 4종이 모두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처럼 썼다.
금성과 천재교육 교과서는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장(章) 아래 4·3 사건을 다루는 점은 같다. 하지만 '정부 수립을 위한 갈등'(금성)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천재)이란 소제목 아래 4·3 사건을 실어 '4·3=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란 느낌은 약해졌다. 해냄 출판사는 '냉전, 통일 국가 수립을 가로막다'란 제목 아래 '제주 4·3 사건과 같은 비극은 왜 일어났을까'를 실어 4·3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연결하는 서술은 피했다. 미래엔은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아래 4·3 사건을 실어, 이 사건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서술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새 한국사 교과서는 왜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썼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교과서 검정 업무를 맡은 교육부 '지침' 때문이다. 교육부가 2018년 6월 발표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교육 과정'에 따르면, 4·3 사건은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소주제로 다루도록 명기(明記)했다. 함께 가르칠 항목으로 8·15 광복, 냉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을 적시(摘示)했다. 이 교육 과정은 2017년 대통령 지시로 국정 한국사 교과서가 폐지된 이후 마련했다.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해 만들었다. 교과서 필자 중 한 명은 "검정을 통과하려면 이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교육 과정을 바꾸면서 '역사 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4·3 사건을 일제히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가르치는 게 역사 교육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런 '지침'이 대한민국 국민의 보편 상식에 부합하나.
'4·3=통일 국가 수립 운동'은 남로당 입장
작년까지 사용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8종)는 4·3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서술했다. 교육부 지침이 4·3을 '대한민국 수립과 6·25전쟁'이란 주제 아래 다루도록 했기 때문이다. 금성출판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란 소제목 아래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4·3 사건을 기술했다. 비상교육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아래 4·3 사건을 다뤘다. 리베르, 천재교육, 교학사 교과서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미래엔과 두산동아는 각각 '통일 정부 수립 운동',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다'라는 제목 아래 4·3 사건을 다뤘다.
원로 국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4·3 사건은 남로당 입장에서 보면 통일 국가 수립 운동이다. 6·25도 북한 입장에서 보면 조국통일전쟁 아닌가"라며 "대다수 양민이 희생당한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쓰는 건 학계 판단보다 한참 앞서 나간다"고 했다. 한 교수는 "정부는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교과서 집필 지침을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교과서 지침 변경에 누가 관여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한다.
4·3 사건은 남로당 무장 폭동이 도화선이 돼 수많은 제주도민이 억울하게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혈육을 잃은 제주도민은 수십 년간 '폭도'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4·3 특별법을 만들고, 노무현 정부 당시 4·3 사건 공식 보고서를 만든 이유는 진상 규명을 통해 제주도민의 억울한 희생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제주도민이 남로당 선전대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희생당한 것처럼 기술하면, 제주도민에게 다시 북한 편든 '폭도'의 굴레를 씌우는 게 아닌가.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조선일보(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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