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②위선의 희생, 의순공주] [신축 조약]

뚝섬 2021. 3. 31. 06:11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②위선의 희생, 의순공주

 

[박종인의 땅의 歷史]

1650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 ”공주 보내라”며 혼인 요구
딸부자 효종은 관료-종친 딸 가운데 물색

정2품 이상 고관대작들 ”딸 어리다” “혼인했다” 거부
淸사신 “2품 이상 200명인데 후보자가 4명밖에 안되나?”

비변사 “한낱 여자 희생시켜 국난을 풀 수 있다면!”

10촌 종친 금림군 이개윤 ”내 딸이 아름답다” 자청
효종, 양녀로 삼아 보내며 ”촌수 꼭 외우라” 당부

의정부 족두리산소에는 의순공주 자결하고 족두리 묻었다는 전설

 

경기도 의정부 금오동에 있는 '족두리 산소'. 금오동 사람들은 무덤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1650년 청나라 친왕 도르곤에게 강제로 시집간 의순공주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 투신자결하고 족두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추모하며 꽃다발을 가져다놓았다. 17세기 남정네들의 무책임한 위선은 많은 여자들을 불합리한 억압 속으로 몰아넣었다./박종인 

 

온 백성이 오랑캐에게 끌려간 사이 많은 권력자들은 자기 가족 안위를 챙겼다. 자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삼공육경(三公六卿: 현직 정승과 판서)은 앞 다퉈 사표를 냈다. 난세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은 약자다. 가난하고 권세 없는 백성이 그 첫째다. 그리고 17세기 또 다른 희생자가 있으니, 여자(女子)였다. 오랑캐에게 한 번, 가짜 도덕군자들에게 한 번.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②위선의 희생, 의순공주

 

청나라 도르곤의 청혼

 

1650년 봄날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수행원 나업이 왕에게 이리 보고하였다. “상처(喪妻)한 구왕(九王)이 조선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저들이 모두 안다. 혼인이 성사되면 대국에서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놀란 왕에게 나업이 말을 이었다. “현재 공주가 두 살이라 하니 저들이 ‘종실 여자 가운데 선택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1650년 3월 5일 ‘효종실록’)

인조를 이어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였다. 함께 청나라 심양 인질 생활을 하며 개방과 교린을 꿈꿨던 형 소현세자와 달리 효종은 대청 복수심을 잔뜩 키워온 왕이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따위가 내 딸을?

 

구왕 도르곤(多爾袞·이하 도르곤)은 청 태종 홍타이지 이복동생이다. 1644년 북경을 함락시켜 명나라 마지막 숨통을 끊은 사람이 이 도르곤이었다. 1643년 홍타이지 사후 그 아들 푸린(福臨)이 아홉 살에 황위에 오르자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으로, 황숙부섭정왕에 이어 황부섭정왕으로 격을 높여가며 권력을 강화해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그 오랑캐 권력자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미 두 달 전인 1월 28일 도르곤은 조선에 여자 간택을 위해 관리를 파견했다.(1650년 1월 28일 ‘세조장황제실록’) 그 관리가 조선 사신과 함께 와서 대기 중이었다.

 

‘두 살 먹은 딸이 있다’는 나업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효종은 딸부자였다. 여섯은 왕비 장씨 소생이고 하나는 후궁 안빈 이씨 딸이었다. 요절한 맏딸과 결혼한 둘째를 제외하고 모두 미혼이었다. ‘경국대전’은 여자 적령기를 14세로 규정하고 있지만 13세 이하라도 논의에 따라 혼인이 가능했다.(‘경국대전’ 예전 ‘혼가(婚嫁)’) 그때 셋째 숙명공주는 열 살이었다. 1651년 이조참판 심지원 아들 심익현과 혼인할 때 숙명공주는 열한 살이었다.

 

이틀 뒤 청나라 칙사가 효종을 독대해 섭정왕 칙서를 바쳤다. ‘왕 누이나 딸, 혹은 근족이나 대신 딸 중 정숙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자(淑美懿行者·숙미의행자)를 택해 보내라.’(1650년 3월 7일 ‘효종실록’)

 

군주(君主)는 안도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자기 딸은 지켰다는 군주의 이기심이 불 댕긴, 자기 자식은 죽어도 인질로 못 보내겠다며 정승과 판서 자리를 던졌던 도덕군자들의 위선 전쟁.

 

없다가 자꾸 나타나는 딸들

 

3월 12일 효종은 비변사에 정2품 이상 관리들을 소집하라 명했다. 느닷없는 소집령에 한성 전체가 밤새 시끄러웠다. 이튿날 2품 이상 문신과 음서직(고위직 아버지를 통한 특채 관직)을 조사한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성 좌윤 허계 딸 외에는 다 결혼했거나 어리거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비변사가 무신까지 확대해 재조사하니 판돈령 민형남 손녀, 호조참판 여이재와 양원군 허선의 딸과 무신인 행호군 박심의 딸이 나왔다.

 

오전에는 없었던 문신 여식이 셋이 나온 것이다. 무신 박심의 딸을 대상에서 제외한 비변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네 명'만으로는 시늉만 했다고(塞責·색책) 비난받을까 두렵다.” 과연 청나라 사신들이 따졌다. “2품 이상 녹을 먹는 자가 200인 이상인데 선발된 수가 이와 같이 적음은 무슨 일인가. 품계와 무관하게 여자를 고르라.”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낱 여자를 희생시켜(捐一女子·연일여자) 국난을 풀 수 있다면 신하로서 사양할 바가 아니다. 숨겼다가 드러나게 되면 사법처리하라고 명하시라.”(이상 1650년 3월 13일 ‘비변사등록’)

 

결국 비변사는 문무관과 음서직 3품 이상으로 확대해 처녀 40명과 종실 처녀 16명을 골라냈다. 3월 14일 처녀들을 면접한 청나라 사신들이 말했다. “하나같이 못생겼다. 우리를 시험하는 것인가?”

3월 20일 청 사신 파흘내 일행과 조선인 역관 정명수가 창덕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에는 종실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 나온 파흘내가 말했다. “열여섯 먹은 여자는 행장을 꾸리고 열세 살 여자는 대기시키라.” 마침내 도르곤 아내가 간택된 것이다.

 

청나라로 시집간 의순공주

 

조정에서 저렇게 난리를 피웠지만 청나라로 보낼 처녀는 일찌감치 간택돼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효종을 독대하고 이틀 뒤, 종실 관리부서인 종부시 제조 오준이 효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찍이 성상 하교를 듣고 금림군(錦林君)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고 하였나이다.” 효종이 즉시 대답했다. “이미 선택하여 들어오게 하였다(昨日已令選入矣·작일이령선입의).”(1650년 3월 9일 ‘효종실록’)

 

금림군 이개윤은 왕실 제사 담당관인 대전관(代奠官)이었다. 효종과 10촌지간이었다. 모두가 자기 딸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이개윤은 혼사에 관한 ‘성상의 하교를 듣고’ 자기 딸 자랑을 했다는 뜻이었다.

 

3월 20일 청나라 사신들이 창덕궁 내전에서 간택을 하고 나온 열여섯 먹은 처녀가 바로 ‘자색이 있는’ 금림군의 딸이었다. 닷새 뒤인 3월 25일 효종은 금림군 딸을 의순공주로 삼았다. 금림군은 품계를 올려주고 비단과 쌀과 콩을 후하게 내렸다.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났다. 효종은 한성 서쪽까지 나가서 그녀를 배웅했다. 시녀 열여섯 명과 여의(女醫), 유모가 호종했다. 도성 백성이 모두 비참해 하였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누가 묻거든 이리 대답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1650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 효종과 10촌 형제뻘이던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했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5월 1일 의순공주 오라비 이준과 이수가 인조릉인 장릉 종9품 참봉과 행사용 장막 관리부서 전설사 종8품 별검에 임명됐다. 금림군은 청황실에서 보낸 채단 40필과 은 1000냥을 받고 4년 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떠났다.

 

국가와 왕실을 위한 충정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100여 년 뒤 고증학자 이긍익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함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채폐(采幣·혼인 선물)가 많음을 탐낸 것이다. 개윤은 집이 극히 가난했는데 부자가 되었다.’(‘연려실기술’ 효종조고사본말 경인년 3월)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청나라 요구도 요구지만,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도 문제라며 효종은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1650년 3월 23일 ‘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인천시 강화도 해변에 펼쳐진 나문재나물. 해변을 붉게 수놓은 나문재나물은 병자호란 때 백성을 죽음으로 처넣은 한성판윤 김경징 이름을 따 ‘경징이풀’이라고도 불린다.

 

불쌍한 경징이풀, 그리고 위선

 

13년 전인 1637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강화도를 지킨 부대장은 한성판윤 김경징이다. 그런데 김경징은 김포에서 자기 가족 친지만 배에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빈궁이 외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사람들이 적병에 차이고 밟혀 끌려가거나 빠져 죽어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김경징의 아들 진표는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잇달아 자결했다. 일가친척 부인들도 모두 자결했다.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나물이 자라는데, 사람들은 그 나물을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환향녀(還鄕女)라 부른다. 1638년 끌려갔던 신풍부원군 장유 며느리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며느리와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불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실록은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1638년 3월 11일 ‘인조실록’)

 

환향녀와 천보산 족두리 산소

 

1650년 12월 의순공주를 ‘흰 소나무를 닮은 매(白松鶻·백송골: 성해응, ‘연경재전집속집’ 15)’라 반겼던 도르곤이 죽었다. 청실록은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형 단중친왕 보로(博洛)에게 개가했다고 기록했다. 단중친왕마저 죽자 동지사로 갔던 아버지 이개윤이 황제에게 청하여 딸을 데려왔다.(1656년 2월 19일 ‘청실록’) 공주는 도르곤 목소리를 듣고자 무당을 부르며 살다가 죽었다.(1662년 8월 18일 ‘현종실록’, 이덕무, 청장관전서 69권, ‘의신공주’)

 

1948년 소설가 이광수는 ‘인조가 “환향녀들은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들어오라”고 명했다’는 ‘회절강(回節江) 신화’를 만들어냈다.(이광수, ‘나의 고백, 홍제원 목욕’, 이명현, ‘환향녀 서사의 존재 양상과 의미’, 동아시아고대학 60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재인용) 수필에서나마 옛 여자들 한을 풀어준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의정부시 금오동 산45-21, 산장아파트 뒷산이다. 사람들은 이 묘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무책임한 남정네들 위선이 만들어낸, 측은한 전설. <다음 주 계속>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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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조약

 

120년 전 청나라의 굴욕 조약… 사실상 서양 식민지 전락

 

①중국 관영 매체 인민일보가 1901년 신축조약 모습과 올해 미·중 회담을 비교해 올린 사진입니다. ②의화단원들이 철도를 파괴하는 모습을 프랑스 신문‘르 프티 파리지앵’이 보도했어요. ③당시 중국에서 돌았던 ‘서양인을 죽이라’는 내용의 격문입니다. /인민일보 웨이보·위키피디아

 

미국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첫 미·중 고위급 회담이 지난 18~19일 알래스카에서 열렸습니다. 미국과 중국 대표가 모여 기후변화 등 국제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요. 미국 측은 중국의 사이버 공격과 미국 동맹국에 대한 경제 보복 등을 거론하며 중국이 국제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어요. 중국 측은 미국이 주장하는 가치가 국제사회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이 회담을 보고 중국에선 미국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통쾌하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합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오늘의 중국은 1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외국 열강이 대포 몇 방으로 중국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영영 지났다"고 했어요. 중국이 1901년 미국 등과 맺었던 굴욕적 신축 조약과 알래스카 회담을 비교해서 말한 건데요. 1901년과 알래스카 회담이 열린 올해 모두 신축년(辛丑年)이에요. 신축 조약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중국의 반(反)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 중국과 체결한 조약이에요. 이후 중국은 서양 열강에 의해 한동안 식민지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고, 중국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외세에 반발해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어요

청나라는 영국과 싸운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제국주의 열강과 난징 조약, 톈진 조약 등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나라를 개방했어요. 동시에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는 등 많은 이권을 포기해야 했죠. 또 기독교를 허용하면서 많은 선교사가 서양 세력의 힘을 업고 청나라 곳곳에 교회를 세웠어요. 이후 청나라는 일본과도 전쟁해 패배하면서 동아시아 강국의 지위를 일본에 내줬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서양 열강과 일본에 의한 경제 침탈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지요. 이로 인해 외국 사람과 문화, 사상 등을 배척하는 감정이 깊어졌죠.

그 당시 생겨난 비밀 종교 조직이 의화단(義和團)입니다. 의화단은 무술 권법인 의화권을 수련하면 총에 맞아도 끄떡없다고 믿는 단체였지요. 1898년 극심한 가뭄이 들자 많은 농민이 이 단체에 가입했어요. 1900년 의화단은 산둥 지방을 중심으로 '부청멸양'(扶淸滅洋·청을 도와 서양을 몰아내자)을 외치며 교회, 철도, 학교 등을 불태웠습니다. 외국인들과 외국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며 그동안 쌓인 분노를 표출했어요.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중국 전통이 파괴될 것이란 우려가 컸고, 선교사들이 식민 정책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죠.

미국 등과 굴욕적 조약을 맺었어요

의화단 세력은 베이징으로 가서 모든 외국 세력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외국 공사관이 모여 있는 지역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의화단원은 2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청나라에 의화단을 진압해달라고 했어요. 만약 청나라가 진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나서겠다고 했죠. 그런데 청 정부는 의화단을 이용해 서양 세력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오히려 의화단을 지지하면서 서양 세력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8국은 연합군을 꾸려 두 달 만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의화단 운동을 진압했어요. 자금성을 점령한 연합 세력은 청나라의 책, 천문 기구, 돈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어요. 그리고 1901년 청나라 정부에 굴욕적 조약을 요구했어요. 바로 신축 조약인데요. 의화단 운동의 주동자 처벌,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 허용, 중국에 대한 2년간 무기·탄약 수입 및 제조 금지 등의 요구가 담겼어요.

신축 조약엔 서양 열강과 일본 등에 은화 4억5000만냥(약 1만8000톤)을 배상하라는 내용도 있었어요. 당시 청나라 인구가 4억5000만명 정도였으니 한 명당 한 냥씩 배상해야 했던 것이죠. 청 정부는 한 번에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39년에 걸쳐 배상금을 나눠 갚기로 했어요. 이자까지 합쳐 약 9억8000만냥을 내야 했어요. 이로 인해 청 왕조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면서 통치 260년 만인 1912년 마침내 몰락하고 말았죠.

30년 넘게 빚을 갚아야 했어요

새로 성립된 중화민국은 청나라가 갚아야 할 배상금을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미국 등 연합국은 중국이 참전하길 바랐어요. 연합국은 중국이 전쟁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받아야 하는 신축 조약 배상금을 5년 동안 미뤄주기로 했어요. 1917년 중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답니다. 신축 조약으로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의 20%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분이었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국도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된 덕분에 패전국인 독일오스트리아에 주어야 할 배상금은 면제받았어요.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중국은 일본에 대해서도 배상금 지급을 중단했어요. 이로써 신축 조약을 맺은 1901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빚 갚기가 30여 년 만에 끝나게 되었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중국 유학생을 지원하는 등 중국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배상금 일부를 돌려줬습니다.

[칭화대학교]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는 베이징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명문 대학입니다. 이 대학은 신축 조약 반환금과 관련이 있어요. 미국은 신축 조약 이후 받은 배상금 중 일부를 중국에 돌려줬어요. 미·중 관계와 미국의 국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였죠. 반환금은 미국에서 공부할 중국 학생들을 위한 영어 교육 등 유학생 예비 교육을 하는 '유미학무처(游美學務處)'에 사용됐어요. 이 기관은 1928년부터 국립 칭화대학교로 확대됩니다. 칭화대는 저명한 중국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는데요. 중국 최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도 칭화대 출신이에요.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최원국 기자, 조선일보(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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