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안중근 의사]
을사늑약
日 "한국 외교권 넘겨라"… 총칼로 위협, 억지로 맺은 조약

①지난 21일 서울 중구 정동길의 덕수궁 중명전 모습.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맺어졌어요. ②고종은 조약 체결에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어요. ③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④을사늑약 문서. ⑤왼쪽부터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러요. /박상훈 기자·위키피디아
최근 치러진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과목에 이런 문제가 나왔어요. '이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지문을 보죠. '민영환이 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하였으니, 신들은 매우 놀랍고 슬펐습니다. (…) 폐하께서는 속히 칙명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완용·이근택·권중현 오적을 모두 처단하소서.' 민영환을 자결케 했고 박제순 등 '오적'이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이 조약은 1905년의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폐하'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으로 황제가 된 고종 임금을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답은 3번 '헤이그 특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은 어떤 조약이었을까요?
러일전쟁과 열강의 '日 한국 침략' 묵인
1894년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해 경복궁을 점령했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고종 임금은 1896년 일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인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협박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갑진늑약'으로도 불리는 이 의정서는 4조에서 '일본은 유사시 한국 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고, 이것은 일본이 독도에 군사 시설을 설치해 침탈하는 계기가 됩니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일본인 '재정 고문'을 둬 대한제국의 재정 관련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러일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일본은 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열강의 승인을 받으려는 책략에 집중하게 됩니다.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의 양해도 받았습니다.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에선 '한국 정부의 동의만 받으면 주권을 빼앗을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죠.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긴 셈이었습니다.
총칼과 대포로 협박해 외교권 빼앗아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한반도 침략 계획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도착해 고종을 알현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의 뜻을 따르라'고 협박했습니다. 같은 달 15일에는 다시 고종을 찾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협약안을 내밀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는다는 것은 사실상 주권을 침탈한다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조약에 찬성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아침,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2만5000여 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주변으로 배치돼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무장한 일본 헌병과 경찰이 궁궐 안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었습니다. 이날 오후 3시 경운궁에서 조약 체결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종은 인후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궁궐 바깥의 일본군이 대포를 경운궁으로 조준했고, 오후 8시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 병력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나타나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약 찬성 여부를 물었습니다. 참정대신 한규설 등은 반대했으나 하나둘씩 찬성하는 대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섯 명의 대신이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입니다. 이들에겐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을사년(1905)에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역적'이란 뜻이죠. 고종이 조약 체결에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 문서에는 고종의 국새 대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혔습니다. 일각에서는 "고종이 당시 군주로서 목숨을 걸고 조약 체결을 막았어야 마땅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지금은 덕수궁 담장 바깥에 있는 중명전이었습니다.
거대한 독립운동의 불길이 시작되다
이렇게 강제로 맺어진 '제2차 한일협약'을 우리는 지금 을사늑약이라고 부릅니다. 늑약(勒約)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뜻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2조에서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했고, 3조에선 일본인 통감이 경성(서울)에 주재한다고 했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동시에, 통감부 설치로 한국의 통치를 감독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외국에 있던 한국의 외교 기관은 모두 폐지됐으며 외교관들은 철수했습니다.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습니다. 시종무관 민영환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이 자결했고,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거대하고도 지난(至難)한 독립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부터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은 1910년의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고종의 외교를 통한 국권 회복 노력과 의병 항쟁 때문이라는 것이 국내 학계의 통설이었지만, 최근엔 '만주를 놓고 벌어진 일본·러시아·미국의 상호 견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일본이 섣불리 한국을 병합했다가는 만주에서 불리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러일전쟁 이후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1907년의 1차 러일협약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를 남북으로 나눠 서로 이권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미국은 1909년 '만주 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만주 진출 의사를 밝혔으나, 1910년 7월 2차 러·일 협약으로 러시아가 북만주의 이권을 지키고 일본의 한국 병합을 용인하기로 결정하자 뜻을 접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습니다.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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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111년 전 '동양 평화' 외치며 이토 저격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보름 정도 앞두고 동생들(맨 왼쪽 두 명)과 빌렘(가운데 등을 보인 사람)신부 에게 유언을 남기는 모습입니다. 그는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어요. /독립기념관
26일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지 11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 의사는 순국하기 5개월 전인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이토는 당시 한일 병합을 목적으로 설치한 감독기관이었던 통감부의 초대 수장으로 한국 침략의 원흉이었죠. 안중근 의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꽤 있답니다.
①처음엔 일본을 믿었어요
러시아와 일본이 1904~1905년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 러일전쟁입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일부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아시아의 평화를 지킬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믿음이지만 안중근 의사도 그 당시에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이토 히로부미의 총살 사건을 심리한 법정에서 러일전쟁에 대해 "한국인은 일본의 승리를 마치 자국이 승리한 듯 기뻐했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이 막 끝난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요했습니다. 이때 안 의사는 침략자 일본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됩니다. 이후 그는 "일본은 뱀과 고양이같이 한국을 배신했다"며 일본에 저항하겠다고 다짐했죠.
②독립군 장군이었어요
1907년 일제가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행하자 안중근 의사는 한반도와 인접한 러시아의 연해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듭니다. 독립운동가 이범윤, 최재형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 조직인 대한의군에서 참모중장으로 임명된 안 의사는 1908년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법정에서 "이토는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했으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과 자격으로 그를 총살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결코 개인적인 저격이 아니었다는 거죠.
③이토의 죄를 15개 제시했어요
안 의사는 법정에서 '왜 이토를 쏘았는가'란 질문에 15개 항목에 걸쳐 분명하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1905년 대한제국 황실을 위협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게 한 죄, 1907년 정미 7조약을 강압하고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 한국의 산림과 하천·광산 등을 강탈한 죄,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수많은 의사들을 폭도라며 살육한 죄, 친일파를 통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라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한국의 삼천리 강산을 욕심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등을 꼽았지요. 마지막 항목은 '동양 평화를 파괴해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일으킨 죄'였습니다.
④자결할 생각은 없었어요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할 때 쓴 권총은 벨기에에서 만든 권총이었습니다. 이 총은 탄창에 총알이 7발이 들어가요. 하지만 총알을 장전하는 곳에 한 발을 더 끼우면 총 8발까지 장전할 수 있었습니다. 안 의사는 이 총에 총 8발을 장전했는데요. 안 의사가 쏜 첫 세 발은 이토에게 명중했어요. 안 의사는 또 '혹시 이토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토를 수행하던 일본인 세 명에게 한 발씩 쐈습니다. 일곱 번째 총탄은 다른 사람들의 외투와 바지를 관통하고 플랫폼에 떨어졌습니다. 모두 일곱 발을 쏜 것이죠. 마지막 총탄은 쏘지 못한 채 총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혹시 자결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아직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⑤한·중·일 평화 체제 구상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죽인 뒤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썼습니다. 사형 집행으로 이 책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주장이 담겨 있어요. 그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중·일 3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주고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사 항구로 만들어 평화회의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고 이들에게 2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자고 했어요. 또 공동 중앙은행을 설립해 공동 화폐를 만들자고 했죠.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평화 체제를 먼저 구상했던 거예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계승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칸트는 전쟁이 인류를 망하게 한다고 경고하면서 각 나라가 주권 일부를 양도해 전쟁을 막을 국제조직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어요.
[잘못 알려진 사실들]
안중근 의사가 의거 직후 품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라 외쳤다고 아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에요.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환영식이 열리던 하얼빈역에 들어갈 때 검문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태극기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총을 쏘고 외쳤던 말은 "코레아 우라"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어로 '한국(대한제국) 만세'란 뜻인데요. "코레아 우라"가 아니라 국제 공용어인 에스페란토로 "코레아 후라"라고 외쳤다는 주장도 있어요.
이토가 총을 쏜 사람이 한국인이란 말을 듣고 죽기 전에 '바보 녀석'이라 말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러나 안 의사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또 일부 일본인은 "한국인처럼 유약한 민족이 감히 그런 거사를 했을 리 없다" "안중근이 아니라 역 2층 식당에 있던 정체 모를 저격수가 이토를 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의사가 쓴 이토의 사망진단서를 보면 총탄이 이토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관통한 게 아니라 수평으로 관통했다고 기록돼 있어요. 안 의사가 쐈다는 것이죠.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최원국 기자, 조선일보(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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