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왜 ‘대한제국 영빈관’을 다시 짓나] [高宗의 세 가지 罪] ....

뚝섬 2023. 3. 2. 09:41

[ 200 들여대한제국 영빈관 다시 짓나]

[高宗의 세 가지 罪]
[미국, 때론 우리를 배신했다]
[이방카와 앨리스 루스벨트]
[이대로 '東北亞 환자' 되려는가.. ]

[高宗 사진]

 

 

 

200 들여대한제국 영빈관 다시 짓나

 

외세에 의존했던 고종이 세운 호화로운 서양식 건물돈덕전
100
만에 굳이 새로 만들며자주 외교라고 미화하다니

 

최근 서울 중구 덕수궁 내 돈덕전의 모습. 돈덕전은 덕수궁의 또 다른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 뒤편에 있던 건물로,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된 뒤 순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사용한 건물로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설계를 시작해 유구(遺構·건물의 자취) 보존처리, 기반 조성 작업 등을 거쳐 작년 11월 외관 공사를 완료하고 현재는 실내와 조경 공사가 진행중이다. /박상훈 기자

 

요즘 덕수궁 돌담길을 돌다 보면 서쪽 언덕에서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장대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뾰족한 탑과 붉은 벽돌, 푸른색 창틀이 있는 근대 서양식 건축물 돈덕전(惇德殿)이다. ‘서경’의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돈덕윤원·惇德允元)’는 순(舜)임금 말에서 딴 것으로,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해 1903 완공한 대한제국의 연회장이자 영빈관이었으며 황제의 외국 사신 접견장이었다.

 

당시 이곳을 찾은 한 독일인은 이렇게 썼다. “접견실은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장식했다.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예술품들, 이 모든 가구는 황제의 문양인 오얏꽃으로 장식했다.” 이 호화로운 건물에서 고종은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열려고 했으나 무산됐고,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강제 폐위되고 나서 아들 순종의 즉위식이 여기서 치러졌다.

 

미국 공주 행차라는 촌극(寸劇) 현장이기도 했다. 을사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9월 방한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이곳에 묵었다. 앨리스를 공주쯤으로 여긴 고종은 극진히 환대했으나 미국이 그 직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용인했다는 사실은 통 모르고 있었다. 앨리스는 “황제다운 존재감 없이 애처롭고 둔감했다”며 고종을 비웃었다. 멸망을 목전에 나라가 펼치던 웃지 못할 외교전이었다.

 

1897년 선포한 대한제국이 ‘황제의 나라’를 내세운 것은 분명 자주(自主)를 표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왕실이 황실로 격상함에 따라 불어난 유지비는 백성들 몫이었다. 황제국 선포 뒤 사실상 새로 지은 덕수궁에는 돈덕전·석조전 같은 장엄한 서양식 건물도 신축했다. 같은 임금 때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고혈을 빤 지 불과 29년 뒤 일이었다. 내실을 갖춘 개혁은 ‘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오히려 나랏빚을 대신 갚아주자고 국채 보상 운동을 벌여야 했던 취약한 나라가 대한제국이었다.

 

철거되기 전 덕수궁 돈덕전의 과거 사진.

 

· 열강의 공관 사이 절묘한 위치에 지은 돈덕전은,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지해 연명(延命) 노린 굴욕적 역사의 상징과도 같다고 평가할 있다. 건물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더 쓸 일이 없어진 돈덕전은 방치됐다. 1920년대에 철거됐고 그 자리엔 어린이 유원지가 들어섰다.

 

사라졌던 돈덕전을 다시 지은 것은 2018년 본격화한 ‘덕수궁 제 모습 찾기’에 따른 것이다. 발굴 조사를 마친 뒤 돈덕전 복원이 시작돼 최근 외부 공사를 끝냈다. 오는 5월 현판식에 이어 9월 개관할 예정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복원’이 아니라 ‘재건’이라고 말을 바꿨다. “자료 부족 때문에 원형대로 지을 수 없었고 사진 등을 참고해 새로 만들었다.” 결국 건물의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웠다는 얘기다.

 

이렇게까지 해서 문화재적 가치도 의문인 돈덕전을 다시 짓는 이유는 뭘까. 담장 밖 안내판에는 ‘자주 외교를 통한 주권 회복의 장’이었다고 쓰여 있다. 한술 더 떠 문화재청은 “근대화를 향한 대한제국의 못다 이룬 꿈을 재조명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정신 승리’가 진정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교훈일까. 재건된 돈덕전을 찾을 관람객들은 자주 외교라는 것이 돈덕전 낙성 2 만에 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허울 좋은 간판이었음을 이해해야 맞지 않는가?

 

돈덕전 재건에 투입된 비용은 약 200억원이다. 과연 그 돈을 들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권위나 명분, 화려한 의전, 말로만 ‘자주’를 외치는 일 따위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치는 것이 먼저 아니겠는가.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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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의 세 가지 罪


국제 정세 오판하고 국가보다 皇室 이익 앞세우며 제 편·남 가르는 '진영 정치' 앞장
낭만적 고종觀은 역사 誤導 


지금 덕수궁엔 1905년 9월 조선을 찾은 미국 고위급 사절단에게 준 고종 사진이 전시돼 있다. 지난달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展)을 위해 113년 만에 돌아온 유물이다. 고종은 황룡포에 보라색 익선관을 쓴 황제 차림이다.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촬영한 이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맏딸인 앨리스와 함께 온 기업인 에드워드 해리먼이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빌려왔다. 고종은 당시 러일전쟁 강화를 중재한 미국 도움을 기대하며 스물한 살 앨리스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성대한 오찬을 베풀고 황실 가마로 모셨다. 떠나는 앨리스 일행에겐 고급 피나무 함에 담아 사진을 선물로 줬다. 황제가 다스리는 독립국 대한제국을 기억해달라는 취지였다.

앨리스는 냉정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앨리스의 평가는 대한제국을 향한 외부의 시각을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고종이 '미국 공주'에게 매달렸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정책은 영국·미국 등 대서양 세력의 경계심을 촉발했다. 이 틈을 탄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앨리스 방한 2주 전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쓸 만큼 대한제국을 불신했다. 고종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루스벨트 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릴 만큼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

고종은 청일전쟁 때는 미국 공사관, 러일전쟁 때는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에 구출됐고 을미사변 후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러일전쟁 직전 중국 칭다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틈만 나면 외국 공사관 피신·망명설(說)이 도는 국가 지도자를 어느 나라가 제대로 인정해줄까.

고종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그의 재위 44년은 한·중·일 삼국이 생존(生存)을 위한 필사의 근대화 경주(競走)를 벌이던 때였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서두르기보다 군주의 위신을 앞세우며 예산을 탕진했고 갑신정변·동학혁명 같은 고비마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러일전쟁 때는 중립국 선언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은 세계의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고종이 국력을 모아 헌법과 의회, 근대적 사법체제를 마련하고 나라 살림을 키워 근대 문명 국가로 전환했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식민지 신세로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국가 개조를 위해 손잡아야 할 우호 세력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탄압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군주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모두가 힘을 합해도 벅찬 시기에 고종은 철저히 자기편과 남을 가르는 진영(陣營)정치의 선두에 섰다.

고종이 각국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는 비밀 외교를 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약육강식 시대에 힘없는 나라를 도와줄 선의의 이웃은 없었다. 최근 드라마와 연극, 전시로 고종에게 '개혁' '항일' 코드를 입히는 재조명 열기는 사실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근대 국가를 꿈꾼 '고종의 길'로 미화한다고 해서 망국으로 이끈 죄(罪)는 줄지 않는다. 35년간의 일제(日帝) 지배를 부른 1차적 책임은 고종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김기철 논설위원, 조선일보(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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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때론 우리를 배신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루스벨트, 周恩來와 비밀 회담했던 키신저
한국 농락했지만 노벨상 받아… 트럼프도 '배신의 노벨상' 받나 


"조국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 공원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6·25전쟁 당시 미국 군사 고문관 하우스맨의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하버드대학의 고풍 어린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하버드 출신 병사들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미국은 6·25전쟁에서 5만4000명의 목숨과 10만명의 팔다리를 한국을 위해 바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미국은 우리 은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에서 미국이 항상 은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사절단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고종과 대신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 위기 앞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이 도와줄 것에 희망을 걸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사절단장 윌리엄 태프트(전쟁부 장관)가 일본에서 가쓰라 다로(총리)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밀약을 이미 맺고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사절단 방문 두 달 뒤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겼다.

1950년 1월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국의 뒤통수를 쳤다.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며 한국을 방위선 밖으로 빼버렸다. 이것은 김일성이 남침 도발을 더 편하게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71~1972년 미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가진 비밀 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으로 이익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키신저는 미군이 철수할 경우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상황도 거론했다. 키신저가 배석한 닉슨 대통령-저우 회담 때, 닉슨은 "남이든 북이든 코리안은 충동적인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충동적이고 호전적인 사람들이 사건을 일으켜 우리 두 나라를 곤궁에 빠트리지 않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고 했다. 한국이 빠진 자리에서 한국의 운명을 가지고 놀았다.

며칠 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또 한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로 김정은과 회담한다. '일괄 타결' '단시일 내 완전한 핵 폐기'를 공언해왔던 트럼프는 북한 김영철을 만나고 나선 말이 달라졌다. "6월 12일 정상회담은 하나의 과정이자 시작" "천천히 갈 수 있다"고 했다. '일괄'과 '단시일'은 없어지고 북한이 주장해온 '단계적 폐기' '천천히'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북핵 폐기와 북한 지원에 들어가는 돈은 "한국이 낼 것"이라고 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미국의 목표는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이곳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발사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는 야릇한 말을 한 적 있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 한국을 위협하는 북핵은 그대로 남겨두고 미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장착 핵무기만 제거하는, 우리로선 최악의 거래가 이뤄질지 모른다는 의심은 괜한 것이 아니다. 그런 합의로 트럼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한제국을 배신했던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종결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키신저도 월맹의 레 득 토 총리와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파리협정을 맺은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 협정으로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으나, 월맹은 2년 뒤 베트남을 침공해 함락했다. 협정은 사기였다. 


-조중식 국제부장, 조선일보(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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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카와 앨리스 루스벨트


1905년 9월 19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장녀 앨리스가 인천항에 내렸다. 고종이 내준 전용열차가 서울에 도착하자 황실악단이 미국 국가(國歌)를 연주했다. 앨리스가 탄 가마가 숙소까지 향하는 길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휘날렸다. 고종은 성대한 오찬을 베풀었다. '귀빈들의 국가는 한인(韓人)의 앞날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 분명하다.' 대한매일신보는 1면 논설로 앨리스 방한에 기대를 보냈다.


▶고종이 스물한 살 '앨리스 공주'를 국빈 대접한 이유는 루스벨트가 자신을 도와줄 구세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지배권을 다툰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조약 중재자였다. 하지만 사절단은 두 달 전 도쿄에서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을 체결한 뒤였다.

 

▶앨리스 사절단의 행선지는 일본과 필리핀, 중국, 한국이었다. 루스벨트 다음으로 대통령이 된 태프트 육군장관과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이 포함됐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고 석 달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구성했다. 임무를 마친 태프트는 홍콩을 거쳐 귀국했지만 앨리스는 개인 여행 삼아 서울까지 온 것이다. 대한제국은 미국 대통령 딸이라도 붙잡고 우리 편들어주길 사정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트럼프 대통령 장녀 이방카(37) 백악관 선임고문이 내일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한다. 평창올림픽 폐막식 참석차 방한하는 이방카 고문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식사를 포함, 국빈 예우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작년 이방카가 도쿄 '국제 여성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방카 고문이 만든 여성기업인지원기금에 50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급 료칸에서 프랑스 창작요리로 만찬을 베풀었다. 110여 년 전 메이지(明治) 일왕이 앨리스에게 정찬(正餐)을 대접하고, 전용 정원을 보여주며 환심을 샀던 것과 닮았다.

 

▶이방카 방한은 북한 비핵화와 통상 문제로 한·미 간 입장이 엇갈리는 시점이라 더욱 관심을 모은다. 대통령 딸이기만 했던 앨리스와 달리 이방카는 백악관에 사무실을 두고 외교·안보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는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이다. 탈북 여성을 만나겠다고 일정을 잡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뢰 회복이 최우선이다. 한·미 동맹 깃발 아래 함께 가는 게 서로 이익이 된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기철 논설위원, 조선일보(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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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東北亞 환자' 되려는가..

 

쉽게 바꿀 있는 바꾸기 어려운 가려내는 지혜 필요 

 

다음 대통령은 어제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보냈을까보통 사람들은 온종일 착잡했다세계의 눈을 의식하면 창피스럽기도 했다. 1995 두 전직(前職)대통령이 며칠 사이 잇따라 구속됐다. 2009년엔 바로 직전 대통령이 수사 도중 목숨을 끊었다어제는 불과 20 일 전까지 현직(現職)이던 대통령이 파면 결정을 거쳐 끝내 수의(囚衣)를 입었다.

한국은 '그대로병()'을 앓고 있다대통령들은 20 전과 다름없이 청와대를 나와 교도소로 간다(죽은 경제도 북한 핵()도 예전 그대로다양극화청년 실업노인 빈곤창업 부진(不振)역시 마찬가지다북한보다 GDP 몇 십 배나 크고 국방 예산을 몇 배나 더 쓰면서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국방 태세는 달라진 게 없다.

망가진 분야도 여럿이다미국 관계는 옛날 같지 않고 일본 관계는 최악이며 중국 관계는 절벽과 만났다정부는 4 '녹색(
綠色)성장'이란 단어가 들어간 간판·명패 수천 개를 떼다 버렸다. '창조 경제'라는 단어도 곧 그 운명을 뒤쫓아갈 것이다멀쩡한 정부 부처를 붙였다 다시 쪼개는 일은 한국 풍토병(風土病) 돼버렸다나사 조이는 기술은 세계에서 자기들만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기업 노조의 천동설(天動說) 한층 악화됐다.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험한 세상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비비고 보니 옛날 헤매던 부근이다영국 동화(童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무대는 '죽기 살기로 내달려야 현재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나라'한국이 바로 그런 나라다나라 안에 갇힌 사람만 이상한 줄 모른다.

한국이 어떡하다 '죽기 살기로 달려야만 옛 자리라도 지킬 수 있는 병' 달고 살게 됐을까뜻밖에도 한국의 '그대로병()'뿌리는 '바꾸려면 한꺼번에 몽땅 대청소해야 한다' 오래 내려온 급진적 사고 방식이다.

1863 고종이 왕위(王位)를 잇고 아버지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다. 10 후 대원군이 실각(失脚하고 고종이 친정(親政)한 후 첫 조치가 아버지 정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뒤집는 것이었다강화도 방위를 담당하던 진무영(鎭撫營장관이 그 조치가 국방 약화(弱化)를 불러올지 모른다고 바른말을 하자 즉각 파면했다 결과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 외침(外侵)을 버텨냈던 강화 요새가 일본 침략(1875) 두 손 번쩍 들고 말았다어느 외국 연구자는 조선 망국(亡國원인의 하나로 무참(無慘) (정권 정책 뒤집기를 꼽았다.

한국 대통령의 불행은 헌법과 법률제도와 운영 방식정치 문화와 관행대통령 인격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일거(一擧)에 뜯어고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단번에' 어렵다면 '단계적으로라도가야 한다그러나 헌법 개정은 물 건너갔다유력 대선 후보들이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손을 대려면 이참에 권력 구조만이 아니라 헌법을 두루 손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787 제정된 미국 헌법은 현재까지 20 차례 개정(改正)됐다대부분 한 번에 헌법 한 조항을 바꾸는 개헌이었다루스벨트 대통령의 4 연임(連任)이 문제가 되자 연임을 두 차례로 제한했다국회의원 세비(歲費)인상은 인상 법률을 만든 의회 임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개헌이었다투표 연령 인하금주법(禁酒法)조항 삽입과 폐지도 마찬가지다개헌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싫었던 것이 유력 후보의 본마음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헌법 개정이 어렵다면 제도와 운영 방식이라도 구멍 난 곳을 수선해야 한다그러지 않으면 대통령 얼굴을 비서실장은 1~2주일에 한 번경제부총리는 두어 달에 한 번 보는 일이 언제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다비서실장이 대통령 곁 문고리들에게 대통령 뜻을 묻고민정수석이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을 틀어쥔 채 대통령과 측근 비리를 숨기는 수문장(守門將)노릇을 할지도 모른다.

지도자와 국민이 '몽땅' '한꺼번에' '후련하게'라는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그대로병()' 깊어질 이다노조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영국병(英國病)이 영국을 '유럽의 환자' 만드는 데 15년이면()했다. '그대로병' 한국을 '동북아의 환자'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유럽 환자'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다. '동북아 환자'에게도 그런 요행(僥倖)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이 아흔 넘어 정치 인생을 돌아본 옛 서독 총리는 어느 목사님의 기도(祈禱)를 빌려 자신의 책을 마무리했다.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주시고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용기를 주시고그리고 둘의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다음 대통령이 어제 이런 기도로 마음을 다스렸기 바란다. 

 

-강천석 논설고문(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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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사진

 

루스벨트 대통령 딸 앨리스 일행이 조선에 왔을 때 고종이 선물로 준..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이름처럼 고즈넉하다. 대웅전 마당을 가로막듯 선 누각 안양루에 큰 글씨 편액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가 붙어 있다. 모난 데 없으면서 힘 있는 예서(隸書)가 편안하면서도 묵직하다. 구한말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 작품이다. 그는 특히 대자(大字)에 독보적이어서 이름난 절마다 편액을 남겼다. 큰 붓을 어깨에 걸친 채 양손으로 붓대를 잡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삼보(三寶) 사찰 통도사·해인사·송광사부터 쌍계사·마곡사·전등사·건봉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씨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강은 한국 사진사() 첫머리를 장식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운 그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에 우리나라 최초 사진관 천연당을 냈다. 흑백 필름만 있던 시절 해강은 화가로서 특기를 살려 '오색설채(五色設彩)'를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의 사진도 이때 찍었다.

▶새해를 맞으면 1000명 가까운 손님이 사진을 찍으러 몰려들었다. 남녀가 유별하던 때라 '부인이 촬영할 시에는 처소를 따로 마련해 남자는 일절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사진 한 장 찍는 데 쌀이 몇 가마니씩 하다 보니 사진값을 떼먹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이런 광고가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사진 대금을 술값과 같이 보고 지금까지 갚지 않는 사람은 바로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한미사진미술관 자료집)

▶해강은 한때 궁내부 관리로 고종의 시종을 지내며 황태자 이은(
李垠)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해강과 덕수궁 대청에서 말놀이를 하기도 했던 이은은 나중에 '규진에게 말 오백필, 은 삼천량을 하사하노라' 하는 증서를 써주기도 했다. 해강은 고종과 엄비(嚴妃)의 사랑을 받아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실 사진사가 됐다.

▶1905년 해강이 찍은 고종 황제 사진이 미국에서 발견됐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딸 앨리스 일행이 조선에 왔을 때 고종이 선물로 준 사진이다. 고종의 사진은 여럿 있지만 한국인이 찍은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해강은 흑백 사진 속 고종의 황룡포에 노란색을 입혔다. 고종이 미국 사절단 일행을 환대한 보람도 없이 대한제국은 몇 달 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주권을 내줘야 했다. 늑약이 체결된 곳은 고종이 사진을 찍은 덕수궁 중명전이다. 해강을 다시 만나고 사진사(
)의 한 페이지를 더하는 기쁨은 있지만 대한제국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사진이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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