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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수구파 민영익을 칼로 쳤으나 혁명은 좌절됐다] ....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

뚝섬 2022. 12. 4. 05:55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박종인의 땅의 歷史]

 

[수구파 민영익을 칼로 쳤으나 혁명은 좌절됐다]

[그러나 조선 사절 민영익은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았다]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

 

 

 

수구파 민영익을 칼로 쳤으나 혁명은 좌절됐다

 

민영익의 변절과 갑신정변 

 

서울 종로에 있는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주최한 우정국 낙성 축하연이 벌어졌다. 개화파 인사로는 총판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가 참석했고 수구파로는 민영익과 한규직, 이조연, 민병석이 참석했다.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은 각각 친군영의 우영사, 전영사, 좌영사로 고종 친위대인 친군영의 핵심 사령관들이었다. 개화파는 이 파티장에서 정변을 일으켜 개화에서 수구로 변신한 민영익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쳤다. 도주한 한규직과 이조연은 그날 밤 궁궐에서 살해됐다. 미국을 함께 방문했던 보빙사 일행이 귀국하고 7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건물 앞 느티나무는 그날 밤 현장을 목격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박종인 기자

 

<지난 줄거리: 1884년 5월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한 보빙사 정사 민영익은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수행한 미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세계일주 내내 공자와 맹자 서적을 읽으며 문명세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귀국하던 날 서광범은 “민영익은 반(反)근대화로 간다”고 예언했다. 예언은 피바람 속에 실현됐다. 1884년 12월 4일 밤 서울 우정국 낙성식에서 보빙사 부사였던 홍영식과 그 무리들은 정사였던 민영익을 장검으로 난자했다.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민영익, 분열의 징조

 

공식 방미 일정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1883년 11월 두 팀으로 나뉘어 부사 홍영식 일행이 먼저 귀국하고 이듬해 5월 정사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가 세계 일주 후 귀국했다. 미국 대통령 아서는 전원에게 해군 함정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3명만 이를 수용했다. 왜 이들은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까.

 

전(前)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 윤효정이 쓴 ‘풍운한말비사’(1946)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 사촌형 민영소와 이규환, 지석영 등이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가 “홍영식이 죽어서 참 아쉽다”라고 했다. 그러자 민영소가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민영익한테 들었는데, 홍영식은 참으로 도량이 좁은 사람이다. 미국에서 민영익이 모피 옷을 고종에게 주려고 고르고 있는데 홍영식이 ‘왕실 인척이 그따위 상납 폐습을 못 벗다니!’하며 면박을 줘서 사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귀국해서 민영익이 궁궐에 들어가니 고종이 바로 그 옷을 입고서 ‘홍영식이 선물했다’고 자랑하면서 ‘너는 이런 진귀한 선물 없느냐’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때 홍영식 인간성을 다시 봤다고 한다.”(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풍운한말비사’)’, 다산초당, 2010, pp70~72)

 

민영익 사촌이 전한 말이니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던 사실은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홍영식과 민영익은 ‘워싱턴 체류 중 민영익이 사대를 고집하는 데 대해 홍영식은 독립 자주를 역설한 결과 정견의 충돌을 보았고, 마침내 동서로 길을 나눠 고국에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홍영식은 독립당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다.’(민태원, ‘김옥균 전기’, 을유문화사, 1969, p73)

 

왕실 실세가 사신단 정사(正使)로 떠나는 전근대적 시스템에 따라 젊은 여흥 민씨 실세 민영익은 보빙사 단장이 됐다. 한계는 명확했다. 권력은 고종·민씨 척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권력을 분산시키고 구체제를 엎겠다는 서구적 근대화는 민영익 개인은 물론진영적으로수용 불가능한 미래였다.

 

보빙사 정사 민영익(앞줄 왼쪽)과 부사 홍영식(앞줄 오른쪽), 그리고 종사관 서광범(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서광범 오른쪽은 이들을 미국에서부터 수행했던 미해군 소위 조지 포크, 왼쪽은 일본~미국~조선 전 일정을 수행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 민영익은 홍영식과 서광범을 위시한 갑신정변 개혁파에 의해 처단 대상으로 낙인이 찍혔다. 포크는 조선에서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했고 로웰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저서를 남긴 뒤 세계적인 천문학자가 됐다./미국 밀워키대 미국지리학회 컬렉션

 

누란(累卵), 계란이 쌓이다

 

징조는 현실로 변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에 의해 청나라식 근대화를 시도하던 고종 정권은 민영익 귀국과 함께 본격적인 청나라식 개혁에 착수했다. 봉건체제를 그대로 두고 서구식 기술을 도입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개혁이다. 환장(換腸)’, 막부를 갈아엎고 창자까지 갈아끼우는 일본 메이지유신과 질적으로 다른 길이었다.

 

1884 음력 5 2 민영익은 귀국 보고를 하기도 전에 이조참판에 임명됐다. 인사권을 장악한 것이다. 7월 2일 민영익은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금위영 대장에 임명된 데 이어 8월 26일 새로 개편된 고종 친위부대 친군영 우영사(사령관)에 임명됐다. 개화파가 이좌녕(李左侫, 왼쪽 아첨꾼)이라 부르는 이조연이 좌영사에, 윤우호(尹右狐, 오른쪽 여우)라고 부르는 윤태준이 후영사에 임명됐고 또 다른 수구파 한규직이 전영사에 임명됐다.(1884년 음8월 26일 ‘고종실록’, 1883년 11월 2일 ‘윤치호일기’) 우영사가 된 민영익은 이틀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10월 2일 기기국 총판에 겸직 임명됐다. 바야흐로 군부 실세요 청나라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핵심이며 청나라식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 핵심이 되었다. 미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한 조지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1884년 9월 민영익은 개화파와 완전히 절연했다. 때로는 면전에서 서양인을 경멸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8월에는 한 고위 관리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기도 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No.128) 실현돼 가는 서광범의 예언에 개화파는 몸서리를 쳤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계란더미처럼, 개화파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다가오는 위기, 무르익은 기회

 

1년 반 전 제물포를 떠난 보빙사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홍영식은 차관 교섭을 위해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과 “군사 양성과 외국군 철군을 이루고 5년 뒤 거사하자”고 약속했다.(‘유길준전서’ 5권, 서조충정공(書趙忠定公), 일조각, 1971, pp. 263~265.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서울대 박사논문, 2015, 재인용)

 

그런데 보빙사가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883년 4월 한성판윤으로 활동하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됐다.(1883년 음3월 17일 ‘고종실록’) 박영효는 광주 남한산성에서 일본식 군사 500명으로 ‘교련소’ 부대를 양성하다가 그해 11월 6일 유수직에서 해임됐다.(같은 해 음10월 7일 ‘승정원일기’) 교련소는 즉각 친군영 전영에 강제 배속됐다. 애써 만든 군사력을 수구파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민비의 한마디에 나는 파면되고 양성했던 군병은 수구파 영솔하에 돌아가고 말았다.’(박영효, 1926년 6월 ‘신민’ 14, ‘갑신정변’. 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갑신정변, 재인용)

 

쿠데타에 필요한 무력이 급속도로 축소되는 와중에 청불전쟁이 터졌다. 1884년 8월 5일 오랜 영토 분쟁 끝에 프랑스 극동함대가 대만 기륭포대를 포격한 것이다. 이보다 석 달 전인 5월 청나라는 개전을 대비해 조선 주둔 병력 3000명 가운데 1500명을 봉천성(奉天城)으로 이동시켰다. 무력 개화 쿠데타를 진압할 군사력이 절반으로 감축됐다는 뜻이었다.

 

수구파가 던져놓은 위기감과 지옥문과 청불전쟁이 열어준 기회. “5 뒤에라고 일본에서 김옥균과 홍영식이 다짐했던 거사 시기는 자연스럽게 앞당겨졌다. 그리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 운명의 겨울밤이 도래했다.

 

지옥의 파티

 

미국에서 본 바대로, 보빙사 부사 출신 홍영식은 1884년 4월 우정총국 설립을 고종으로부터 윤허받고 책임자인 우정 총판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11월 19일 홍영식이 미국공사 푸트에게 말했다. “빛을 가리는 물건은 깨뜨려서 사방을 밝혀야 한다.”(1884년 11월 19일 ‘윤치호일기’) 파천황(破天荒)의 밤이 왔다.

 

1884년 12월 4일 서울 종로 우정국에서 낙성 기념 파티가 열렸다. 실내에 마련된 연회석에는 여러 외국 공사와 통역, 조선 정부 세무사 묄렌도르프가 초청됐다.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가 개화파로 참석했고 수구파로는 한규직과 민영익, 이조연이 참석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고종 친위대인 친군영 전-좌-우 영사, 바로 수구파 군사력을 장악한 군부 실세들이었다. 윤치호가 ‘여우’라고 비난했던 후영사 윤태준 또한 초청됐지만 마침 궁궐 당직이라 불참했다. 궁궐 동향 파악은 보빙사 수행원 변수가 담당했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은 우정국 바깥에서 대기했다.(김옥균, ‘갑신일록’ 1884년 12월 4일) 수구파에 징발당했던 광주 교습소 병력 일부가 쿠데타에 가담했다. 김옥균이 일본 도야마학교에서 길렀던 사관들은 ‘무슨 일이 닥치든 책임을 이행할 결심’으로 가담했다.(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갑신정변 회고록’, 신복룡 등 역, 건국대출판부, 2006, p235)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당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배치도.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들은 각국 공사들과 고종 정권 군부 실세인 민영익(친군영 우영사)과 이조연(좌영사), 한규직(전영사)을 초청해 제거를 시도했다. 민영익은 중상을 입고 살아났고 이조연과 한규직은 달아났다가 그날 밤 궁궐에서 살해됐다. 궁궐 당직으로 불참했던 후영사 윤태준도 함께 살해됐다.

 

안국동 민가 방화를 신호로 거사가 시작됐다. 개화파는 ‘물고기가 강이나 바다로 들어가듯 새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듯, 같은 성(姓) 가진 자들이 바글대는 쪽에 붙어버린’ 민영익을 칼로 난자했다.(서재필, 앞 책, p237) 그 겨울밤 우정국 주변은 피바다로 변했다. 그날 밤 고종을 찾아 창덕궁으로 간 정변 주도자들은 우정국에서 도주한 전영사 한규직과 좌영사 이조연, 뒤늦게 입궐한 후영사 윤태준을 고종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일찌감치 수구파로 전향한 내시 유재현도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1884년 음10월 18일 ‘고종실록’)

 

위기감에 쫓기고 기회에 대한 긍정적 확증편향 속에 실행한 쿠데타였다. 혁명은 실패했다. 개화파는 모두 죽었고, 산 자는 망명했다. 개화는 물거품이 됐다. 실세 민영익은 구사일생했다. 민영익은 고위직을 두루 섭렵한 뒤 을사조약(1905) 직후 중국으로 갔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914년 민영익이 상해에서 죽었다. 그 어느 언저리에서 아쉬운 순간이 잠깐 조선을 스쳐갔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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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사절 민영익은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았다

 

피라미드 앞 사무라이와 민영익 

 

1864년 2월 일본 막부가 파견한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이 이집트 스핑크스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본으로 밀려드는 세계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 개항 시기를 늦추려고 프랑스로 떠난 사절단이다. 협상은 실패했지만 사절로 파견된 이들 35명 사무라이들은 일본 근대화 일원으로 활약했다. 20년 뒤 미 해군 군함을 타고 피라미드를 찾은 조선 보빙사들은 동행했던 미 해군 소위 포크의 등반 제안을 거부했다. 포크는 “정사 민영익은 일정 내내 견문 넓히기를 거부하고 유교 경전을 읽으며 소일했다”고 기록했다./일본 요코하마미술관

 

<지난 줄거리: 1883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을 필두로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는 거대한 근대문명에 충격을 받는다. 민영익이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 정도로 충격이 컸지만, 귀국 보빙사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갔다. 실세 가운데 실세인 여흥 민씨 민영익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로 떠난 보빙사

 

1883년 10월 12일 미 대통령 아서 예방과 함께 조선 최초로 서방세계를 찾았던 보빙사 공식 방미 일정이 끝났다. 이날 아서는 정사 민영익에게 세계여행을 제안했다. 모든 것이 파격이었다. 배는 미 해군 함정 트랜튼호였고 모든 경비는 미 해군부 예산으로 지출했다. 해군 소위 포크(Foulk)가 대통령 명으로 이들을 수행했다. 부사 홍영식이 이끄는 1진이 귀국하고, 12월 1일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는 장장 6개월 동안 세계를 주유하고 이듬해 5월 31일 제물포로 귀국했다. 대서양 아조레스(Azores·포르투갈령)에서 로마와 런던, 파리, 카이로와 뭄바이, 싱가포르에 이르는 대장정. 모든 것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고 모든 경험이 처음 겪는 문물이었다. 그런데 그 여정 가운데 상당 일정이 이보다 20년 전 일본을 떠난 사무라이들 여행과 겹쳐 있었다.

 

피라미드의 사무라이들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일본은 4년 뒤인 1858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잇달아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본이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力國條約)이라 부르는 불평등조약들이다. 1864년 이들 조약에 규정된 요코하마 개항 의무 조항을 철폐하기 위해 막부는 협상단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들을 ‘요코하마 쇄항 담판사절단(横浜鎖港談判使節團·이하 요코하마 사절단)’ 혹은 ‘제2회 유럽 파견 사절’이라 부른다. 단장인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 이름을 따서 ‘이케다 사절단’이라고도 한다. 이미 2년 전인 1862년 일본은 포르투갈, 러시아 등과 맺은 조약 가운데 일부 조항 이행을 연기하기 위해 1차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요코하마 사절단은 1864년 2월 6일 프랑스 군함 르 몬제호에 올라 청나라 상하이, 인도,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나폴레옹 3세를 예방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이들은 수에즈 운하를 앞두고 이집트에서 11일을 체류하며 ‘관광’을 했다. 2월 28일 일행 35명 가운데 몸 상태가 나쁜 7명을 제외한 28명이 기자 피라미드에 오른 뒤 스핑크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촬영자는 근대 사진 선구자인 이탈리아계 영국인 안토니오 비아토였다. 사절단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교역항인 요코하마 폐쇄를 프랑스 정부는 결사반대했다. 대신 스핑크스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온 사무라이라는 모순적인 요소가 만든 기이한 풍경이 탄생했다.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찬 사무라이들이 피라미드 앞에서!

 

실패한 협상가, 근대의 아버지

 

27세였던 단장 이케다는 압도적인 서구 문명을 몸으로 목격하고 ‘해외에서 국욕(國辱)을 초래하기보다 조정에 쇄항의 잘못을 호소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뒤 교섭을 포기했다.(한철호, ‘메이지 초기 일본 외무성 관리 다나베 다이치의 울릉도·독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19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 대신 이케다는 물리학, 생물학, 섬유, 농업, 양조 분야 서적을 구입해 귀국했다. 이후 이케다는 큰 공식 활동 없이 1879년 죽었다.

 

그런데 저 스핑크스 앞 사무라이들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이케다와 함께 100일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던 다나베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영토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871년 메이지정부가 미국과 유럽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에도 1등 서기관으로 참여해 견문을 쌓았다. 1876년 조선 수신사 김기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변태일(田邊太一)도 전에 외무대승으로 있었는데, 외국 학문을 잘 알고 세계에 가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다고 하였다.’(김기수, ‘일동기유’ 2권, 결식 34칙) 다나베는 훗날 한·일 독도 분쟁에 일본 측 논리 메이커가 됐다. 그리고 마스다 다카시(益田孝).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을 실질적으로 창업하고 ‘일본경제신문’ 전신인 ‘중외상업신보’를 창간했다. 근대 세계와 마주친 충격이 실패한 협상가들을 근대적 프로페셔널로 변신시킨 것이다

 

1864년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단장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파리에서 촬영). 파리에서 근대문명을 목격한 뒤 쇄국 담판을 포기하고 근대화를 택했다. 27세였다. /위키피디아

 

조선 사절단, 피라미드에 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한 지 만 8년 만인 1884년, 그 조선 사절단이 이집트로 갔다. 일본 요코하마 사절단 또한 1854년 개항 후 10년 만에 피라미드를 봤다. 개항에서 목격까지 불과 2년 차이지만 충격은 조선보다 덜했다. 이미 임진왜란(1592년) 전 일본은 포르투갈 신부를 통해 유럽과 교류를 시작했다. 1582년에는 신부들을 따라 10대 청소년 4명이 왕복 8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렇기에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19세기 일본이 서구문명을 대하는 자세에는 여유가 있었다.

 

미국 정부 호의로 세계를 여행한 최초의 조선인,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는 어땠을까. 12월 1일 뉴욕을 떠난 트랜든호는 대서양에서 풍랑을 만났다. 이들을 수행했던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극도로 공포에 질려 자거나 먹거나 누우려 하지 않았다.’ 민영익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면 배를 갈아타고 속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29권, 한국사상사학회, 2007) 이에 대해 포크는 “친구에게서 받았던 담배를 던져버리는 행위”라며 대통령 호의를 저버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유럽 대륙에 상륙한 일행은 파리와 런던, 로마를 둘러보고 2월 29일 이집트 수에즈에 도착했다. 이때 이들이 카이로에서 피라미드를 보았다. 이집트 고대 문명을 처음으로 목격한 조선인 3명이다.

 

이들은 세계여행에 대해 단 한 글자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동행한 미국인 포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들은 고대인이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직접 올라가거나 들어가 구경하는 것은 거부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거대 구조물을 대면하고도 너무나도 성리학적인 예법으로 호기심을 누르고 애써 외면한 것이다. 이런 태도를 ‘뉴욕타임스’는 “마치 놀라운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무엇을 보든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1883년 11월 8일 ‘뉴욕타임스’. 홍사중, ‘상투 틀고 미국에 가다’, 홍익사, 1983, p169) 1897년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인은 놀라움과 함께 실행해 보겠다는 야심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글을 쓰기도 했다.(홍사중, 앞 책, p169)

 

대신 민영익은 인도 뭄바이를 거쳐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 현지 소승불교와 조선 대승불교를 두고 승려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고 포크는 기록했다.

 

1883년 조선 보빙사 정사 민영익. 미국 상업사진관에서 서양식으로 팔짱을 끼고 포즈를 취한 민영익은 귀국 후 수구파로 변신했다. 23세였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서광범의 예언 “그는 돌아서리라”

 

미국에 상륙해서 세계를 주유하고 조선으로 복귀할 때까지 8개월 동안 이들을 밀착해서 관찰한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이 세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다. 민영익은 자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오래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는 소심하고 변덕이 심하다. 슬프게도 그는 견문과 각성이라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기회를 외면하고서 여행 내내 조선에서 가져온 유교 책들을 붙잡고 읽고 있었다. 반면 서광범과 변수는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사와 진보에 대해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노트하는 데 지칠 줄 모르도록 열심이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1884년 5월 마침내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한성으로 올라가면서 서광범이 포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민영익이 무엇을 했고 무슨 대접을 받았든 정확하게 그 반대로 행동하리라고 본다. 유교적 교육과 가문의 신분적 본능(hereditary instinct)이 가르쳐준 바대로, 그는 틀림없이 중국 방식을 좇아 반(反)서구 근대화로 나아가리라.”(포크, 앞 편지)

포크의 관찰과 서광범의 예언이 맞았다. 귀국 반년 만에 보빙사 부사 홍영식이 주최한 우정국 개국 잔치에서 정사 민영익이 개혁의 적으로 난자당한 것이다. 왜?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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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

 

함께 신세계를 봤으되, 너무나도 달랐던 그들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 일행. 윗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역관 고영철, 수행원 변수. 아랫줄은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과 미국인 고문관 퍼시벌 로웰. 보빙사는 구체제를 유지하고 서구 기술을 도입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근대화 작업이었다. 이 가운데 현흥택은 민비 암살사건을 목격한 뒤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려는 춘생문 사건에 개입했다. 최경석은 미국으로부터 근대 농법을 도입해 뚝섬 일원에서 농장을 시험하다가 요절했다.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고영철은 지방관을 두루 역임했다. 변수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대학 졸업 조선인 1호’가 됐다. 기차 사고로 죽었다. 홍영식과 서광범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 실패로 홍영식은 거리에서 처형됐고 서광범은 망명을 떠났다. 수구파로 변신한 민영식은 갑신정변 때 정변파에 의해 난자당했다가 살아나 훗날 중국 상해에서 죽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들이었다./미국의회도서관 

 

근대화라는 폭풍우 그리고 기회

 

19세기 후반은 지구 곳곳에 근대화라는 폭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과학혁명(16세기)과 시민혁명(17~18세기)에 이어 산업혁명(18~19세기 초)이라는 세 가지 대전환을 이뤄낸 유럽이 순식간에 아시아를 압도하던 때였다. 아시아에서는 서구화가 곧 근대화라는 등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변신하던 중이었다.

 

청나라와 조선 또한 근대화 폭풍 속 생존 방법을 모색한다.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는 서구 문물 도입 작업에 착수했다. 옛 체제는 그대로 두고 서구 기술을 도입해 개혁을 이루겠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식 개혁작업이었다. 조선 또한 일본(1876)에 이어 미국(1882)과 수교하고 서구 문물 도입을 통한 개혁 작업에 들어갔다. 이 또한 구체제를 유지하는 동도서기 근대화였다.

 

그 가운데 핵심 작업이 바로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다. 조미수호 이후 미국에서는 조선에 공사관을 개설했고 조선은 상설공사관 대신 사신을 파견했다. 문을 닫고 살던 조선 왕국에 500년 만에 굴러온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좌절과 변신 이야기.

 

태평양으로 떠난 그들

 

1883년 5월 19일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Foote)가 조선에 부임했다. 신분은 특명전권공사, 그러니까 영사나 총영사보다 높은 지위였다. 조선을 끝까지 ‘속방(屬邦)’으로 묶어두려는 청나라를 견제하고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과시한 신분이었다. 서울 정동 현 미대사관저 부지에 공사관을 개설한 푸트는 사절단 파견을 조선 정부에 제의했다. 7월 9일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해 사절단장인 전권대신에 민영익(泳翊), 부대신에 홍영식(洪英植), 종사관에 서광범(徐光範)을 임명했다.(1883년 음6월 5일, 6일 ‘승정원일기’)

 

속속 임명된 사절단원은 이러했다. 수행원 유길준(俞吉濬)과 변수(邊燧), 무관 최경석(崔景錫)과 현흥택(玄興澤), 역관 고영철(高永喆). 그리고 중국어 통역관 오례당(吳禮堂), 미국인 고문 퍼시벌 로웰(Lowell)과 로웰의 일본어 통역관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 그리고 미국 현지에서는 조선과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미해군 소위 조지 포크(Foulk)가 안내를 맡았다.

 

7월 16일 이들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공격했던 미 해군 함정 모노카시(Monocacy)호를 타고 제물포에서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15일 이들은 2년 전 영국 리버풀에서 진수한 증기 여객선 아라빅(Arabic)호로 갈아타고 동쪽 망망대해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500년 동안 숨어 살던 조선인이, 태평양을 건너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3년 9월 29일자 주간지 ‘레슬리 일러스트’ 표지(왼쪽). 9월 18일 보빙사 일행이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를 예방하면서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을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보빙사 일행은 문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정사 민영익이 인사말과 고종 친서를 읽었다. 함께 절을 한 사람은 민영익(정사), 홍영식(부사), 서광범(종사관)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운명은 이듬해 극적으로 달라진다./미국의회도서관 

 

미국 도착부터 귀국까지

 

1883년 9월 2일 500년 먹은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독립한 지 100년이 갓 넘은 나라,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워싱턴을 거쳐 일행은 9월 17일 뉴욕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이 호텔 대접견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를 만났다. 화려한 비단 관복을 입은 일행은 접견실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로 예를 표한 뒤 방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절을 했다.(1883년 9월 29일 ‘레슬리 일러스트’지) 국서 제정 의례가 이어지고 이후 이들은 보스턴을 위시한 동부 산업단지와 뉴욕 공장,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우체국을 견학했다. 유길준이 “악마(devil)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던” 전깃불도 그때 처음 목격했다.(1883년 10월 15일 ‘뉴욕타임스’. 김원모, ‘개화기 한미교섭관계사’, 단국대출판부, 2003, p528 재인용) 홍영식은 우체국에, 최경석은 농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해 말 부사 홍영식을 포함한 1진이 먼저 귀국하고 1884년 6월 2일 정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했다. 먼저 귀국한 홍영식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신 빛 속에 있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성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이듬해 귀국한 2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1884년 6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정사 민영익이었다. 왕비 민씨 친족으로 실세 가운데 실세. 그 실세가 광명 속에서 발견한 충격. 두 가지가 결합하면 이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는 시간 문제였다

 

보빙사 일행이 아서 대통령을 만났던 뉴욕 5번가호텔(The Fifth Avenue Hotel). /뉴욕시립도서관

 

귀국한 그들, 엇갈린 운명

 

수행원 유길준은 정사 민영익이 배려해 상투를 자르고 미국에 남아서 공부했다. 국비 유학생으로는 조선인 1호였다.

 

무관 현흥택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까지 무관으로 일했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 암살 사건 때 현흥택은 경복궁에서 왕실 친위 부대인 시위대 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중상을 입었다. 이 을미사변을 계기로 현흥택은 근왕파로 변신했다. 11월 28일 벌어진 춘생문 사건에도 간여했다. 춘생문 사건은 미국인 선교사, 친러·친미 관료와 군인들이 을미사변으로 공포에 싸인 고종을 경복궁 외부로 빼내려던 사건이다.(1895년 양11월 15일 ‘고종실록’)

 

무관 최경석은 미국 보스턴에서 여러 농장을 견학한 뒤 미국 농무부로부터 각종 신품종 종자와 농기술 서적을 선물받았다. 1883년 1진으로 귀국한 최경석은 정부로부터 망우리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농지로 허가받고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했다. 시험장에서는 재래종과 도입종을 비교해서 재배하며 근대 농법을 연구했다.(‘신편한국사’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농무목축시험장과 농무학당’) 미국에 연장 체류 중이던 민영익은 각종 근대 농기구를 수입해 시험장에 보냈다. 1885년에는 소와 말 같은 가축도 미국 품종이 제물포를 통해 시험장에 수입됐다. 암말 2필, 종마 1필, 젖소 2필, 황소 1필과 돼지, 양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1886년 의욕 넘치던 농장 관리자 최경석이 갑자기 죽었다. 이후 농장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폐쇄됐다.(김원모, ‘견미 조선보빙사 수원 최경석, 오례당, 로우엘 연구’, 동양학 27집, 건국대동양학연구소, 1997)

 

역관 고영철은 이후 외국어와 상관없는 지방 군수직을 다수 맡으며 살았다. 대대로 역관 집안인 고영철에게는 형제가 셋 더 있었는데 모두 역관이었다. 그 가운데 둘째형 고영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공사와 연을 맺었다. 이후 승승장구한 고영희는 1910년 탁지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부사 홍영식은 귀국 이듬해 우정총판(郵征總辦)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그해 12월 본인이 주관한 우정국 개원 기념 파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도 가세했다. 수행원 변수도 가담했다.

 

갑신정변은 외부로는 대청(對淸) 사대 청산과 자주, 내부로는 전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목표였다. 그때까지 고종 정권이 추진하던 ‘동도서기’식 근대화, 그러니까 옛 체제에 대한 개혁 없이 서구 기술만 도입하겠다는 근대화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홍영식은 1883년 보빙사로 떠날 때 도쿄에 한 달 체류하면서 김옥균과 만나 정치 개혁을 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옥균은 차관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고, 홍영식은 정사 민영익 눈을 피해 김옥균과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다.(‘유길준전서’5, 일조각, 1971, pp. 264~265.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문학과지성사, 2004, p76 재인용)

 

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홍영식은 무당 진령군이 살던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됐다.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집 또한 피칠갑이 된 채 흉가로 남았다. 훗날 고종의 정치고문이 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고종 윤허 속에 그 집에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했다.

 

서광범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귀국해 갑오개혁정부 대신이 됐다. 이어지는 파행 정국 속에 서광범은 주미특명전권공사로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수행원 변수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메릴랜드대 농과대에 입학했다. 1891년 변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모교 앞에서 열차사고로 죽었다. 모교에는 그를 기리는 ‘변수 룸’이 있다.

 

개혁의 키맨, 민영익의 변신

 

구체제 타도’라는 정변 목적을 달성하려면 구체제 실세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민영익이었다. 정변 기획자들은 민영익을 우정국 개원 잔치에 초대한 뒤 칼로 난자했다. 사망 위기까지 갔던 민영익을 대수술로 살려준 사람이 미국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이었다. 광혜원은 이 왕비 민씨 조카를 살려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누구는 훗날 근왕파로 변신했고 누구는 급진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구는 민생을 위한 농업 혁신을 준비하다가 황망히 죽었다. 그리고 민영익, 그 모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는 이렇게 처단의 대상이 돼 버렸다. 어쩌면 조선 망국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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