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새로 쓴 뜻밖의 발견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 인사동 한복판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랜 세월 유럽인들은 이집트 피라미드와 벽화, 석상, 비석 등에 남아 있는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싶어 안달했다.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가 항구도시 로제타에서 글이 깨알같이 새겨진 돌덩이 하나를 발견했는데, 고대 그리스어와 이집트 민중문자, 상형문자로 같은 내용을 적은 것이었다. 이 기막힌 행운이 고대 이집트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프랑스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고대 그리스어를 발판 삼아 상형문자 해독의 비밀을 찾아냈다. 람세스 등 파라오 27명의 이름도 그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역사를 다시 쓰게 한 고고학 업적 상당수가 뜻밖의 발견 덕분이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그렇다. 1900년 둔황 막고굴에서 살던 도사 왕위안루와 그의 조수들이 굴을 청소하다가 한 동굴 벽 뒤에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벽을 부쉈다. 또 다른 방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옛 문서와 그림 수만점이 쏟아져나왔다. 그중 하나였던 왕오천축국전은 처음엔 중국 승려의 글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 승려 학자 오타니 고즈이의 연구로 혜초의 신분이 밝혀졌다. 당(唐)에 유학 가 인도까지 다녀온 신라 승려가 1200년 시공을 넘어 우리와 만났다.

▶세계 해저 고고학의 일대 사건으로 꼽히는 신안 유물 발굴도 1975년 여름, 어부의 그물에 걸려 나온 도자기 6점에서 시작됐다. 이듬해 1월 어부의 동생이 형 집에 도자기가 있는 것을 보고 당국에 알린 게 2만4000여점 유물 발굴로 이어졌다. 목간 364개도 함께 나왔다. 그 덕에 종이에 썼다면 흔적 없이 사라졌을 소중한 기록들도 세상에 드러났다. 1323년 중국 닝보를 떠나 일본 하카타로 가던 배였다는 사실, 물품 내역과 수량·상인과 구매자 이름까지 알 수 있었다.
▶서울 인사동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금속활자가 엊그제 공개됐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였던 표기가 반영된 한글 금속활자가 포함돼 있어 15~16세기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명으로 1434년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일 가능성이 있는 한자 활자도 나왔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 바닥을 파고 발굴하던 중에 뜻밖의 노다지가 쏟아졌다. 수백년 전 민가 창고였을 수 있다니 무슨 소설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갑인자는 조선 시대 인쇄술의 꽃으로 불리지만 인쇄본만 전할 뿐 활자는 남아 있지 않다. 구텐베르크 성경도 인쇄본만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출토된 한자 활자가 갑인자라면 조선 최고(最古)의 금속활자이자 세계 인쇄사를 다시 써야 할 대단한 발견이다. 후속 연구를 통해 밝힌다니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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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古·最高’ 금속활자

조선시대 세종이 지시해 만든 금속활자가 ‘갑인자(甲寅字·1434년)’다. 천문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만든 활자라서 품질이 뛰어나다는 게 국내 서지학계의 평가다. 조판 기술이 대폭 개선돼 활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찍혔고 인쇄 속도도 두 배로 빨라졌다. 가장 큰 특징은 서체의 세련된 아름다움이었다. 그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활자를 포함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대거 발굴됐다.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출토된 금속활자는 한자 1000여 점, 한글 580여 점 등 역대급이다. 특히 한자 활자는 국내에서 가장 수준 높은 금속활자, 한글 활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여서 의미가 크다. 한자 활자는 최소 6점이 갑인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공인되면 1440년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국내 한자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실물이 극소수 있지만 그 수준이 갑인자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지금까지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을해자(乙亥字)’ 30여 점(1460∼1480년 제작으로 추정)이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로 통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한글 금속활자는 세종 때 간행된 국내 최초의 음운서인 동국정운(1448년)식 표기법을 따랐다. 세조 때 ‘능엄경언해’(1461년)와 닮은 을해자 글자체이기는 해도 동국정운에 나오는 ㅱ, ㅸ, ㆆ, ㆅ 등을 새긴 활자다. 바로 이 점에서 전문가들은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가 이번에 발견됐다고 본다.
▷금속활자 발굴을 계기로 한글과 세종에 대한 재발견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대중이 읽고 쓸 수 있게 한 금속활자야말로 획기적인 뉴미디어”(김용찬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천문학에서 활자를 도출한 세종은 한국판 레오나르도 다빈치”(한재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등의 평가도 나온다. 어쩌면 한글은 국제무대에서 더 잘나간다. 유네스코가 1990년부터 문맹 퇴치에 기여한 인물이나 단체에 주는 상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다. 최근엔 해외 제품 디자인에도 한글이 단골로 등장한다. 김슬옹 한글학자는 “직선과 원으로 이뤄진 한글의 간결한 글꼴은 미학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세종이 동국정운을 펴냈던 것은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양반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젠 한글에 세계인이 관심을 갖는다. 한글을 과학의 측면으로도, 예술의 측면으로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고 연구해야 할 때가 왔다. 주요 사료로 보존해야겠지만 젊은층이 애용하는 한글 서체 개발에도 활용할 방법을 찾으면 좋겠다. 그래야 박물관 속 금속활자가 아닌 미래의 한글이 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동아일보(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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