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역대 황제
누르하치 (Nurhaci)-청태조(淸太祖)
-제1대 청태조(淸太祖)-천명제(天命帝 1616~1626)
만주 동북부 여진족 '전주여진'의 족장으로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누루하치 당시의 조선은 광해군 시절이었다.
☆중국 청나라의 창건자, 초대 황제(재위 1616~1626).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에 큰 위협이었다. 명과의 싸움 중 병사하였지만 그가 확립해 놓은 기초 위에 아들 홍타이지가 대업을 완수하였다.
성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묘호 태조(太祖). 만주의 푸순[撫順] 동쪽 훈허강[渾河], 싱징[興京] 분지의 한 곳에 위치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한 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후대에 ‘옛 노성(舊老城)’이라는 뜻의 퍼아라[佛阿拉, 지금의 新賓縣 永陵鎭 二道村]라고 불리는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1603년에는 ‘허투아라[赫圖阿拉, 赫圖阿喇, 黑秃阿喇, 黑圖阿拉 등으로로 표기, 지금의 遼寧 新賓縣 永陵鎭 老城村]’에 성을 세우고 근거지를 옮겼다.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1616년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였다.
후금의 성립은 명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명의 푸순[撫順]을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칭허[淸河]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명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푸순 관외의 살이호(薩爾滸)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遠東]을 공략하여 랴오허강[遼河] 이동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랴오양[遼陽]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선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명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4월 몽고의 파림(巴林)부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그가 확립한 기초 위에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고 했다.
-제2대 청태종(淸太宗)-숭덕제(崇德帝 1626~1643)
청(淸)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626∼1643).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쳤다. 문관 ·육부의 설치 등 조직정비에 힘썼고, 청나라의 기초확립에 공적이 컸다.
조선 정벌
1636년 12월 여전히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1637년 1월 30일 부로 전쟁을 끝내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스런 항복을 하였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여 청의 명나라 정벌을 도왔다.
-제3대 청세조(淸世祖)-순치제(順治帝 1643~1661)
1645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다.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영명왕을 윈난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명나라의 정치 체제를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의 폐정을 바로잡아 인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묘호는 세조(世祖)이고, 휘는 복림(福臨), 시호는 장황제(章皇帝)이다. 태종(太宗: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연호를 순치로 정하였으므로 순치제(順治帝)라 한다. 태종(홍타이지)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제왕회의(諸王會議)에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는 겨우 5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대청제국의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과 정친왕(鄭親王) 지르하란[濟爾哈朗: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가치의 6번째 아들]이 어린 왕을 보필하여 정권을 돌보는 보정왕(輔政王)으로 추대되었다. 도르곤이 주도하여 어린 순치제를 대신하여 섭정하였는데 이로써 홍타이지 사후 권력은 다시 안정을 찾게되었고 1644년 명나라 내부의 반란을 이용하여 오삼계와 제휴를 맺고 마침내 명나라 수도인 북경에 입성하였다. 이로써 대청제국은 중국대륙 지배의 막을 열었는데 이는 거의 도르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도르곤은 점차 막강한 정치력으로 권력을 독점하였는데 그는 순치제의 생모이자 왕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순치제는 그를 숙부를 넘어 아버지로 여겼다.
1653년 도르곤이 사냥을 나섰다가 갑자기 사망하자 이때부터 순치제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14세의 순치제는 도르곤이 정권을 찬탈하려고 했다는 역모혐의로 추벌(追罰)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왕(諸王)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억제를 꾀하였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659년 영명왕(永明王)을 윈난[雲南]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明)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다만 한인공신(漢人功臣)으로 평가받던 오삼계(吳三桂) 등 이른바 3번(三藩) 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황제의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순치제는 명나라의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을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인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의 치세 동안 안정화된 대청제국은 다음 강희제(康熙帝)의 대(代)로 넘어가 가장 안정된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제4대 청성조(淸聖朝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재위기간 (8살부터 61년간 재위-중국황제 역사상 가장 길다.) 대만을 복속사켜 현재의 중국을 만들다.
이름 현엽(玄燁/玄曄). 시호 인황제(仁皇帝). 묘호 성조(聖祖). 연호 강희.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遺命)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만주 기인(旗人)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집정(執政)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明)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桂王)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鄭成功)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平定)을 맡았던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와 그 아들 정충(情忠)의 삼번왕(三藩王)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撤藩)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鄭氏)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兩)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人頭稅)를 정액화하고, 조운(漕運)을 정비하며, 황허강[黃河江]의 치수(治水)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愛琿城]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外蒙古] 중가르부[準噶爾部]의 갈단[噶爾丹]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昭莫多]에서 갈단군[噶爾丹軍]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策妄阿拉布坦]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緯度)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2월 20일 병사하였다.
-제5대 청세조(世宗 )-옹정제(甕井帝 1722~1735)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게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는 등 청나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윤진(胤禛)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재위 때 사용한 연호에 따라 보통 옹정제라고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보고 주필(朱筆)로 주비(硃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광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반대하던 칭하이[淸海]를 귀속시키고, 연갱요에게 23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평정하게 한 뒤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하여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조약을 맺고 지금의 러시아와 몽골간의 국경선을 정하였다. 옹정제의 이같은 대외 업적을 바탕으로 뒤를 이은 건륭제(乾隆帝)가 준가르와 위구르 등을 평정하여 몽골을 제외하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다.
-제6대 청고종(高宗)-건륭제(乾隆帝 1735~1796)
☆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95). 조부 강희제에 이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으며, 이 시기에 중국 문화가 유럽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름 홍력(弘曆). 시호 순황제(純皇帝). 묘호 고종(高宗).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鈕祜祿: 弘毅公額亦都의 曾孫女)이고, 황후는 부찰(富察: 察哈爾總管李榮保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人) ·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叟宴)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和珅)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도 융성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기술이 전래되고, 중국 문화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는 등 국제 교류도 확대되었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제7대 청인종(仁宗)-가경제(嘉慶帝 1796~1820)
☆ 중국 청(淸)나라 제7대 황제(재위 1796~1820). 즉위후에도 태상황제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태상황제의 사망 후에야 친정을 폈다. 백련교의 난을 평정하였으나 천리교의 난, 회족(回族) ·먀오족[苗族] 등의 반란으로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름은 영염(永琰)이었으나 후에 옹염(顒琰)으로 고쳤다. 묘호(廟號)는 인종(仁宗).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이다. 건륭제 생존 중인 1796년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였으나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1799년 태상황제의 사망으로 친정(親政)을 폈다. 친정 즉시 권세를 부리던 건륭제의 총신(寵臣) 화신(和珅 )을 자살하게 하고 후베이[湖北] ·쓰촨[四川] ·산시[陝西]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백련교(白蓮敎)의 난에 직접 대처하였다.
1802년경 난이 평정되었으나, 광둥[廣東] ·푸젠[福建] ·저장[浙江] 등 남동해안에서 채견(蔡牽)을 중심으로 한 난이 일어났고, 1813년 천리교(天理敎)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중 1부대가 북경의 궁성에 난입하였다. 또 회족(回族) ·먀오족[苗族] 등의 반란이 일어났고, 한편 외국세력도 아편을 들여오는 등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경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의 시대였다.
-제8대 청선종(淸宣宗) 도광제(道光帝 1820~1850)
아편전쟁에 패배하여 난징조약(1842년)에 따라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상해를 개방하였다.
애신각라민녕(愛新覺羅旻寧). 청나라 제8대 황제(재위, 1820-1850). 묘호는 선종(宣宗)이다. 가경제(嘉慶帝, 仁宗)의 둘째 아들이다. 가경 18년(1813) 궁내로 들어온 천리교도(天理敎徒)들을 막아내 지친왕(智親王)에 봉해졌다. 25년(1820) 7월 황위를 이었고, 다음 해 도광(道光)으로 연호를 고쳤다. 재위 기간 동안 기울어가는 국세(國勢)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농민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아편 중독에 따른 재앙이 만연했다. 이전 황제들의 통치기간에 크게 줄어들었던 황실재정을 개인적인 검약을 통해 복구하고자 애썼다. 18년(1838) 임칙서(林則徐)를 광동(廣東)에 보내 해구사건(海口事件)을 조사하게 했다.
아편전쟁이 터지자 시세(時勢)에 어두워 임칙서에게 책임을 물어 해직한 뒤 수(戍)자리를 보냈다. 영국에 대해서도 화의와 전투를 병행하더니 결국 22년(1842)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했다. 이어 미국과 프랑스와도 망하조약(望厦條約)과 황포조약(黃埔條約)을 맺었다. 이에 따른 전쟁비용과 평화협정 조건에 따라 영국에 지불한 막대한 배상금이 국내의 불만과 경제적인 압박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제위에 있을 때 홍수와 기근을 막기 위해 황하(黃河)의 제방을 고치고 대운하(大運河)를 수리하는 일이 절박해졌다. 이는 당시 대운하가 중국 남부에서 수도 북경(北京)까지 쌀을 운송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패한 관리들은 운하의 수리비를 횡령했고, 그는 운하의 수리문제가 더욱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노동자 수의 축소를 꺼렸다. 29년(1849)에 이르자 대운하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해적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해상으로 쌀을 운반하게 되었다. 아울러 실직한 수천 명의 운하 선원들이 소요의 불길을 부추겼다.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0-1864)으로 알려진 대규모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띤 소요가 중국 남부를 휩쓸기 시작하던 무렵 사망했다. 30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성황제(成皇帝)다.
-제9대 청문종(淸文宗) 함풍제(咸豊帝, 1850~1861)
☆ 청나라 제9대 황제(재위 1850~1861). 태평천국군의 난징 점령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는 만주인 관료를 물리치고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톈진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 ·프랑스군이 베이징에 칩입하자 러허[熱河]의 이궁으로 피난, 병사하였다.
시호 현황제(顯皇帝). 묘호 문종(文宗). 도광제(道光帝)의 제4자. 즉위 직후에 홍수전(洪秀全)이 광시[廣西]에서 거병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선언하였고, 이어 염당(捻黨)의 반란, 나아가 북방에서 러시아의 진출이 시작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하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이 난징[南京]을 점령하였으나, 만주인 관료는 당파싸움 등 이기적 행위에 몰두하여 무력 또한 약체화되었다. 이에 대영단으로 만주인을 물리치고 증국번(曾國藩)·쭤충탕[左宗棠] 등의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 중인 1856년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무력진출을 개시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는데, 다시 1860년에는 동 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프랑스군이 베이징[北京]에 칩입하자 러허[熱河]의 이궁으로 피난, 다음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제(帝)를 대신하여 동생 공친왕(恭親王)이 교섭을 맡아 톈진조약의 비준·교환과 베이징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때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개설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의 공사가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면서, 구미 세력의 중국 진출이 강화되었다.
-제10대 청목종(淸穆宗) 동치제(同治帝, 1861~1875)
애신각라재순(愛新覺羅載淳). 청나라 제10대 황제(재위, 1861-1875). 묘호는 목종(穆宗)이고, 시호는 의제(毅帝)다. 문종(文宗, 咸豊帝)의 아들이고, 나랍씨(那拉氏) 출신이다. 함풍(咸豊) 11년(1861) 7월 열하(熱河)에서 황위를 이었고, 숙순(肅順)과 재원(載垣), 단화(端華) 등 여덟 사람의 보필을 받아 다음 해 연호를 기상(祺祥)으로 고쳤다. 9월 적모(嫡母)와 생모(生母) 두 태후(太后)의 휘호를 자안(慈安, 東太后)과 자희(慈禧, 西太后)라 불렀다. 같은 달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자희태후가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과 함께 정변(政變)을 일으켜 숙순을 죽이고, 재원과 단화에게 자살을 명한 뒤 연호도 동치로 고치면서 두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자희태후가 정권을 장악한 것을 이때부터였다. 재위할 때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이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회민(回民)과 묘족(苗族)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중흥(中興)’으로 불렸다. 혁흔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과 함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다. 12년(1873) 정월 친정(親政)을 시작했지만 다음 해 12월에 병으로 죽었다.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청나라는 동치제가 재위에 있을 때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를 일컬어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한다.
6살 때 즉위해 어머니 서태후가 중심이 된 3인 섭정체제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동치중흥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중엽에 있었던 위대한 유신(維新)들을 본떠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동치 원년(1861)에 청나라 정부는 당시 중국 남부를 위협하던 태평천국운동(1850-1864)을 마침내 진압하고 중국 북부에서 일어났던 염군(捻軍)의 난(1853-1868)도 진압했다.
황실재정이 복구되었으며 훌륭한 인재들을 관직에 새로이 등용했다. 오랫동안 반군(叛軍)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다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또 농민에게 씨앗과 농기구를 나누어주고 토지개간을 장려해 농업생산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여전히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만이 관리로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외국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피상적인 성공에 그쳤지만 서양무기제조계획이 실시되었다.
외교문제를 다루기 위해 총리아문(總理衙門)을 새로이 설치했으며 서양에 대해 알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7살이 되던 12년(1873)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동치제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6개국의 대표들에게 자신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동치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사절이 황제를 알현할 때 개두의식(磕頭儀式, 간청의 표시로 이마를 3번 바닥에 대고 절하는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톈진조약(天津條約, 1858)과 북경조약(北京條約, 1860)을 맺어 서양 세력들과의 긴장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병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동치제는 계속해서 서태후의 간섭을 받았다. 친정을 시작한 지 2년이 못 되어 사망했다.
-제11대 청덕종(淸德宗) 광서제(光緖帝, 1875~1908)
☆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 사실상 정권은 서태후가 장악했다. 서구열강과 문제가 많은 시기였다.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책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변법을 시작했다. 수구파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했다.
휘 재첨(載湉). 묘호 덕종(德宗). 시호 경황제(景皇帝). 도광제(道光帝)의 제7자 순현친왕(醇賢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황제로, 사실상의 정권은 서태후(西太后)가 장악하여 평생 동안 서태후의 전횡(專橫)에 시달렸다. 치세하는 동안 이리사건(伊犁事件) 및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서구열강과의 관계로 가장 다사다난한 시대였다.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받은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戊戌)변법을 시작하였다.
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변법파의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고, 황제는 궁중에 유폐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나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피하였는데, 그러한 탈출의 혼란을 틈타서 서태후는 황제가 사랑한 진비(珍妃)를 죽였다. 1901년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에 죽었고, 다음 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었다.
-제12대 청공종(淸恭宗) 선통제(宣統帝, 1906~1967)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재위, 1907-1912).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滿洲國)의 황제(재위, 1934-1945). 청나라 황제 때의 연호는 선통(宣統)이다. 이름은 부의(溥儀, Pui)다. 광서(光緖) 34년(1908) 11월 14일 큰아버지 광서제(光緖帝)가 죽자 3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 순친왕 재풍(載灃)의 섭정을 받으며 3년 동안 황제로 있었다. 3년(1911)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듬해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도 마감하게 되었다. 북경(北京)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부의(溥儀, Pui)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Henry)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몰래 북경을 떠나 천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식물원의 기계 수리 상점에서 일했다. 1964년과 1965년 사이에 영어로 된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가 간행되었다.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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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大淸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ᡤᡠᡵᡠᠨ Daicing Gurun, 1636~1912),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청조(淸朝), 약칭 청(淸)은 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이다. 1636년에 건국되었으며, 1644년부터 1912년까지 중원을 통치하였다. 거의 300여 년을 존속하며 근현대 중국의 기틀을 놓았으며, 인류 역사상 4번째로 거대한 영토를 다스릴 정도로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에 의하여 세워졌다. 16세기 후반, 명나라의 봉신이었던 누르하치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 모두를 포괄하는 군사적-사회적 시스템인 팔기제를 창설하였고, 이후 분열되어 있던 만주족들을 통일한 뒤 1616년에 후금(만주어: ᠠᠮᠪᠠᠠᡳ᠌ᠰᡳᠨ Amba Aisin)을 건국하였다.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는 명나라 군대를 랴오둥 반도 밖으로 몰아낸 이후 1636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만주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한편 중원에서는 명나라가 갈수록 국력이 쇠하고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이자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1644년에는 반란군이 명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명나라의 장군이자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는 이들을 치기 위하여 청나라의 섭정이었던 도르곤과 손을 잡았고, 산해관을 열어주고 청나라 군대를 맞아들였다.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이자성의 군대를 처리하였으며,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진을 계속하여 명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며 1683년에 이르러서야 천하의 패권을 거머쥐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를 연이어 다스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에 청나라는 지속적인 정복 사업을 펼치며 그 세력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중국 본토 전체, 하이난, 타이완, 몽골, 만주 지역을 모두 다스렸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만주족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유지하였으나,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티베트인들을 포용하였고, 몽골인들을 대할 때에는 스스로를 ‘복드 칸’이라 지칭하였으며 한족들에게는 중원의 천자로 군림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를 대부분 이어받으며 관료제와 과거제에 기반한 유교적 시스템을 구축하여 한족들을 대거 임용하여 만주족과 함께 공존시키는 데에 성공하며 발전을 거듭,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며 무려 120여 년 동안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이룩하였다. 또한 조공 제도도 그대로 유지하여서, 주변의 조선이나 응우옌 왕조와 같은 국가들과도 교류를 지속하였다.
청나라는 18세기 후반에 국력의 정점을 찍었으며, 이후 외세의 도전에 시달리며 점차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인구 과잉, 부정부패, 경제 실패, 정치적 경직성 등 고질적인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의 인구는 무려 4억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세율과 정부의 세입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고 정부의 재정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부실한 국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에게 자유무역, 치외법권, 계류지 등 불평등 조약들을 수없이 강요하였고,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하며 중국 전체를 경제적으로 예속화시켰다.
한편 사회적 갈등은 점차 극에 달해갔고, 1800년대 말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과 둥간혁명 등으로 인하여 무려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 가뭄, 전쟁 등 여러 가지 이유들로 죽어나갔다. 1860년대에는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하여 한족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청나라를 보전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기는 하였으나, 이마저도 충분치 못하였고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는 갈수록 망조가 들어갔다. 양무운동을 통하여 실시한 개혁 정책은 1895년 일어난 1차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그 한계가 드러났고, 청나라는 이로 인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타이완마저 일본 제국에게 빼앗겼다. 이후 청나라는 광서제의 주도 하에 자강변법운동을 펼치며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보수 세력과 서태후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개혁 세력들이 몰락하며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며 청나라의 근대화 노력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라가 완전히 혼란에 잠기고, 서구 열강들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지자 민족주의 세력인 의화단이 1900년에 난을 일으켜 상당한 수의 서구인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서구 군대가 청나라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였으며 서태후와 황실은 서안으로 피신까지 하는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청나라가 신축조약을 맺고 서구에게 수많은 이권들을 내준 이후, 청나라는 뒤늦게 대대적인 행정적, 경제적 개혁을 실시하며 선거제, 법률, 과거제 폐지 등 수많은 근대화 정책들을 발의하였다. 개방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개혁가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때 공화론자인 쑨원과 입헌군주정 옹호자인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이 서로 다투며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908년에 광서제가 결국 서태후에 의해 독살당해 사망한 이후, 만주족 출신의 보수 세력이 다시 조정의 주도권을 잡았고 개혁론자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며 청나라는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야 만다. 결국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 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세워지며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1912년 2월 12일에 청나라의 장군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의 퇴위를 강제하며 결국 청나라도 멸망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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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누르하치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은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누르하치는 군소 여진족들의 추장으로, 유년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 몽골어와 중국어에 유창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삼국지와 수호전과 같은 중국 전통 소설들을 접하며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본받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누르하치는 이후 명나라의 명령 하에 주변의 여진 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화들을 잠재우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후 1616년 즈음이 되자 모든 인근 여진족들을 통합하며 만리장성 외부 진족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떠올랐다. 기세등등해진 누르하치는 예전에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대금(만주어: ᠠᡳ᠌ᠰᡳᠨ Amba Aisin)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명(天命, 만주어: ᠠᠪᡴᠠᡳ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으로 정한 후 스스로를 총영명한(聰英明汗만주어: ᠠᠪᡴᠠᡳᡤᡝᠩᡤᡳᠶᡝᠨᡥᠠᠨ Sure Genggiyen Han), 간단히 말하여 여진족의 대칸으로 선포하였다.
2년 후, 누르하치는 칠대한을 선포했고, 명나라의 비호 하에 여전히 자신의 지배권 밖에 있었던 여진족들까지 모두 통일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통치를 거부한 뒤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안팎으로 무너져가던 명나라 군대는 속절없이 누르하치에게 패배했고, 누르하치는 자신의 수도를 헤투 알라에서 명나라에게서 뺏은 도시들로 천도하였다.
1621년에는 라오양으로, 1625년에는 선양으로 옮겨갔다. 여진족들이 누르하치의 지도 하에 모두 통일되자, 누르하치는 군사, 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후 누르하치는 새롭게 부족들을 편성하여 새로운 만주 부족들을 만들어냈다. 누르하치의 조정을 랴오둥 반도의 도시들로 옮긴 것은 만주족이 인근 부족들과 더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이 곳에서 몽골 평원들에 있는 몽골인들과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었고, 그 외의 명나라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도 점차 연계를 넓혀갔다. 다만 당시 몽골족들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를 적대하는 세력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명나라의 압제에 대항하는 마음만은 똑같았기에 누르하치가 이들에게 명나라에 적대적인 공동 전선을 제안하였을 때는 모두가 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전쟁에서도 유용한 동맹이었다. 몽골인들은 여진족들에게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 등 기마술과 궁술들을 전파하였고, 말과 갑주들을 제공하며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어주었다. 누르하치는 이들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여진족과 몽골족 간의 결혼을 크게 장려했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은 군사로 쓸어버릴 정도로 이 정책을 밀어나갔다. 이는 크게 성공했고, 결국 만주족과 거의 혈통이 섞여버린 몽골족들은 후에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청나라의 충실한 조력자로 남았다.
누르하치가 남긴 업적들 중 가장 눈여겨볼만한 것은 바로 만주 문자이다. 구 여진 문자는 이미 소실되었기에,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이다. 또한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이후 청나라까지 이어지는 핵심 제도들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여진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먹이를 흡수하기에는 너무나 수가 적고 세도 빈약했기에, 그들은 몽골인들과 합쳐 동맹을 맺으며 점차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만주족들은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한족 군사들도 팔기제에 합류시켰다. 또한 명나라의 궁병 부대가 기병 위주였던 만주족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치자, 궁병의 힘을 알아본 여진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귀순해온 명나라 궁병들로 만들어진 부대도 1641년에 만들어 명나라를 침략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써먹었다.
1642년 경에는 명나라에서 항복해온 한족 군사들이 너무 많아 팔기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러 따로 녹영군을 창설하여 편제를 확립하였을 정도였다. 이후 청나라는 이들을 활용하여 남명 정권을 공격하는데에 쓰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족들은 중국 정복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보통 고위급 장군이나 관료들이 항복해왔을 경우 이들을 여진 황족의 여인들과 결혼시켜 피를 섞는 경우가 많았고, 계급이 별로 높지 않은 일반 병사들의 경우에도 여진족 여인들 간의 결혼을 장려했을 정도였다.
홍타이지
누르하치의 무패 기록은 1626년 1월, 그가 닝위안현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에게 패하며 그 막을 내렸다. 누르하치는 이후 몇 달 후 승하했고,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자식들 간에 벌어진 치열한 왕좌 쟁탈전을 뚫고 그의 뒤를 이었다.
홍타이지는 유능한 군사 사령관이었고, 이미 팔기제의 여덟 군단들 중 2개의 군단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집권 초기에는 연달아 군사적인 실패를 맛본다. 여진족은 1627년에도 또다시 원숭환에게 패배의 쓴맛을 맛보았다. 다만 이는 명나라가 서양에서 수입해온 포르투갈 산 대포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술적,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홍타이지는 1634년에 중군이라 하여 항복해온 한족 병사들을 활용, 그리고 인근의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유럽식 대포들을 다룰 줄 아는 새로운 포병을 창설했다. 홍타이지의 재위기에는 점차 여진족들이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1635년 11월에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통합을 선포하여 분열되어 살던 여진족들에게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후 산해관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에게서 빼앗아 왔고, 내몽골의 링단 칸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1636년 4월, 내몽골의 몽골 귀족들, 만주 귀족들, 그리고 한족 유력자들이 선양에 모여 쿠릴타이를 열었고, 후금의 칸을 새로운 청나라의 천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구 원나라의 옥새가 홍타이지에게 전달되었으며, 특히 몽골의 구 저항 세력들이 모두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으며 청나라는 이때부터 원나라의 후예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스스로를 칸(天總汗, 만주어: ᠠᠪᡴᠠᡳᠰᡠᡵᡝᡥᠠᠨ Abkai Sure Han)에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만주어: 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로 격을 높였고, 국호를 대청(大淸,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Daicing)으로 고쳤다.
이후 본격적으로 명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청나라는 후환을 없애고 자신들의 통치를 거부하던 조선을 꺾기 위하여 1636년에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끝내 굴복시켰다. 이후 조선은 왕자들을 청나라의 섭정 도르곤의 볼모로 보내야 했다. 1650년에는 도르곤이 조선의 의순공주와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여진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꾼 것은 그들의 조상이 한때 한족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청 왕조는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구 기록을 철저하게 숨겼는데, 이는 청나라의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부족이 한때는 명나라의 통치를 받았으며 후대의 관점에서는 다소 '야만적인' 관습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조선이 여진족들을 그저 조선 북쪽에 사는 야만족으로 바라보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겼을 정도로 여진족이 한 때 중국의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컴플렉스를 가리기 위하여 청나라는 여진족들이 명나라를 섬겼다는 내용의 기록들은 불태우거나 대거 없애버렸고, 청나라 시대에 편찬된 명사에도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이 때문에 청나라 시대에 쓰여진 명 시대의 역사 기록은 딱히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받지 못하기도 한다.
1637년에는 명나라에서 넘어오는 한족 귀순병들이 워낙 많아져, 한족으로 구성된 팔기군 2군단이 완전히 만들어졌다. 이렇게 명나라의 경험많은 병사들을 끌어들이는 등의 군사적 개혁들은 홍타이지가 1640년에서 1642년까지 명나라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게다가 명나라의 황제 숭정제가 역모를 의심하고 원숭환 장군을 사형에 처해버리면서 명나라는 갈수록 멸망의 길을 향해 치달았다. 이후 명나라는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원 정복
홍타이지는 1643년 9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직후 제대로 된 승계 제도가 없던 만주족들은 귀족 회의를 통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다. 당시 홍타이지 사후 가장 유력한 권력자들은 홍타이지의 아들이었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와 홍타이지의 이복형제 도르곤이었다. 이들은 직접적인 충돌을 꺼려했고, 결국 2명 모두 황위를 포기하며 홍타이지의 5살짜리 아들을 대신 새로운 황제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이가 바로 청나라의 2대 황제 순치제이다. 이후 도르곤은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통치하였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와중에 명나라 조정은 내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고질적인 재정난이 겹치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만주족들이 승계 도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전혀 기회를 잡지 못했고, 청나라가 스스로를 칭제건원하는 것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644년 4월,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은 이자성이 이끈 반란군에 의하여 무너졌고, 이자성은 그 자리에 순 왕조를 세웠다. 한편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반란군을 피하여 자금성에서 목을 메어 목숨을 끊었고, 이로서 명나라가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베이징을 점거한 이자성은 20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을 이끌고 명나라 북부의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를 치기 위해 나섰다. 오삼계는 수없이 많은 반란군들을 보고 그 기가 질렸고, 결국 북쪽에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던 만주족과 협력하여 목숨을 보전하기로 결심했다.
구전에는 이자성이 오삼계의 여인이었던 천원원을 강제로 취하여 오삼계가 이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만주족에 붙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든 오삼계는 만주족의 편에 섰고, 그들은 함께 숭정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1644년 5월 27일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들을 꺾었다. 오삼계-만주족 동맹군은 그해 6월 6일에 베이징을 점령했다. 10월 30일에는 순치제가 자금성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천자로 선포되었다. 이자성을 꺾음으로서 스스로를 명나라의 적법한 정치적 후계자로 여기던 만주족은 명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숭정제의 장례까지 치러주기까지 했다.
도르곤이 장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들어온 직후, 그는 적은 수의 만주족으로 막대한 수의 한족을 다스림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명나라의 유신이자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던 김지준이었다. 김지준은 명나라를 섬기다가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였을 때에 그에게 투항하였으며,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왔을 때에는 그들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닦고 이후 청나라가 300여 년 동안 중원을 다스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초기 만주족 지도층들은 모든 한족들을 만주족화시키고 거부하는 자들은 사형시키는 등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펼칠 생각이었으나, 이같은 정책을 펼친다면 한족의 강력한 반발은 물론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이때 김지준은 자신을 찾아온 도르곤에게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을 제안하여 치국평천하할 계책을 알려주었다. 십종십부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종여부종(男從女不從): 남자는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즉, 만주족을 따라 체두변발하되, 여자는 예전처럼 머리모양을 그대로 한다.
둘째, 생종사부종(生從死不從): 살아서는 만주족의 습관에 따르되, 죽은 후에는 따르지 않는다. 즉, 한족의 습관대로 매장을 한다.
셋째, 양종음부종(陽從陰不從): 양계(陽界)의 일은 만주족을 따르되, 음계(陰界)의 일은 따르지 않는다. 즉, 내세를 위한 불교등 종교나 습관들은 그대로 둔다.
넷째, 관종예부종(官從隸不從): 관리는 만주족을 따르되, 노비는 따르지 않는다. 즉, 관리들은 만주족의 예법대로 화령을 달고 조주를 매며, 마과를 입으나, 노비들은 옛날과 같이 입고 행동한다.
다섯째, 노종소부종(老從少不從): 성인은 만주족을 따르되, 어린아이는 따르지 않는다. 즉, 아이일때는 한족의 원래 습관대로 하고, 성인이 된 후에 체두변발등 만주족습관을 따른다.
여섯째, 유종석도부종(儒從釋道不從): 유가는 만주족을 따르되, 불교/도교는 원래 한족의 습관대로 하고 만주족을 따르지 않는다.
일곱째, 창종우령부종(娼從優伶不從): 창기는 만주족을 따르되, 희곡을 하고 노래부르는 자들은 따르지 않는다. 즉, 경극등을 하는 경우에는 한족의 의복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
여덟째, 사환종혼인부종(仕宦從婚姻不從): 관직에 관련된 사항은 만주족을 따르되, 혼인에 관련된 사항은 따르지 않고 한족의 습관대로 한다. 결혼시, 남자는 만주족의 옷을 입되, 여자는 명나라의 복식을 한다.
아홉째, 국호종관호부종(國號從官號不從): 국호는 청나라를 따르되, 관직의 명칭은 명나라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열째, 역세종문자언어부종(役稅從文字言語不從): 노역이나 세금은 청나라를 따르되, 문자나 언어는 원래 한족의 것을 그대로 쓴다.
—김지준, 십종십부종
이 십종십부종은 도르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하여 한족을 만주화시키려는 지도부의 초기 계획이 변경되며 한족의 유구한 문화는 청나라 시대에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오히려 만주족은 시간이 흐를 수록 한족의 풍요로운 문화에 동화되어갔으며, 점차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오히려 한족화되어갔다. 김지준은 그 외에도 “기인부득경상(旗人不得經商, 만주족은 장사를 할 수 없다)”라는 원칙을 새롭게 내세웠고, 이때문에 경제권은 점차 한족들에게 장악되었다. 김지준으로 인하여 한족의 의복문화, 식문화, 생활문화들이 상당수 보존되어 현재까지 내려올 수 있었으며, 청나라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의 나머지 영토를 모조리 차지하는 데에는 이 이후에도 약 17년이나 걸렸는데, 이는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한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복명 세력들, 반란군, 참칭자들이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장군 정성공이 대만 섬으로 도망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을 하였으며, 아예 정씨 왕국을 세워 청나라 조정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정씨 왕국은 몇 십년이 흐른 강희제의 통치기에야 완전히 멸망하여 청나라에 흡수되었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 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선포한다. 다만 여자, 어린아이, 기생,속세를 떠난 종교인(이를테면 도교의 도사) 등은 제외되었다. 청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은 전체적으로는 타 민족에 대해 정책을 훌륭히 펼친 제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전과 번영
강희제의 통치
청나라는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의 재위 시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 황제의 친척이자 유력한 권력자였던 도르곤의 권력 독점을 우려했던 순치제는 4명의 보정대신(허셔리 소닌, 구왈갸 오보이, 나라 숙사하, 뇨후루 어빌운)을 임명하여 강희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 4명의 보정대신들은 황실과 핏줄로 묶여있지도 않았으며, 서로를 견제하며 황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보정대신들 중 가장 강력했던 구왈갸 오보이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황제에게 불손하게 굴기 시작했다. 물론 오보이는 역모를 꾸밀 생각은 없었으나, 그의 개인적인 오만함과 정치적 보수성은 어린 황제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1669년에 강희제는 오보이를 속여 감옥에 가두었다. 강희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노회한 대신을 15세의 어린 나이로 무찔렀다는 평가를 받아 평판이 크게 상승하였다.
초기 만주족 지도자들은 2개의 법제를 확립하여 청나라의 통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하나는 선대 왕조들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유교 사상과 관료 제도였다. 만주족 지도자들과 한족 유생들은 서로와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만주족이 실시한 과거제도가 한족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양측의 갈등이 상당히 진정되었다. 황제의 지원 하에 편찬된 강희자전은 만주족들에게 공자와 유교에 대한 배움의 필요성을 일깨웠으며, 1670년대에는 강희제가 친히 황실 칙령을 내려 유교적 가치들을 중국 전역에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다. 다만 전족과 같은 사회적 악습들을 폐지하고자 한 노력은 딱히 빛을 보지 못했다.
청나라가 사회 안정을 위해 끌어온 나머지 하나의 해결책은 만주족이 가지고 있는 중앙아시아적 특성이었다. 만주족의 중앙아시아적 특성은 만주족이 몽골족, 티베트인, 오이라트인들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는 중원에 살고 있는 한족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민족들을 야만족으로 치부하였으나, 청나라의 황제들은 이같은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나라의 황제는 한족들에게는 '황제(皇帝)'라고 불렸으며, 몽골인들의 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의 보호자였다. 특히 건륭제의 경우, 그 자신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를 보살피는 '법륜성왕'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강희제는 명나라 시절에 중국에 발을 딛은 예수회 선교사들도 포용하였는데, 특히 애덤 샬, 토마스 페레이라와 같은 무기 전문가, 수학자, 천문학자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유용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허나 예수회와의 이런 호의적인 관계는 전례 문제가 불거지고 난 이후 종결되고 말았다.
위와 같은 갖가지 방법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중국 영토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다. 수가 상대적으로 압도적으로 적은 만주족이 드넓은 청나라의 영토를 홀로 방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비슷하게 가까운 일이었기에, 청나라는 어쩔 수 없이 옛 명나라의 한족 군인들에게 방비를 밑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 편에 붙었던 오삼계와 같은 명나라 장군들 3명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번왕(藩王)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들은 중국 남부의 거대한 영지를 하사받아 막대한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다. 오삼계는 윈난성과 귀주성을 다스렸고, 나머지 장군들은 광둥성과 푸젠성을 다스렸다.
시간이 흐르자, 3명의 번왕들은 점차 힘을 키워나가며 결국 중앙정부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수순까지 이르렀다. 결국 1673년, 번왕들 중 한 명인 상가희가 강희제에게 상소를 올려 은퇴를 요청하였고, 자신의 자리를 장남에게 물려주기를 요청하였다. 강희제는 상가희의 은퇴는 허락하였으나, 그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허락치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머지 2명의 번왕들도 강희제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하여 동시에 은퇴를 선언, 후계자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주장했다. 허나 이같은 움직임은 오히려 젊은 황제를 크게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황제는 번왕들에게 하사하였던 봉토들을 모두 회수해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봉토와 작위를 모두 빼앗길 처지가 되어버린 번왕들은 더이상 남은 선택지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 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번왕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오삼계는 나머지 번왕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약 8년간 지속되었다. 오삼계는 중국 남부인들의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여 청나라에 반기를 들게 하고자 하였고,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양쯔 강까지 세력을 미쳤다. 허나 오삼계는 명나라를 다시 재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조를 세워 황위에 오르고자 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동료 번왕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는 데에 실패했고, 결국 양쯔 강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을 망설이며 강희제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세를 가다듬을 기회를 주어버리고 만다. 강희제는 새로이 구성된 만주 군대를 가지고 역습을 감행했고, 1681년경에 이르자 청나라 정부는 몇 십년 만에 다시 중국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한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족으로 구성된 녹영군을 주로 동원하였다. 강희제는 특히 한족 장군들을 임명하여 한족 반란진압의 선두로 내세웠는데, 이는 만주족 장군들을 내세우기보다는 한족 장군을 내세워 반란군 사이에서의 분열을 유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북서부에서 청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녹영군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는데, 이는 기병 위주의 만주족들보다는 보병 위주의 한족들이 산악 지대인 중국 북서부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족 장군들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였고,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였다. 특히 이들의 활약은 삼번의 난에서 두드러졌다. 청나라의 만주족 군대가 1673년에 오삼계 군에게 대패하였을 때 청나라의 편을 들었던 한족 군사들은 오삼계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이에 강희제는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팔기군을 쓰는 대신 무려 90만명에 달하는 한족 군대를 동원, 오삼계의 세력을 꺾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청나라의 세력을 중앙 아시아에서 뻗치게 하기 위하여, 강희제는 친히 중가르족을 상대로 외몽골 지역에 원정을 실시하였다. 강희제는 성공적으로 중가르 칸국의 칸이었던 갈단의 침략군들을 외몽골 지역에서 몰아냈고, 제국의 권역으로 편입시켰다. 참고로 청-중가르 전쟁에서 갈단은 전사했다. 이후 갈단의 패잔 세력들이 청나라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대신 티베트로 도망쳐 달라이 라마의 힘을 빌어 청나라에 대항하려 하자, 강희제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에 친화적인 달라이 라마를 새롭게 세워버렸다. 1683년, 청나라는 대만 섬을 지배하던 정씨 왕조의 마지막 왕 정극상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다. 정극상은 청나라를 상대로 맞서기 위해 대만으로 도망친 명나라의 장군 정성공의 손자이기도 하였다. 정극상은 이후 해징공(海澄公)의 작위를 받았고, 베이징의 고위 권력층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대만이 청나라와 통합된 이후에도 명나라의 후손들 몇몇은 여전히 대만에 남았으며, 청나라가 귀국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섬에서 여생을 보냈다.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 안정을 꾀하였다. 참고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청나라가 처음으로 서구 세력들과 맺은 근대적 조약으로, 이후 약 200여 년동안 청과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을 잠재웠다.
강희제는 약 61년간 재위하며 청나라의 경제력,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17세기 후반, 중국은 청나라의 지배 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명나라 이래 가장 안정적이고 발전된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을 갖추었다.
옹정제, 건륭제의 통치
청나라는 강희제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와 건륭제 시기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무려 1,3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다스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삼대에 이은 청나라의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허나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와 안정으로 인하여 결국 건륭제 말기에는 점차 쇠퇴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두고 서양 학자들은 '오후의 태양'과 같았다고 평했다. 즉 더없이 밝게 빛나지만, 점차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희제가 1722년 겨울에 사망하자, 강희제의 네 번째 아들인 옹친왕(雍親王)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다. 강희제 말기에는 강희제 사후 황제의 자리를 두고 윤진을 비롯하여 형제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 다툼으로 인하여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에 대해 말이 많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소문으로는 강희제가 사실 윤진이 아니라 14번째 아들인 윤제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윤진이 유언을 조작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료는 없으며, 강희제는 실제로 윤진과 함께 정무를 처리하였으며, 중대사를 그에게 일임할 정도로 윤진을 매우 신임하였다. 한편 옹정제가 45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른 직후, 그는 강희제 말기부터 쌓여왔던 국가의 병폐들을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옹정제는 강희제 때부터 이미 정무 대소사를 맡아왔던 터라 정치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고, 이 경험이 옹정제의 선천적인 조심스럽고, 질투 많고 의심이 많은 성품, 그리고 매우 뛰어난 개인적인 능력과 합쳐지자 옹정제는 즉위 직후부터 가히 명군이라 불릴만한 치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옹정제는 빠르게 행동했다. 먼저 그는 유교의 기틀을 다잡았고, 당시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었던 유학자들 중 자신이 비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숙청하여 유교 계통을 일원화했다. 1723년에는 그리스도교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선교사들을 대거 쫒아냈다. 다만 실질적인 학문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소수 선교사들은 수도에 그대로 남아있게 해주었다. 옹정제는 강희제 때 만들어진 '장표(章表)' 제도를 확충했는데, 이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장계들이 복잡한 관료제도 사이에서 사라지거나 누락되는 일 없이 곧바로 황제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군기처를 설치하여 군기대신들을 임명, 개인적인 조언들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 군기처의 권한이 확대되어 제국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옹정제는 한족 관료들과 만주족 관료들을 적절히 섞어 채용하며 양쪽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하였다. 특히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재정난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옹정제는 지방 지주들에 대한 대우를 훨씬 더 엄격히 하였으며 토지세를 더 내도록 압박하였다. 이렇게 더 겇힌 세금들은 지방 관리들의 봉급, 치수 사업, 학교, 토목 사업, 자선 사업 등에 쓰였다. 이러한 재정적인 개혁 조치는 중국 북부에서는 그나마 잘 먹혀들었으나, 지주들과 관리들이 서로 깊이 결탁하고 있던 양쯔강 이남에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옹정제도 이 문제점을 인지하여 만주족 장군들을 보내면서까지 양쯔 강 이남에도 조세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반발이 워낙 극심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재정난은 옹정제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옹정제는 외교적인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쏟았다. 그의 재위기에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협상단이 러시아와의 외교 갈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캬흐타 조약을 1727년에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무역권을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맞바꾸었는데, 러시아 상인들에게 무역 이권을 주는 대신 외몽골에 대한 전적 권한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또한 중가르 족과 중국 남서부의 묘족이 다시 준동하자 옹정제는 이들도 빠르게 진압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군대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옹정제는 1735년에 죽었다. 이후 그의 24살 아들인 보친왕(寶親王)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하였다. 건륭제는 신장과 몽골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수많은 군사 정복을 감행하였고, 티베트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는 동시에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빠르게 진압하는 등 수많은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건륭제는 군사적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고전서의 편찬을 지시했는데, 사고전서란 총 3,400권이 넘는 중국 전통 문학 전집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양의 도서물이었다. 다만 건륭제는 사고전서 발행 작업 도중 검열도 많이 하였는데, 만일 특정 간행물이 황제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청나라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면 이를 빼버리거나 아예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서 작업은 순치제와 강희제 때부터 내려온 것이기는 하였으나, 건륭제 시기에 들어서는 아예 주기적으로 진행되며 정기적인 행사가 되어버렸다. 건륭제 시기에만 총 53번이나 도서 검열 작업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건륭제 통치 말기, 제국은 외형상으로는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젊고 잘생긴 만주족 장군 화신은 황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며, 중국 역사상 최악의 간신들 중 하나로 남았다. 화신의 패악이 워낙 극에 달했기에, 건륭제가 죽은 직후 즉위한 가경제는 곧바로 화신을 자살하게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점차 과잉인구로 신음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내전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어느 정도 조절이 되었는데, 번영과 안정이 워낙 오랫동안 지속되자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유입된 감자와 땅콩과 같은 작물들은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렸기에 인구 증가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18세기 동안 중국의 인구는 1억 명에서 3억 명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농지가 태부족해졌고, 농민들은 더 비좁고 힘들게 일해야만 간신히 먹고 살만큼 벌 수 있었다. 건륭제도 이와 같은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인구는 계속 느는데 땅은 그렇지 못하구나'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당시 청 제국에서 유일하게 농사가 가능한 지역들 중 사람들이 아직까지 많이 개척하지 않은 곳은 만주 지역이었는데, 이 곳은 청나라가 만주족의 발원지로 신성시하던 지역으로 한족의 출입을 금지하였던 곳이었기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 부족들도 청나라의 한족 거주 구역으로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제한되었고, 심지어는 서로 다른 부족들 간에 왕래도 엄격히 통제하였다. 이는 몽골인들이 서로 힘을 합쳐 청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가 컸다. 몽골 순례자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그들 부족의 땅을 잠시 떠나고 싶어할 때조차 청나라에서 특별히 발급한 통행증을 받아 이동해야만 했다. 다만 청나라가 이같이 만주 지역에 한족의 출입을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 흉작과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는 한족 유민들을 어쩔 수 없이 만주 지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족들은 만주로 합법적, 불법적인 방법 모두를 이용하여 밀려들었고, 만주 지역의 지주들도 그들을 이용하여 땅을 개간하고 싶어했기에 그들을 딱히 막지 않았고 오히려 환영하기까지 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한족 농부들은 거의 50만 헥타르에 달하는 농지를 경작했으며, 이 중 203,583 헥타르는 귀족, 팔기군, 나라 소유의 토지였다. 또한 한족들은 만주 지역 일대의 인구 가운데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그 인구를 늘렸다.
1796년, 백련교는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선포하였고, 결국 백련교도의 난이 터져 1804년까지 약 8년 동안 지속되었다. 백련교도의 난은 청나라의 번영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 때부터 청나라는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쇠퇴와 반란
중화 제국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며, 조공을 바탕으로 한 외교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이번원과 예부가 몽골, 티베트 등의 속국들과의 관계를 관할하였고, 명나라 시절부터 내려온 느슨한 조공, 사대 체제가 동아시아 국가들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와도 그럭저럭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중화 헤게모니는 18세기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유럽 열강들이 점차 해양 무역을 바탕으로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세워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열강들은 인도를 장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과 가까운 인도네시아 지방의 섬들까지 대거 자신들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켰다. 당시 나라는 1756년에 광동 체제를 설립하여 오직 광저우에서만 유럽인들과의 무역을 허가하고 중국 상인들에게만 독점적인 무역 이권을 부여하고 있었고, 영국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각국의 허락을 받아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되게나마 독점하고 있었다.
1793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의 지원 하에 조지 매카트니 경을 필두로 한 사절을 중국으로 보내 평등, 호혜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허나 당시 청나라 조정은 영국과는 다르게 무역을 딱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굳이 서양 세력들과 문호를 개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건륭제는 매카트니 경에게 '조공국들의 왕들이 온갖 값진 것들을 들고 우리에게 바치러 온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그대와 무역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전해진다.
청나라 조정이 제한적이고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무역만을 허가했기에 유럽 무역 회사들은 중국으로 은을 주는 방법으로 물건들을 사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비단, 차, 도자기와 같은 중국제 물품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이 무역을 멈출 수도 없었던 것이다. 1700년대 후반에 이르자,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너무나 많은 양의 은이 순손실되고 있다는 점을 파악, 이를 해결하려 시도하였다. 이 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강력한 마약인 아편이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점차 아편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눈치빠른 서양열강세력들은 이를 사업 기회로 포착한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벵갈 지방에서 아편의 생산을 크게 늘렸고, 이를 중국에 수출하여 무역으로 인한 영국의 은 유출을 상쇄시키고자 했다. 이 작전은 대성공했고, 마약 무역은 극도로 성행하여 급기야는 이제 청나라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도광제는 은의 유출,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를 막기 위하여 임칙서를 파견하여 아편 무역을 뿌리뽑을 것을 명령했다. 임칙서는 1839년에 무역항에서 영국 상인들과의 합의도 받지 않은 채 아편 상자들을 몰수하여 태워버리는 등 강경책을 펼쳤고, 이는 결국 영국 정부의 반발을 사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중국을 갈라먹고 있는 열강 세력
이후 발발한 1차 아편 전쟁은 청나라 군대의 취약성, 무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목재 정크선으로 구성되어 있던 청나라 해군은 현대적인 장비와 전술을 갖춘 영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밀렸고, 더 발전된 총기와 대포를 갖춘 영국 보병들은 지상전에서 청나라 육군을 쓸어버렸다. 청나라는 1842년에 결국 항복했고,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크디큰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중국을 낮잡아보기 시작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전쟁 종결 직후 난징 조약이 1842년 체결되었고, 이로서 상하이, 광저우 등 5개의 항구가 서양에 강제로 개항되었으며 홍콩 섬은 아예 영국에 99년동안 임대시켜야만 했다. 이같은 굴욕적인 조약은 청나라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왔고, 그동안 쌓여왔던 만주족 통치에 대한 반감과 합쳐져 이후 청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에서 일어난 한족의 첫 대대적 반-만주 운동이었다. 최악의 기근과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빠르게 퍼진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 권력층에게도 엄청난 위협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내전으로 불리며 중국의 국력 자체를 크게 깎아먹었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약 14년 동안 지속되었고, 2천만에서 3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추정된다. 태평천국의 난은 시험에 낙방한 유생 홍수전이 일으켰는데, 1851년에 구이저우 성에서 시작하였으며 그 세가 점차 커지자 태평천국을 선포하고 왕을 자칭했다. 홍수전은 그가 신의 환각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고 믿었다. 태평천국에서는 노예제, 조혼, 아편 흡입, 전족, 사법 고문, 우상 숭배 등이 모두 금지되었으며 나름대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도 하였다. 허나 태평천국의 너무나 빠른 성장은 내부적인 분열과 부패를 불러왔다. 게다가 외세를 배척하는 태평천국과 홍수전의 사상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 열강들은 청나라의 편에서 반란 진압을 도와주기로 결정하며, 군대를 투입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자 했다. 1864년이 되어서야 증극번의 지휘 하에 반란이 진압되었으나, 청 제국은 이미 회복 불가능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반란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아 이후 무슬림들과 묘족들, 그 외 소수민족들도 독립을 요구하며 청나라에 연쇄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서구 세력들은 이전에 맺은 난징조약으로만은 성에 차지 않았고, 태평천국의 난과 그 외 반란들에 군대를 파견하여 청 정부를 도와준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약을 맺어줄 것을 강요했다. 한편 청나라는 반란 도중 막대한 농토가 파괴되어 세입이 급격히 줄었으며, 수백만 명의 국민들을 잃었으며 점차 영토에 대한 통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수없이 많은 독립적인 군사 세력들이 힘을 길러 스스로를 지키려 하였으며, 일부는 자경단이나 군벌로까지 발전하였다. 1854년, 영국은 난징조약을 재검토하여 줄 것을 요구했고 영국 상인들이 단순히 항구뿐만 아니라 중국의 강들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인근 도시에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베이징에 영구적인 영국 대사관을 설치해 줄 것을 강요했다.
1856년, 청나라 관리들이 해적을 찾기 위하여 영국 국적의 배 위에 허가 없이 올랐고,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찾던 영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썩어가던 청나라 군대는 이 전쟁에서도 속절없이 무너졌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는 1858년에 톈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모든 중국 공문서에 한자와 함께 영어를 혼용하여 함께 써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모든 영국 군함들에게 항해 가능한 모든 중국의 강에 대한 출입을 허가한다는, 일종의 말도 안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에 중국인들은 이 조약으로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을 이미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서구 세력이 톈진 조약을 바로 다음 해에 개정하지 중국인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군했고 황제와 조정은 수도를 버리고 청더로 피난을 갔다. 베이징에 입성한 서구 군대는 황제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을 약탈, 방화시켜버렸다. 베이징에 남아있던 공충친왕 혁흔이 황제 대신 베이징조약에 강제로 서명했고, 이 조약을 통해 중국은 또다시 막대한 이권을 빼앗겼다. 당시 영국,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은 러시아제국에게는 연해주를 할양하였고, 베이징에는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영구 허용했던 것이다. 한편 청더로 도망친 황제는 그 다음해에 바로 사망했다.
실패한 개혁
청나라는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좌종당 같은 몇몇 유능한 관료들은 반란을 진압하고 만주족의 편을 들어 중국을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동치제가 1861년에 5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을 때, 이러한 개혁파 관료들은 '동치중흥'이라 하여 중국을 개혁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발표했다. 그들의 목표는 유교적 가치는 지켜내는 동시에 오직 서구의 군사 기술만 받아들여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증국번과 같은 관리들은 이홍장과 같이 상대적으로 젊은 관리들을 키워 인적 자원들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참고로 이홍장을 위시한 이 한족의 리들이 청나라를 일부 경제적으로 안정시켰으며 양무운동을 통해 청 개혁을 주도한 것이다. 개혁파 관리들은 중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교만 전담하는 전문 기구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창설, 외국 외교관들이 베이징에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 해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 해관을 개설하고 서양에서 무기들을 수입하며 북양함대와 같이 현대적인 군대를 키우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청나라는 점차 영토들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조 하에 러시아 제국은 1860년에 연해주를 통째로 가져갔고, 다른 서구 세력들도 각종 명분으로 영토들을 빼앗아 갔다. 한편 개혁파 관료들과 서구 세력 간의 협력은 1870년에 일어난 톈진 교안으로 단절되었다. 참고로 톈진교안이란 톈진에서 발생한 반기독교적 폭동으로, 프랑스 수녀원에서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절대다수의 수녀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프랑스는 1858년에 코친차이나 원정을 시작,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했고 나중에는 중국과 국경을 접할 정도로 그 세를 불렸다.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청나라와 갈등이 쌓이다가 결국 청프전쟁이 터졌고, 이 전재에서 또다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1885년에 톈진조약(1885년)을 맺으며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1884년에는 일본에서 교육받은 조선의 개혁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때 청나라가 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내에 군대를 투입하면서 일본과의 갈등이 커졌는데,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맺고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수하기로 합의보며 일단락되었다. 허나 1895년에 발발한 1차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했고 타이완 섬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본디 일본은 청나라에 더 심한 요구를 할 작정이었으나, 일본의 시민들이 중국의 대표로 참석한 이홍장을 공격, 상처입힘에 따라 국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일본의 영향력이 동아시아에서 커지는 것을 원치않던 러시아가 삼국 간섭을 통하여 일본에 압력을 넣어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이때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까지 패배함에 따라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났고, 청나라의 구시대적 봉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신기술만 적용하려 하였던 표면적인 개혁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에는 서태후가 점차 국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850년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고, 1861년에 그녀의 5살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오름에 따라 권력을 잡게 되었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섭정을 통하여 아들을 제치고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다만 동태후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거의 섭정은 서태후가 한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서태후는 1861년부터 1873년까지 섭정을 하였는데, 이때 서태후가 직접 동치제의 연호를 '동치', 즉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로 정한 것이다. 1875년에 동치제가 서거하자, 서태후의 조카인 광서제가 황위에 올랐다. 서태후는 광서제 재위기에도 섭정을 자처했고, 1881년 봄에 동태후가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독보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889년부터는 광서제가 성년에 이르러 스스로 통치하기 시작했고, 서태후는 여름 궁전에서 반쯤 은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중 1897년 11월 1일, 2명의 독일 가톨릭 선교사들이 산둥성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은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자우저우 만을 해군력으로 강제 차지했다. 1898년은 중국에게 '치욕의 해'로 기억되는데, 이 해에 독일은 자우저우 만을,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영국은 홍콩을 강제로 할양받았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사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광서제는 무술변법, 즉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국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1898년에 캉유웨이·량치차오와 같은 더 급진적인 개혁 세력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을 한 개혁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황제는 여러 칙령과 계획을 짜고 봉건적 체제를 개선하고,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서구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을 임명하여 국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허나 기존 권력층의 반대는 완강했다.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들은 이에 극심하게 반발했고,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위안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킨 직후 광서제를 유폐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개혁주의자들을 처형하고 정책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렸다. 다만 서태후 자신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지하고는 있었기에, 변법자강운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몇몇 중요한 개혁조치들은 그대로 유지하기까지 했다.
이후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기록적인 가뭄이 유럽 열강들의 교묘한 간섭과 청나라의 불안정과 합쳐지자, 민심은 유례없을 정도로 들끓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나 외국 선교사들을 학살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 죽였으며, 청나라의 묵인 하에 점차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의화단원들은 베이징의 조계에 침입하여 외국인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 일본, 러시아 군대가 합쳐져 만들어진 8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아무런 통지 없이 진입했고, 서태후는 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허나 청나라 군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쳤고, 베이징과 자금성은 연합군에게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연합국들은 청나라에게 엄청난 이권 침탈 관련 요구를 담은 베이징의정서 체결을 요구했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출전하는 데에 쓴 비용마저도 모두 청나라가 지불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반대할 힘이 없었고, 이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혁명과 멸망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20세기 초에 이르자, 중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으며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서태후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01년에 황실 칙령을 내려 전국의 관리들에게 개혁 정책을 필 것을 요청했고, 청말신정이라 하여 청나라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청말신정은 과거의 그 어떠한 조치보다도 가장 폭넓게 실행된 청나라의 마지막 개혁 정책으로, 국가 주도 교육 시스템의 설립과 1905년의 과거제 폐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편 유폐된 채 살고 있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에 생을 마쳤고, 바로 다음 날에 서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서태후 혹은 위안스카이가 환관들을 시켜 일부러 광서제를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후 광서제의 시신 부검한 결과, 치사량을 훨씬 상회하는 양의 비소가 그의 몸 속에서 발견되며 사실로 밝혀졌다. 어쨌든 광서제가 죽은 이후 광서제의 조카이자 순친왕(醇親王)의 아들이었던 푸이가 2살의 나이에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순친왕이 섭정을 맡았으며, 그는 섭정기 동안 위안스카이 장군을 직위해제하고 권력을 박탈했다. 1911년 4월, 순친왕은 거의 대부분이 황족으로만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는 장지동과 같은 원로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결국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며 청나라는 중국의 중앙정부 지위를 쑨원이 건국한 난징의 중화민국에게 뺏기고 만다.
이후 많은 지방들이 청나라에게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급박해진 청나라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불러 다시 군사권을 일임하였다. 내각총리대신의 자리를 얻은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내각을 따로 구성하였고, 나중에는 황제의 친부인 순친왕을 섭정에서 면직해버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완전한 독재자로 군림했으며, 청나라 황실과 선통제는 허울만 남은 껍데기였으며 청나라의 모든 실권은 위안스카이에게 있었다.
위안스카이와 북양함대의 지휘관들은 중화민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소모적이고 딱히 얻을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쑨원도 막강한 군력을 가진 위안스카이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이제 막 건국된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협상을 벌였다. 쑨원은 자신의 목표가 민주적인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며, 이 목표는 이미 중화민국 건국을 통해 이루었다면서 만일 위안스카이가 원한다면 중화민국 총통의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이어지던 협상 끝에 황실 최고 어른이었던 효정경황후는 선통제를 폐위한다는 내용의 황실 칙령을 발표했다. 이로서 2천년 간에 달했던 중국의 군주제가 막을 내렸으며 청 황실 자체는 몰락을 겨우 면하고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자금성 내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한 채 사직을 이어갔으나 이마저도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1930년대에 일본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1932년에 만주국을 세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만주국의 황제로 세우지만, 보통의 경우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으로 청나라의 후신으로 보지 않는다. 만주국은 1945년에 소련의 공격으로 인하여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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