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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오랑캐 정신'] [ .... 여진족의 '大淸제국']

뚝섬 2023. 2. 24. 06:40

[사르후 전투]

['오랑캐 정신']

[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사르후 전투

 

조선·명나라 연합군 10만명이 후금 3만 병력에 大敗

 

①사르후 전투를 묘사한 17세기 그림. 후금의 기병(왼편)과 명의 보병(오른편)이 격렬히 싸우고 있어요. ②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초상. ③팔기군(八旗軍)이 늘어선 모습을 그린 그림. ④국립진주박물관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단편영화 ‘사르후 전투’의 한 장면. /위키피디아·국립진주박물관

 

지난 8일 경남 국립진주박물관은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단편 영화 '사르후 전투'의 조회 수가 100만을 돌파했다고 밝혔어요. 조회 수 100만 돌파는 국립박물관 첫 사례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어요. 이 작품은 기존 영상과 달리 전문 작가의 시나리오, 적절한 컴퓨터 그래픽 활용, 정교한 고증을 거친 소품, 현직 연극배우 섭외 등의 노력을 기울여 작품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으로 알려졌죠. 그렇다면 '사르후 전투'는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요?

후금(後金)의 등장

사르후 전투는 1619년 무순(撫順·현재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일대에서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후금군이 벌인 전투예요. '사르후(薩爾滸)'는 무순 근처의 지명을 뜻해요. 이 전투는 광해군이 중립 외교의 한 사례로 알려져 있죠. 조선은 명에 사대의 예(禮)를 행해야 했기에 원군(援軍)을 파병했으나, 떠오르는 강자였던 후금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후금에 항복했어요. 이 전투는 한국사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역사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후금이 대승(大勝)을 거두며 만주 지역을 장악하는 기점이 됐으니까요.

후금을 세운 만주족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2~13세기 금나라를 건설했던 여진족을 만날 수 있어요. 금나라는 고려를 위협하고 거란을 무너뜨릴 정도로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강력히 지배했죠. 하지만 금나라는 몽골에 멸망했고,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무너진 이후에도 여진족은 여러 집단으로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어요. 그러던 중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나타나 1616년 다시 여진을 통일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세운 나라는 금(金)나라를 이었다고 해서 '후금(後金)'이라고 불러요.

후금은 명나라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어요. 누르하치는 1618년 명나라에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고 주장하며 전면전을 선포했는데, 강력한 후금 군대를 마주한 무순성은 바로 항복했죠. 누르하치는 훗날을 대비해 무순성을 파괴하고 주민도 모두 포로로 끌고 갔어요. 그런데 사실 이때 누르하치의 목적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었지,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건 아니었어요. 후금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교역로를 확대하고 포로를 확보하려고 했죠. 포로를 확보하면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교역의 요충지였던 무순성을 먼저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 후금에 대적하다

누르하치가 전면전을 선포하자 명나라는 몽골뿐 아니라 다른 이웃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했어요. 이때 조선은 강홍립·김응서·김응하 같은 장수를 포함해 약 1만3000 병력을 보냈는데, 이들 중 무려 3500명이 조총(鳥銃·긴 화승총) 부대 소속이었죠. 하지만 광해군은 원병을 보내면서도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총 10만여 병력으로 후금군에 대항했어요. 병력은 동서남북 군대 넷으로 분산돼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했죠. 조·명 연합군의 계획은 분산된 병력을 허투알라에서 다시 합쳐 우세한 화력으로 공성전(攻城戰·성이나 요새를 빼앗고자 벌이는 싸움)을 펼치는 것이었어요. 누르하치는 지세(地勢)에 밝고 전투력이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병력이 약 3만이었기에 수적으로는 조·명 연합군에 뒤졌어요. 그러나 누르하치는 엄청난 기동력과 정보력으로 네 군대가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하나씩 격파해 나갔습니다.

조·명 연합군의 서로군(西路軍)을 이끌던 두송이라는 장군은 총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일 먼저 후금군 공격에 나섰다가 크게 패했어요. 북로군(北路軍)을 이끌던 마림은 이 소식을 듣고 대비 태세를 갖췄으나 후금군에 격파당했죠. 남로군(南路軍)은 아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일단 후퇴했는데, 동로군(東路軍)은 미처 후퇴하지 못했어요. 후금군은 동로군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동로군에는 조선군도 포함돼 있었는데 조선군은 부차라는 지역에서 크게 졌어요. 이 지역이 평원이었기 때문에 기병이 강력했던 후금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고, 이 상황에서 모래바람이 불어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조총마저 무용지물이 되었죠.

결국 이곳에서 조선군은 약 900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조선군은 투항했습니다. 나흘 만에 네 군대 가운데 세 군대가 전멸한 거죠.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사르후 전투에서 군사 4만500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해요. 반면 후금군은 사망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명나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자 결정적인 패배였어요.

청(淸)으로 발돋움하다

승패를 가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명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서광계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참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분석했어요. 그는 당시 명군이 무기·작전·정탐 능력 등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후금군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고 신랄하게 평가했어요. 심지어 명군은 패전 책임도 지휘관 개인에게 떠넘겼다고 해요. 후금은 이 틈을 타 명군 지휘관들을 향해 '투항자를 우대한다'고 선포했고, 실제로 그들을 우대함으로써 많은 명군 지휘관이 후금에 투항해버렸죠.

후금에는 '팔기군(八旗軍)'이라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습니다. '팔기'란 여덟 깃발을 뜻하는데 한 기(旗) 아래에는 약 7500명 정도가 속해 있었어요. 이 조직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행정·사회 조직이었어요. 행정·납세·군역 모두 이 단위로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팔기의 구성원이 됐습니다. 언제든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펼칠 수 있는 이 군대는 후금이 성장하는 발판이 됐어요.

사르후 전투는 국제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놨어요. 명나라는 그 전까지 후금을 상대로 누려왔던 우위를 잃고 방어 자세로 돌아섰습니다. 반면 후금은 명나라를 바로 넘보는 우세한 위치를 확보했죠. 결국 1621년 요동(遼東)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고, 이후 청(淸)나라로 국호를 바꾼 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킵니다. 100여 년이 지난 후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사르후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이 지역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안영 기자, 조선일보(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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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정신'

 

만주족 누루하치와 홍타이지의 생존술, '강점극대화'

 

경제와 안보는 동전의 앞뒤 양면 같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안보는 불가능하고 안보가 미흡한 상태에선 경제 발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수와 수출이 동반 감소하고 보호무역 장벽과 자국 화폐 무제한 찍기(양적 완화)가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안팎의 최근 상황은 심상찮다. 이런 난국을 타개할 방책으로 '오랑캐 정신'의 회복과 발흥을 제안한다.

'오랑캐 정신'은 쉽게 말해 '강력한 상대방 국가나 기업의 위세에 주눅 들지 않고 끈질기고 강인하게 자신을 살찌워가는 생존술'이다. 야성(野性)과 도전, 실용이 중심 DNA이며, 순종과 안주(安住), 명분을 꺼린다. 400여년 전 100만명의 인구로 1억이 넘는 명(明)을 정복해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된 만주족 누루하치(청 태조)와 그의 8남인 홍타이지(태종)가 대표적인 실천자다.

두 사람은 당대 조선보다 더 가난하고 춥고 척박한 만주라는 환경에 좌절은커녕 자신의 강점 극대화에 집중했다. 인삼 재배를 통한 은(銀) 대량 유입, 기동력 넘치는 철기군(鐵騎軍) 육성, 내핍과 검약 기풍 확산…. 이들은 구습(舊習)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하고 담대한 리더십과 스피드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1960년 초부터 본격화된 우리나라의 경제 도약도 '오랑캐 정신'의 산물에 가깝다. 사대(事大) 명분에 빠져 500여년 중화 숭배와 사농공상(士農工商) 관념에 사로잡힌 주자학적 세계관을 벗어던지고 세계무대로 뛰어들어 야성적 도전으로 쟁취한 결과인 것이다. 1969년 1월 종업원 36명의 변방 삼류 회사로 출발해 43년 만에 연간 매출 200조원이 넘는 세계 1위 종합 IT기업이 된 삼성전자는 '한국판(版) 오랑캐 정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삼성그룹의 연간 매출은 미국 대기업인 보잉과 마이크로소프트(MS), 스타벅스 등 3개사의 매출액 합계보다 더 많다. 많은 전문가는 "한국이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5개 정도만 더 갖는다면 세계 2·3위 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경제는 물론 안보적으로도 한국을 넘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년 전부터 우리 안의 '오랑캐 정신'은 급격히 쇠퇴하고 주자학적 망령(亡靈)이 다시 똬리를 틀고 있다. 1인당 연간 소득 3만달러도 안 되는 상태에서 "성장보다 분배에 힘써 양극화 없는 평등 사회를 만들자"는 경제 민주화론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기업가 정신은 식고 7·9급 공무원과 공기업·의과대학 인기가 매년 하늘을 찌른다. 안정과 순응, 폐쇄를 고집하다가 망국에 이른 조선시대의 부활이다.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우리 경제의 성장판은 확실하게 닫히고 선전(善戰)해온 몇몇 기업조차 숨 막히는 국내 규제·간섭과 외국 경쟁자들의 공세에 협공당해 쪼그라들 가능성이 크다. 중국과 일본이 자율주행차·드론·차세대 반도체 같은 미래 신성장 분야에서 벤처 정신으로 한국 대반격과 추월에 나선 데다, 중국의 사드 압박이 노골화되는 것도 위협적이다.

홍타이지는 말했다. "나라 크기와 인구 숫자로 상하(上下)가 정해지는 게 아니다. 꿋꿋한 의지와 실력이 있다면 작은 것도 큰 것에 능히 맞설 수 있다." 안보는 물론 경제에서도 '오랑캐 정신'은 2016년 우리가 품어야 할 결기일 것이다.

-송의달 조선비즈 대표, 조선닷컴(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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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민족이 중국대륙에 건설한 마지막 나라, 여진족의 '大淸제국'

 

['大淸제국']

 

북방민족 여진이 세운 나라「淸」의 기원과 흥망

16세기말 임진왜란과 반란·부패 등으로「明」의 국력이 쇠퇴일로를 걷는 가운데 만주일대에서는 해서·건주·야인 등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건주여진의 영웅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 흥경(요녕성 신번)에서 ‘칸’으로 즉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고 이것이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金」을 이은 후금이다. 누르하치는 이름이며 성은 아이신줴러(愛新覺羅)다. 만주어에서 아이신(愛新)은 金, 줴러(覺羅)는 일족을 의미하므로 김씨(金氏)라는 뜻이라 한다.(이 가문은 金태조 아골타와 같이 신라 후예여서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음차를 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선양 복릉, 태조와 황후의 능(좌), 누루하치 묘소, 심양(우)]

 

누르하치를 이어받은 홍타이지(皇太極)는 만주족의 팔기군을 장악하고 외몽골과 내몽골까지 병합하여 만주·몽골·한족의 다민족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는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1636년 황제로 즉위하여 청나라의 기초를 다졌으나 명나라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선양 고궁, 봉황루(좌), 선양 고궁, 대정전(우)]

 

홍타이지 사후 아들 순치제가 다섯 살의 나이로 이어받으면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나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의 섭정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도르곤은 북경을 점령하는 등 중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사냥터에서 돌연 사망하고 순치제의 친정이 이루어진다. 순치제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왕조 중국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61년을 재위하면서 눈부신 내치와 외정의 업적을 쌓아 청의 중국지배를 완성했고, 이후 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명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만을 정벌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외몽골·티베트에 이르는 정복전쟁을 계속했다. 강희제 사후 치밀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옹정제가 반대파를 제압하고 즉위하여 황권강화와 내정개혁을 통해 절정기인 건륭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외치에서도 티베트원정을 마무리하고 운남·귀주·광서 등 중국남부까지 평정하여 최대 영토의 기틀을 마련했다. 6대 건륭제는 63년 재위하면서 내정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융성시키는 한편 준가르,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 광범위한 주변국 원정과 평정에 나서 淸 대통일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청나라 지도]

 

건륭 말년 이후 정치부패와 국정혼란이 이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 등 각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1.2차 아편전쟁(1840,1856)에서 청일전쟁(1894)에 이르기까지 외국 세력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거대한 淸은 와해되고 1912년「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면서 276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중국 마지막 왕조이자 선비, 金, 元등에 이어 마지막 북방민족 여진의 중국지배에 종지부를 찍는다.

대통일제국 淸과 한반도 역사와의 조우

고려말 함경도지역에는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했고 나중에 태조가 된 병마사 이성계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배후 세력이 되었다. 태조는 개국 후 여진족 동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이후에도 여진족에 대해서는 조선 조정의 강·온 양면의 정책이 교차하게 된다.

후금이 건국되던 1616년은 조선 광해군 8년 시기로 明·淸 교체기라는 대륙의 큰 소용돌이가 한반도에도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당시 광해군은 동북아 국제정세를 대신들과는 달리 정확히 꿰뚫어 보고 明에 대한 일방적 의존보다 등거리 외교전략을 택한다. 후금이 요동지방으로 진격해오자 명은 임진왜란 당시 지원에 대한 보답을 명분으로 조선군 파병을 요구(1618년)해왔고, 광해군은 마지못해 파병하나 明·淸의 패권전쟁인 사르후전투 패전 후 추가 파병은 묵살한다. 이후 광해군의 외교정책으로 후금과 큰 마찰없이 지내게 되나, 광해군 15년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명과의 관계 개선과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내세우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은 明 정벌에 앞서 배후의 조선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627년 3만 병력이 조선에 침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조선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이어지는 후금의 전방위 압력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후 후금의 국경침입, 신속(臣屬)요구, 파병요구 등이 이어지면서 인조의 조선에서는 척화배금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국호를 淸으로 바꾼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1일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공에 나섰다. 병자호란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서 청군은 심양을 떠나 10여일 만에 수도에 육박하는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급한 나머지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은 청군에 포위되어 끝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다음해 1월30일 청의 출병 후 2개월 만에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항복하여 전쟁이 끝난다. 이후 양국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된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강희·옹정·건륭시대(1661~1799년)는 청나라 최전성기였고 조선은 현종·숙종·영조·경종·정조(1659~1800년)가 재위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대제국을 완성하고 세계와 교류하면서 문물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청을 통해 문물교류 기회를 확대할 수 있었다.

현대 중국의 영토는 몽골, 연해주, 카자흐스탄 일부, 대만 등을 제외하고는 청 제국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청은 100만 명도 안되는 만주족이 1억명을 훨씬 넘는 한족을 지배하면서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고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중국헌법 전문을 보면 「중화민국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이 공동으로 건설한 다민족 통일국가」라 규정한다. 이민족의 청이 현대 중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중국이 지금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고 한국과의 관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긴밀하다. 중국은 한국의 제1의 교역국이며, 한국은 (EU·ASEAN·홍콩 제외시) 미·일에 이어 중국의 세번째 교역국이다. 양국은 지난 259년 조선·청 관계와는 판이한 새로운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淸을 세운 만주족과 한민족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2세기 金을 잇는다는 의미로 나라이름을 大金이라 했다. 119년간 존속한 金은 여진족 추장 아골타가 세웠으며 그는 고려에서 온 신라인 김함보의 후예다. 그러면 만주일대에서 활약한 여진족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고대로부터 만주일대에 살던 사람들로 그들이 살던 지역이나 민족을 중국에서는 시대별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한대에는 읍루남북조시대에는 물길수·당대에는 말갈송·명대에는 여진이라 불렀고 청대에는 홍타이지가 민족명을 여진족’에서만주족’으로 바꾸었다.

 

여진족이 활동한 만주일대는 고조선·부여를 이어 고구려의 땅이었다당나라시대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관계로 당을 양쪽에서 견제하고 있었다돌궐이 분열 등으로 멸망하자 이어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나 돌궐에서는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돌궐 멸망 30년 만에 영웅 쿠틀룩이 후돌궐을 일으킨다. 한쪽에서 당의 견제 세력이 다시 등장하자 고구려가 멸망한 만주지역에서도 30년 만에 후고구려 세력이 일어난다. 이 나라가 바로 영웅 대조영의 발해다. 30년 만에 당, 후돌궐, 발해의 삼각관계가 다시 형성 된 것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한민족 역사가 만주일대에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고구려를 이어 받은 발해는 이후 거란에 의해 멸망했으나 발해 땅 그리고 그 땅에 살던 사람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그 땅과 그 사람들이 여진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그래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나아가 청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와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여진족에 대해 단순히 중국적인 시각으로 북방민족의 하나, 또는 오랑캐로 생각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블라디보스톡 박물관에 보관중인 발해 토기(좌)와 금나라 토기(우)]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민족의 본류라 인식되고 있는 예맥동호숙신과 같은 이름으로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의 총칭이었다이들 중 만주지역에 남아있던 숙신은 후일 물길말갈읍루여진만주족 등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사기 흉노전에 등장하는 ‘동호’는 고조선(신朝鮮)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또 선비는 동호의 후예이고 선비에서 유연, 북위, 거란, 몽골이 유래한다는 사서·연구는 우리의 고대역사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단재 선생은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라고 쓰고 있다. 청나라를 건국해서 오늘날 중국이 있게 한 여진족 역시 과거 우리와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석동(전금융위원장), 조선일보(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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