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피의 보복 1721년, 새 인재 등용 1781년… 올해는 어떤 신축년 될까
경종 1년 정권 잡은 소론, 대대적인 정치보복 ‘피바람’
정조 5년 싱크탱크 규장각 세우고 유능한 인재 발탁
지도자 비전과 국가경영 능력에 따라 파국·도약 갈라져
올해는 신축년(辛丑年)이다. 조선 역사에서 신축년은 아홉 번 있었다. 1421년(세종 3년), 1481년(성종 12년), 1541년(중종 36년), 1601년(선조 34년), 1661년(현종 2년), 1721년(경종 1년), 1781년(정조 5년), 1841년(헌종 7년), 1901년(고종 38년)이다. 이 중에서 1721년과 1781년을 살펴본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신축년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1721년 신축년엔 ‘신임옥사’라고 하는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소론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듬해인 임인년(1722년)까지 8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노론 숙청이 일어났다. 실록을 보면, 1721년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노론의 김창집은 갑자기 왕의 이복동생인 연잉군(나중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려 한다.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밖에 안 된 34세 젊은 국왕의 건강 문제와 아들 없음을 이유로 대권 후보자를 정해놓자는 이 요청을 경종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생모 장희빈의 죽음을 어려서 목도한 경종에게는 영의정과 좌의정을 비롯해 온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 신하들과 맞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사태를 반전시킬 기회는 두 달 후에 왔다. 새로 책봉된 세제에게 국가 사무를 대신 처리하라는 왕명을 놓고 신하들은 고민에 빠졌다. 김창집 등 노론 신하들은 ‘대리청정 절목’ 등을 올리는 등 연잉군으로의 권력 이양을 기정사실화했다. 이 대목은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전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민무구 형제는 전위 선언이 왕의 ‘정치적 함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양녕대군으로의 전위를 서둘렀다.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하나같이 눈먼 사람이 된다.
소론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소론의 김일경은 국왕의 구언(求言)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김창집 등이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탄핵했다. “삼강 중에 으뜸이 군위신강(君爲臣綱)이고 오륜 중 최고는 군신유의(君臣有義)인데” 노론 신하들이 불충의 큰 죄를 짓고 있다고 비판했다. 벼르고 있던 경종은 그 탄핵을 받아들였고, 김창집 등 노론 대신들은 권좌에서 밀려났다. 다음 해(임인년)에는 아예 국왕 시해 음모라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다수 노론 신하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1721년 신축년의 정권 변동(換局·환국)은 정치의 중심이 사라진 가운데 일어났다. 당시 경종은 인재를 뽑거나 키우는 노력, 대립하는 당파를 중재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가뭄 피해가 극심했지만 민생을 살피는 정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당시 정치 세력은 오로지 대권을 차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해에 일어난 전국 각지의 민란은 정치 실종의 결과였다.
또 하나의 신축년은 1781년(정조 5년)이다. 이해는 경종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정조는 정치 보복 요구를 최대한 억제했다. 영의정 서명선이 왕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비난한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2월). 당시 정치적으로 실각한 홍국영 지지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언관들에게도 “지금의 급무는 진정하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鎭安]”이라며 다독였다. 정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사안들이 어전 회의에 올라오는 것을 최소화했다. 대신 경상도 지역 수재 대책 마련 등 민생 문제로 의제를 돌렸다.
이 시기 정조가 주력을 기울인 것은 인재 양성이다. 그는 문신을 선발하는 시험을 친히 주관하고, 무예 인재 선발 방안을 마련케 했다(4월). 소외된 서북쪽(평안도 지역) 인재들을 정책적으로 등용했다(6월). 무엇보다 규장각 전용 도서관을 세워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했다(5월). 그때까지 왕실 도서관에 불과하던 규장각이 명실상부한 싱크탱크로 거듭난 것은 이러한 노력에 힘입었다. 초계문신제라는 공무원 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서(2월) 젊고 재능 있는 인재를 발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약용 등 인재 총 138명이 초계문신 과정을 거쳐 유능한 일꾼으로 성장한 것은 이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무엇이 두 신축년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1721년 한 해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극심한 정치 보복으로 얼룩졌다. 그 이듬해에 초래된 역사상 보기 드문 정치 숙청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1781년의 신축년은 젊은 인재들을 꿈꾸게 한 미래 준비의 시간이었다. 지도자의 비전과 국가 경영 능력에 따라 한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고, 도약의 기회를 맞기도 한다는 것을 실록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 조선일보(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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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기득환실 (旣得患失)
1658년, 72세의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효종에게 ‘국시소(國是疏)’를 올렸다. 글의 서두를 이렇게 열었다. “전하께서 바른 정치를 구하심이 날로 간절한데도 여태 요령을 얻지 못하고, 예지(叡智)를 하늘에서 받으셨으나 강건함이 부족하여, 상벌이 위에서 나오지 않고, 정사와 권세가 모두 아래에 있습니다. 대개 완악하고 둔한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얻으려 안달하고 잃을까 근심하는 자는 성인께서 말씀하신 비루한 자들이고, 겉으로는 온통 선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제 한 몸만 이롭게 하려는 자는 성인께서 말씀하신 가짜요, 말만 번지르르한 자들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행세하는 자는 대부분 이 같은 부류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근심스레 위에서 외롭게 서 계시어, 바깥 일을 깜깜히 보지 못하시니,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은 진실로 전하를 위해 장탄식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통곡하고 싶습니다.”
두 부류의 가짜들을 꼽았다. 얻으려 조바심을 내다가 잃을까 근심하는 비루한 자들과, 번드르르한 말로 제 이익만 챙기는 자들이 그것이다. 앞쪽은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비루한 자들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아직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면 잃게 될까 근심하니, 진실로 잃을 것을 근심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권력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다가, 일단 쥐고 나면 잃지 않으려고, 나랏일은 뒷전이고 저희들끼리 못 하는 짓이 없다. 사직의 안위(安危)와 생민(生民)의 사활보다 일신의 영달과 동당(同黨)의 이익을 늘 앞세운다.
이를 이어 다시 『논어』 「안연(顏淵)」에서 “곧은 자를 기용하여 굽은 자 위에 두면 굽은 자를 곧게 만들 수 있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고 한 말을 인용했다. 만사는 인사(人事)인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 근심하시는 것이 무슨 일이길래, 근심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시대마다 어진 인재는 부족하지 않으니, 전하께서 정성스레 구하지 않고, 정밀하게 살피지 않아서이지, 어찌 인재가 부족한 세상이 있겠습니까?”라고 찔러 말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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