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쫓으려 왕실 무덤에 심는 측백나무]
[손재형은 왜 세한도를 지키지 못했나]
[홍라희 관장 사퇴.. ]
귀신 쫓으려 왕실 무덤에 심는 측백나무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정선 '사문탈사'(1741), 비단에 채색, 21.2x33.1㎝,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이름이 좀 어렵다. ‘사문탈사(寺門脫蓑)’의 ‘사'는 도롱이를 나타내는 말이며 ‘절 문 앞에서 도롱이를 벗는다’는 뜻이다.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띠로 만든 옛날 비옷이 도롱이이다. 그림처럼 눈 오는 날 입으면 방수는 물론 방한복의 기능도 해준다. 소한과 대한의 중간인 지금이 바로 그림 속의 그 계절이다.
절 앞에 길게 늘어선 여섯 그루 고목나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맨 왼쪽의 연하게 줄기만 그러져 있는 나무는 또 다른 ‘사문탈사도’에 나무 전체가 다 그려져 있어서 전나무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다섯 그루는 모두 측백나무이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볼 때 두 아름이 넘는 고목나무이다. 땅에 맞닿은 줄기 아랫부분에는 모두 고깔 모양으로 나무 속이 썩어 있다. 나무 크기나 속 썩음으로 봐서 나이는 적어도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측백나무의 줄기 껍질은 원래 세로로 깊이 갈라지므로 그림에서도 약간 굵은 빗금으로 처리했다. 측백나무는 침엽수로 분류하지만 날카로운 바늘 모양 잎이 아니다. 작디 작은 비늘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지면서 한쪽으로 눌린 것처럼 전체적으로 납작하다. 그림에서 눈이 살짝 덮인 것처럼 보이는 납작한 잎은 측백나무 잎의 실제 모습 그대로이다.

예부터 왕릉의 둘레 나무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지만 측백나무도 흔히 심었다. 무덤 주위에는 시신을 뜯어먹고 사는 ‘망상(魍像)’이란 괴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망상은 호랑이와 측백나무를 가장 겁낸다고 알려져 있다. 호랑이는 무덤 앞에 석상으로 만들어두고 주위에는 망상을 물리칠 측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중국 베이징 근교, 명나라 역대 17황제 중 13명이 잠들어 있는 대규모 능묘군인 명13릉 주변은 온통 측백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측백나무는 중국의 사원이나 귀족의 묘지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절 앞에 하필이면 고목이 된 측백나무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절의 성격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문 옆으로 긴 행랑채가 달려 있는데 이런 절 건물 모습은 조선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원찰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으며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주로 만들었다. 오늘날 수원 융건릉 가까이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라고 한다. 그림에서 소를 타고 절을 찾은 손님은 율곡 이이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선비가 흔히 찾는 왕실과 관련된 사찰에 의미가 있는 나무라면 바로 측백나무를 들 수 있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조선일보(2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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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형은 왜 세한도를 지키지 못했나
가슴 뜨거웠던 한 사내의 삶과 그의 애장품을 생각하며 새해 첫 주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이자 뛰어난 서예가였고 정치에 투신했던 소전 손재형(1903~1981) 얘기다. 지난해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기증 소식을 취재하면서 그에 대해 궁금증이 커졌다.

20세기 중반 촬영한 소전 손재형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이 걸작의 파란만장한 소장사(史)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주인공이다.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도쿄로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 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쓰카 집을 매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100여일 만에 후지쓰카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세한도를 내주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한 줌의 재로 변했을지 모른다. 석 달 뒤 후지쓰카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얘기. 이후 손재형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소장품을 저당 잡히고, 세한도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 소유가 된 뒤 아들 손창근 선생에 의해 국민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에 길이 남을 경사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목숨 걸고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왜 끝까지 애장품을 지키지 못했을까.

손재형은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재력이 상당했던 할아버지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다. 양정고보 시절부터 추사 작품에 심취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추사의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천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그가 학생 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 나섰을 정도”(월전 장우성 회고록)로 일찍이 수집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당대 최고 서예가인 김돈희와 이한복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추사의 서화에 더 몰두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도 글씨체를 갈고닦아 개성적인 소전체를 완성했다. 우리가 쓰는 ‘서예’라는 용어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열정적인 컬렉터였다. 195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100주기 전람회 출품작 중 절반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을 거치면서 반평생 모은 컬렉션이 흩어지게 된다. 셋째 아들인 손홍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이 자세한 얘기를 들려줬다. “자유당 시절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이미 자금을 많이 썼고 1960년 선거에 또 나서면서 돈이 급박해졌다. 풍랑을 맞아 진도에서만 선거가 열흘 연기되는 바람에 급전이 필요해 세한도를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다. 선거만 끝나면 되찾아올 생각이었지만 낙선했다. 갖고 있던 목포의 극장과 서울 효자동 집, 배와 염전까지 내놓고 급한 불을 끈 뒤 찾으러 갔지만 이미 그림은 일곱 사람을 거쳐 새 주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아들은 “세한도가 넘어간 뒤 아버지는 골동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며 “누가 와서 감정해달라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같은 명품이 호암미술관으로 흘러간다. 이병철 회장에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부가 30대 나이에 최초로 구입한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 “정치에 입문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분신처럼 여겼던 세한도도 지켰을 테고.” 다행히 작품은 눈 밝은 주인을 만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됐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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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라희 관장 사퇴..
미술 문화 발전이 여유 있는 부인들의 선한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건 예술사가 증명한다. 뉴욕의 부잣집 딸 페기 구겐하임은 막대한 재산과 탁월한 안목으로 20세기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꿨다. 뉴욕의 세계적 현대미술관 MoMA는 세 명의 부호 부인이 내놓은 땅과 돈으로 세워졌다. 한국에서 이들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일 것이다.

▶22년 전 홍씨가 재벌 안주인에서 미술관장으로 세상에 나와 처음 언론과 마주했을 때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원래 나서는 성격은 못 되는데 남편이 '기왕 할 거면 책임 있게 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왔다"고 했다. 부부는 선대(先代) 이병철 회장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 보는 눈을 키웠다. 30대 나이에 처음 수집한 것이 서예가 손재형한테 산 겸재의 대걸작 '인왕제색도' '금강전도'였다고 했다. 그는 "21세기 서울에 꼭 있어야 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미술관을 도심에 만들겠다"고 했다.
▶2004년 서울 한남동에 문 연 리움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작품이다.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 등 세계적 건축가 세 사람이 각각 설계한 건물이 로비에서 하나로 만나는 구조다. 리움 전시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고려청자서부터 현대 첨단 미술까지 국내외 명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기획전을 통해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미술가의 전시를 끌어와 국내 젊은 미술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며칠 전 끝난 덴마크 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도 그랬다.
▶자기 돈으로 자기 좋아하는 일 하는 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돈이라도 예술에 쓰는 건 다르다. 외국 거장 그림 하나가 들어오면 결국 나라의 소장품이 하나 추가되는 것이다. 그걸 감상하며 국민의 문화생활이 풍요로워진다. 해외에서 손님이 와 한국 문화 현주소를 물으면 리움에 데려간다는 기업이 많다. 괜찮은 미술관 하나가 국가의 품격을 좌우한다. 홍씨는 해마다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로 꼽혀 왔지만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홍라희 관장이 6일 리움을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3년 동안 거의 매일 병원에 가 간병을 해 왔다고 한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도 얼마 전 구속됐다. 그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의 퇴임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무겁다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리움미술관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7-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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