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청나라서 문화 충격… “오랑캐 따위? 배울 건 배워야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 대표적 실학(實學)자로 꼽히는 인물이에요. 최근 그가 쓴 유명한 한문 소설인 ‘허생전’과 ‘양반전’에 대해 학계에서 잇따라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실학자 중에서도 박지원은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선진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물질 경제를 풍요롭게 하자고 했던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나라의 경제 발전 보고 충격 받았어요
“아니 저런! 평범한 백성들도 벽돌을 쌓아 2층집을 짓고 살잖아?”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을 따라 중국에 갔던 박지원은 벽돌로 만든 청나라의 민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문만 닫으면 금고처럼 돼 도둑이 들어가지 못하겠네. 우리 조선 사람들은 벌레가 우글거리는 초가집에서 살고 있는데…” 중국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돼 수레나 선박 교통이 원활한 것도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문화 충격’을 받았던 걸까요? 활발한 해상 무역을 벌였던 고려 때와는 달리 조선 왕조는 1876년 개항 전까지 선진 문물을 전파받을 수 있는 통로가 사실상 중국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새로운 중국 왕조로 들어서자, 조선 사대부들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하며 청나라의 문물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조선이 낙후돼가는 동안 정치적 안정을 찾은 청나라는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죠.
“배울 건 배워야지! 우리도 벽돌과 수레를 널리 쓴다면 훨씬 잘살 수 있을 텐데…” 중국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훗날 고전이 된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습니다. 이 책에서 청나라의 장점을 본받는다면 국내 산업과 문명의 수준을 높이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부국론(富國論)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선 깨진 기와 조각으로 담과 뜰을 꾸미고 버려진 똥을 알뜰히 거둬들여 거름으로 비축한다”며 철저한 실용 정신을 높이 샀죠.
◇풍요롭게 사는 게 도덕보다 먼저일세
서울의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던 박지원은 젊어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고, 50세가 돼서야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박제가·유득공·홍대용·이덕무 같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죠. 박지원은 ‘정치, 사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선(先) 이용후생(利用厚生), 후(後) 정덕론(正德論)’이라고 합니다. ‘이용후생’, 즉 ‘기구를 편리하게 써서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먼저고, ‘정덕’, 즉 ‘덕을 바로 세워 도덕적으로 교화(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대다수 조선 성리학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죠. 박지원은 농업 기술과 생산에 대해 다룬 ‘과농소초’를 쓰기도 했습니다.
◇백성은 족쇄 풀고, 양반은 양반답게
박지원이 쓴 ‘허생전’과 ‘양반전’ 등은 한국 문학사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허생전’은 독과점(한 개인이나 단체가 시장의 이익을 독차지함) 판매로 큰돈을 번 주인공 허생이 도적들을 섬으로 데려가 살게 한다는 이야기로 ‘상업을 진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석돼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엔 허생이 벌어들인 거금을 바다에 버리거나 빈민 구제에 썼다는 점을 지적하며 “박지원은 백성이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이상 사회를 꿈꾼 일종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강명관 부산대 교수)고 주장하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양반전’은 지체 낮은 신분의 부자가 가난한 양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양반 신분을 사려다가 양반의 온갖 거추장스러운 ‘행동 지침’을 듣고 놀라 포기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신분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담았다’는 해석이 있었는데, 최근엔 “고리타분하고 무능한 양반을 풍자한 것일 뿐 신분제와는 무관한 작품”(계승범 서강대 교수)이란 의견이 나왔죠. 새로운 해석이 다 맞는다면, 박지원은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억압이 없길 바랐고, 그러면서도 신분제 자체를 없애기보다는 양반이 ‘선비다운 선비’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던 개혁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유머 감각 풍부했대요]
지금 전해지는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는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작품이에요. 풍채가 당당하고 눈빛이 대단히 날카로운 인상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외모와는 달리 무척 유머 감각이 풍부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열하일기’에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을 하는 사신단을 보고 혼자서 ‘잘못돼서 귀양 가면 중국 이곳저곳 구경하고 다니겠네!’라 생각하며 흐뭇해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인상 험악한 손님들이 득실거리는 걸 보곤 큰 그릇에 담긴 술을 한번에 벌컥 마셔버려 주변 사람들 기를 죽였다는 일화도 적었죠.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조림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나쁜지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라고 시시콜콜 적은 것이 있는데 ‘요즘 엄마·아빠가 자취하는 자식들한테 보낸 문자 같다’며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석재 기자/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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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 박지원의 中 기행문 '열하일기', 156일 淸 여행 기록
청나라 新문물·제도 등 자세히 묘사… 속어와 농담 등 섞어 소설처럼 써
조선 후기 '문체반정' 발단.. 정조, '불순하다'며 출판 금지시켜..
얼마 전 조선 후기 문신(文臣·문과 출신 관리)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 원본이 우리말로 출간됐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박지원이 1783년 완성한 열하일기는 당시 큰 인기를 끌며 전국으로 퍼졌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베껴 쓰면서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그런데 2010년 한 대학의 고문서(古文書) 더미에서 열하일기 초고본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7년여 만에 우리말 완역본이 나온 것이지요.
많은 지식인이 열하일기를 '조선 최고 여행기' '조선 최고 명문장(名文章)'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하지만 당시엔 정조 임금의 지시로 출판이 금지되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요.
◇소설만큼 흥미진진한 기행문
1780년(정조 4년) 박지원은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갔어요. 평안북도 의주를 출발해 베이징을 거쳐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열하(熱河) 지역, 즉 오늘날의 청더(承德)를 여행하게 됐지요. 당시 열하는 베이징에 버금가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는데, 박지원은 열하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머무는 156일 동안 놀랍게 발전한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 과학기술을 목격할 수 있었어요. 또 청나라 학자뿐 아니라 몽골·티베트인들과도 교류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세계와 문화를 경험하게 됐어요.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 박지원은 이런 한탄과 함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청나라의 좋은 점을 조선에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한양에 돌아와 기행문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열하일기랍니다.
열하일기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 글이 재미있다는 점이었어요. 박지원은 여행에서 목격한 기묘한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 낯선 문물을 자세히 묘사했어요. 마치 독자가 청나라를 직접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요. 또 토속적 속어(俗語·점잖지 못한 상스러운 말)뿐 아니라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어요. 여행 중 느꼈던 자기감정과 처지도 솔직하게 표현했고,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장면 중심으로 구성해 흥미를 불러일으켰어요.
어떤 사건을 묘사할 땐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쓰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이상한 꿈자리를 묘사하고 이후 벌어진 소동을 자세하게 쓴 뒤 맨 마지막에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식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냈지요. 이런 문체는 당대 유학자들이 쓰던 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어요.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 소설인 '호질'과 '허생전'도 바로 열하일기에 담긴 작품이랍니다.
◇"불순한 글… 속죄하라"
이렇게 재미있는 글이었지만, 열하일기 문체(文體·문장의 특색)는 당대 기득권층의 비난 대상이 됐어요. 박지원이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열하일기를 낭독할 때, 박남수란 인물은 열하일기를 촛불에 불태워버리려고 했지요. "선생의 글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유학(유교) 본래의 도리에 맞는 고문체(古文體)가 아니고 이야기책 투입니다. 열하일기 때문에 우리나라 문장이 모두 고문을 버리고 이야기 투 글이 될까 크게 걱정됩니다!"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를 경계했어요. "요즘 바탕을 알 수 없는 불순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박 아무개(박지원) 죄가 아닐 수 없다. 열하일기는 나도 이미 익히 읽어보았는데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한 뒤로 문체가 이를 따라 함이 많으니…."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정(醇正·순수하고 올바름)한 글로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지시했고, 이야기 투로 글을 쓰는 신하들에게 '불순한 문체를 쓴다'고 반성문을 쓰게 했지요. 정조는 오직 '논어' '맹자' 같은 고전에서 쓰는 딱딱하고 전통적인 글만을 쓰도록 했어요. 이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고 해요.
정조는 왜 문체반정을 실시한 걸까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더 견고하게 해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 후기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주장이 많아요. 백성이 자기감정이나 상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야기에 빠져들면 도덕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분제가 흔들리고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지요.
이후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열하일기를 잡서(雜書)로 규정해 출판을 금지했어요. 이 때문에 열하일기는 1901년 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될 때까지 필사본(손으로 쓴 책)으로만 퍼졌답니다. '문체반정'은 모처럼 싹트려 했던 조선 후기 문학 발전을 방해하고 백성의 꿈틀대던 욕구를 억누른 조치였다는 평가가 많아요.
[호질과 허생전]
열하일기에 수록된 '호질'과 '허생전'은 조선 후기 양반의 위선을 비판한 한문 소설이에요. 호질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사실은 타락한 양반인 북곽 선생을 호랑이가 꾸짖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허생전은 책만 읽으며 일하지 않던 양반인 허생이 어느 순간 장사꾼으로 변신한 뒤 겪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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