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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은퇴 무대] [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 ....

뚝섬 2024. 4. 29. 05:55

[나훈아의 은퇴 무대]

[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요] 

[한 번뿐인 인생, 단 한 번의 무대] 

[나훈아] 

[“국민이 힘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 ... ]

 

 

 

나훈아의 은퇴 무대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 2012년 13번째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내며 절필도 선언했다. 조용히 작품 활동을 멈춰도 될 것을 굳이 선언까지 한 것은 “80세가 된 내가 더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 했다. 끝내야 할 때를 아는 소설가의 결단 덕에 ‘디어 라이프’는 먼로의 마지막 걸작으로 남아 있다. 국내에선 프로야구 선수 이대호가 재작년 팬들의 박수 속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3할 타자로 선수복을 벗은 그는 은퇴하는 해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유일한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멋진 은퇴 대열에 가수 나훈아도 이름을 올렸다. 지난 주말 인천 송도 공연에서 “마지막 은퇴 투어”라며 올 연말을 끝으로 58년 지켜온 무대를 떠난다고 했다.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한 이래 ‘갈무리’ ‘잡초’ ‘사랑’ ‘영영’ ‘무시로’ 등 2600여 곡을 발표했다. 작사·작곡도 뛰어나 1200여 곡을 직접 지었다. 120곡 넘는 히트곡으로 전국 노래방 반주기에 가장 많이 곡이 수록된 국민 가수이기도 하다.

 

▶나훈아의 노래에는 한국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고향역’과 ‘물레방아 도는데’에는 1970년대 타향살이의 애환을, ‘녹슬은 기찻길’과 ‘대동강 편지’엔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눈물을 담았다. ‘테스형’처럼 세대를 넘나드는 곡을 불러 청년들에게 ‘노인돌’(노인+아이돌)로 불린다.

 

▶북한에서도 인기 가수다. 우리 가수들의 평양 공연 때는 김정은이 당시 우리 문화부 장관에게 “나훈아는 왜 안 왔냐?”고 물었다. 그 후 남한 유행가 단속이 시작됐을 때, 북한 청년들이 나훈아 노래 ‘사내’를 부르다가 불잡혔다. 왜 그 노래를 불렀느냐는 당국의 질책에 청년들은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와 닿아서”라고 했다는 사실이 북한 내부에서 큰 화제가 됐다.

 

▶송도 공연에서 나훈아는 ‘고향역’부터 ‘18세 순이’까지 숨찬 기색 하나 없이 내리 불렀다. ‘물레방아 도는데’를 부를 땐 30대이던 1986년과 40대이던 1996년 공연 동영상을 함께 틀었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훈아 목소리가 청년·중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객석에서 “이런데 왜 은퇴하느냐?”고 묻자 나훈아는 “저는 아직 더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이크를 내려놓는 것”이라 했다. 시인 이형기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 ‘낙화’에 썼다. 나훈아가 남긴 노래의 꽃은 국민의 마음에 떨어져 오래도록 시들지 않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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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요

 

나훈아와 소크라테스

 

1983년생인 나는 가수 나훈아가 한창 날리던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게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파티 초청을 거부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두세 곡 부르고 약 삼천만원 정도 받는 쉬운 돈벌이였지만 단호히 거부하며 이런 뜻을 밝혔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려고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대체 저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의문은 올해 추석을 하루 앞두고 풀렸다. 지난 9월 30일 KBS 2TV에서 방송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보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호랑이 같은 얼굴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이 대범한 예인(藝人)이,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격식 없이 건넨 말 덕분이었다. 아, 테스 형!

 

나훈아는 노래한다. “세상이 왜 이래, 사랑이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원래 이 가사는 그가 작고한 아버지의 무덤에서 떠올린 것이지만, 너무 어둡고 무거워질 것 같아서 모두가 아는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후문이 전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 주제만큼은 진작부터 그의 가슴 깊이 묻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노랫말이 되었고 온 국민의 안방에 전달되었으리라.

 

고대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델포이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세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중 하나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인 델포이는 예나 지금이나 험난한 곳이다.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었던 셈이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웅장한 신전에 도달하면 신의 메시지가 기다린다. 너 자신을 알라.

 

즉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의 원작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워낙 열심히 저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사람이 ‘땡벌’을 나훈아가 아닌 강진 노래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회상록’에서 전하는 바는 이렇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며,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미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한다. ‘카르미데스’ ‘프로타고라스’ ‘파이드로스’ ‘필레보스’ ‘법률’ ‘알키비아데스 1’. 총 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는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았다. 대화 편에 따라 언급되는 맥락과 방식이 다르다.

 

가령 ‘알키비아데스 1’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라는 취지에서 저 말을 인용한다. 반면 ‘파이드로스’에 담긴 맥락은 훨씬 무겁고 비장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인 튀폰을 거론하며,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튀폰보다 더 끔찍하고 사나운 짐승인지, 아니면 오만하지 않은 명(命)과 신성을 타고난 온유하고 온전한 피조물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치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처럼,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소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그 이전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인간보다 자연에 쏠려 있었다. 우주가 어떤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순환하는지, 숫자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 그들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우주를 인식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고 귀찮게 질문을 던져댔던 것이다. 자네는 참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자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 이건희의 초청을 거절하던 나훈아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나훈아는 자신이 ‘대중 예술가’, 즉 표를 사고 공연장에 온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와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혼돈에 빠지면 더 큰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없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은 평범하고도 위대한 국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런 단단한 자기 인식에서 나왔으리라. 정권 따라 팔랑거리는 얄팍한 ‘개념 연예인’이 아닌 당당한 대중 예술가 나훈아. 그는 그렇게 온 국민의 가슴에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눈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통령 문재인부터 그렇다. 지금은 대단한 권력자인 것 같지만 고작 1년여 후에는 평범한 국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임기 말년의 선출직 공무원이다. 5년 빌려 쓰는 권력을 쥐고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며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앞에 빌빌 기면서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모습 앞에 국민은 입을 모아 외칠 수밖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골칫거리였다. 권력자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망자로서 살아가느니 아테네 시민으로서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팬이나 추종자라고 스스로를 착각하는 이가 퍽 많은 이 나라의 모습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뭐라고 할까.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답답한 마음을 한 줄기 노래에 실어 보내며,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조선일보(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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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인생, 단 한 번의 무대

 

나훈아는 ‘가왕(歌王)’이 아닌, ‘가황(歌皇)’으로 불린다. ‘노래의 왕’을 넘어 황제의 수준으로 승격한 모양새다. ‘가황’은 국어사전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타이틀을 붙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훈아의 노래를 보고 듣는 모두 언제부터인가 ‘가황 나훈아’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

 

가황 나훈아의 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 9월 30일 KBS2에서 선보인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여러모로 최근 콘서트와 차이가 컸다. 코로나 시대의 노래의 힘을 전국민은 이미 여러차례 경험해온 터였다. <비긴 어게인>에서 음색 고운 가객들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무해줬고, <미스터트롯>의 top7 트로트 형제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울한 일상으로 상처진 일상에 연고를 바른 듯 새 살을 돋게 했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코로나 19? 이 보이지도 않는 이상한 것 때문에 절대 내가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만에 방송 출연을 결심한 나훈아의 말이다. 긴 침묵만큼 방송 이후의 파장과 영향력도 컸다. 시청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추석 당일인 9월 30일에 KBS2에서 방영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시청률 29.0%(닐슨코리아)를 기록했고, 제작 과정을 담은 10월 3일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 역시 18%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나훈아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23.8%에 달한다. 최근 지상파에서는 보기 드문, 역대급 시청률이었다.

 

재방송, 다시보기 없는 '단 한 번'의 무대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나훈아가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쏟아부은 8개월 간의 여정을 공개했다. ⒸKBS2

 

나훈아의 공연은 ‘단 한 번’의 무대였다. 이 방송을 기획하면서 나훈아는 크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한다. 하나는 자신이 한 말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방영되면 좋겠다는 것, 또 하나는 재방송이나 다시보기를 제공하지 말아달라는 것.

 

덕분에 노래 중간중간에 나훈아의 발언이 토씨 하나 편집되지 않고 오롯이 전달됐다. 그래서 “우리 KBS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는 발언이 그대로 전파를 탈 수 있었다.

 

또 하나, 무한복제가 일상이 된 네트워크 시대, 단 한 번의 무대로 기억되는 나훈아의 공연은 감동의 품격이 달랐다. ‘본방사수’가 희귀한 상황이 되어갈 정도로 ‘다시보기’가 일상이 되는 시대다. 지금 놓치더라도 해당 방송사에서, 넷플릭스나 왓차 같은 OTT 플랫폼에서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는 콘텐츠와 그렇지 않은 콘텐츠를 대하는 마음이 같은 순 없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나훈아의 공연은 일회성의 아쉬움과 희소성까지 감동의 요소로 끌어들였다. 2020년 코로나 시국의 한가운데에서 한가위를 지내는 시청자들의 지치고 간절한 마음까지 말이다. 딱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한 번뿐인 무대를 통해 그는 생의 유한성까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노 개런티 출연, 명언 제조기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비대면 공연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나훈아. 그는 스페셜 방송에서도 여러 명언을 남겼다.

 

1966년에 데뷔, 데뷔 55년차 베테랑임에도 그는 “연습만이 살 길이고, 연습만이 특별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또 제작진이 “어떤 가수로 남고 싶은지” 묻자 “우린 유행가 가수다, 남는 게 웃기는 것”이라며 “‘잡초’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부른 가수,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기억되면 좋겠다). 뭘로 남는다는 자체가 좀 웃기는 얘기다. 그런 거 묻지 마소.”라고 답했다.

 

나훈아는 무대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공연을 청할 때에도 역시 거절하면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표를 끊어라.”

 

‘가황 나훈아’는 자신의 소신과 방향성이 뚜렷했다. 예술가이지만 ‘대중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고, 톱스타이지만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유행가 가수’임을 잊지 않았으며,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지만 ‘무대 위의 가객’으로서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나훈아가 이번 공연 과정에서 적어둔 '기획 노트'. 얼마나 치열하고 디테일하게 준비했는지 한 눈에 보인다. ⒸKBS2

 

10월 3일에 방영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이번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훈아가 쓴 ‘공연 기획 노트’도 화면에 비쳤다. 노트 내용은 디테일의 끝판왕이었다. 부르는 노래 순서부터, 각각의 노래에서 강조할 부분, 중간 멘트까지 보라색, 빨간색, 하늘색, 빨간 펜으로 알록달록 적혀있었다.

 

나훈아는 무대 위의 가수다.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8개월을 쏟아붓는 그의 열정과 노력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김민희 기자, 조선닷컴(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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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노태우 정권 시절 여당 고위 당직자가 나훈아를 총선에 출마시키려고 접촉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치를 좀 하셔야겠습니다”라고 하니 나훈아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울긴 왜 울어’를 누가 제일 잘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이클 잭슨이 저보다 잘 부릅니까?” 저쪽에서 “그거야 나 선생이 제일 잘 부르죠” 하자 나훈아가 대꾸했다. “그러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가 뭘 해야 합니까? 정치를 해야 합니까, 노래를 해야 합니까?” 그렇게 나훈아 영입은 무산됐다.

 

▶나훈아는 무대에서 몸을 배배 꼬거나 이를 드러내고 웃거나 관객에게 윙크하며 노래한다. 그 덕분에 ‘느끼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처럼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관철할 실력을 보유한 뮤지션도 드물다. 그는 한평생 자신의 음악을 ‘뽕짝’이라고 스스럼없이 불렀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한 우리 민족 피에 뽕짝이 흐른다고 했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생일에 나훈아에게 와서 노래해 달라고 했을 때 그가 거절하며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나는 대중예술가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합니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를 사세요.” 그는 1996년 일본 공연에서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며 즉석 가사로 “독도는 우리 땅”을 외쳤다. 이후 일본 우익 세력으로부터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 “때리 직일려면 직이삐라캐라”고 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말했다.

 

▶추석 TV에서 방영한 나훈아 콘서트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누렸다. 무대 매너와 가창력도 여전했지만 쇼 중간중간 한 말이 큰 화제가 됐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느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이 지켰다. 여러분이 세계 1등 국민이다” “KBS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 같은 말이었다. 인터넷에는 “속이 시원하다” “하고 싶은 말 대신 다 해줬다”는 반응이 올라왔다.

 

▶나훈아가 정확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발언을 절대로 편집하지 못하게 했다는 걸 보면 분명 작심하고 한 말일 게다. 화병 걸린 국민은 나훈아라는 수퍼스타와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 같아 고맙고 통쾌하다. 나훈아는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이라고 부른 신곡에서도 한국인들을 위로한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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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힘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 나훈아에 야권도 들썩

 

/KBS 2TV 캡처

 

지난 30일 15년 만에 TV에 출연해 ‘대한민국 어게인!’을 외친 ‘가황(歌皇)’ 나훈아의 공연과 발언에 정치권까지 들썩이고 있다. 나훈아의 “KBS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 등의 발언에 야권이 반응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늦은 밤인데 가슴이 벌렁거려서 금방 잠자리에 못들 것 같다. 나훈아 때문”이라고 했다. 원 지사는 “명절 전날 밤, 이 콘서트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며 “오늘 밤 나훈아는 의사, 간호사 등 우리 의료진들을 영웅이라 불렀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봉천동까지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출퇴근하는, 홍대에서 쌍문동까지 버스 타고 서른일곱 정류장을 오가는 아버지를 불러줬다. 그러면서 코로나19와 싸우는 우리 모두에게 ‘긍지를 가지셔도 된다. 대한민국 어게인이다’고 힘을 실어줬다”고 했다.

 

원 지사는 “힘도 나고 신이 났다. 그런데 한켠(한편)으론 자괴감도 들었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정치를 하면서 나름대로 애를 쓰곤 있지만 이 예인(藝人)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나훈아의 공연에 대해 “대한민국이 나훈아에 흠뻑 취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흔들어 깨웠고, 지친 국민들의 마음에 진정한 위로를 주었다. 고향에 가지 못한 국민들께 고향을 선물했다”고 했다. 장 의원은 “권력도, 재력도, 학력도 아닌, 그가 뿜어내는 한 소절, 한 소절, 한 마디, 한 마디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움직이고 위로했다”며 “미(美)친 영향력”이라고 했다.

 

같은 당 박대출 의원도 1일 “가황 나훈아의 ‘언택트쇼’는 전 국민의 가슴에 0mm로 맞닿은 ‘컨택트 쇼’였다”며 “진한 감동의 여운은 추석 날 아침에도 남아 있다. 추석 명절 연휴가 끝나도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진정성 있는 카리스마는 위대하다”고 했다.

 

국민의힘 홍보본부장인 김수민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나훈아 관련 기사를 올리고는 나훈아가 이번 공연에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을 강조했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소감을 밝혔다. 그는 1일 페이스북에 ‘가황 나훈아에 빠져 집콕 중…여러분은 어떠신가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어릴 적 깊은 산골 초막집 안 호롱불 밑에 모여 형님들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고향무정’, ‘유정천리’를 따라 불렀고, TV를 접하게 되면서 얼굴도 못 보던 그 가수의 입이 특이하게 크다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이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에는 조금 색다르게 느껴지던 그의 표정에서 카리스마를 느끼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실황 공연 관람이 꿈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기회는 없었다. 어젯밤, 아쉽지만 현장 공연 아닌 방송으로나마 그리던 가황 나훈아님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지사는 “모두처럼 저도 집콕하느라 부모님 산소도 찾아뵙지 못하고 처가에도 못 가는 외로운 시간에 가황 나훈아님의 깊고 묵직한 노래가 큰 힘이 되었다”며 나훈아처럼 “어게인 코리아!”를 외쳤다.

 

-김경필 기자, 조선닷컴(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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