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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개혁, 남한은 친일파 부활? 100만 월남민의 실상은 달랐다]

뚝섬 2026. 3. 11. 09:44

[북한은 개혁, 남한은 친일파 부활? 100만 월남민의 실상은 달랐다]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의 뒤틀린 역사관] 

[‘점령군’ 논란, 비겁한 변명 말고 역사관 당당히 밝히라]

[“청춘은 청춘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북한은 개혁, 남한은 친일파 부활? 100만 월남민의 실상은 달랐다

 

[월남민의 규모와 사회적 다양성]


빈농·노동자 포함한 광범위한 계층
소련 군정에 불만 품고 38선 넘어
해방 직후 北 체제의 '혁명' 미화한
수정주의는 실상과 맥락 반영 못해

 

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해방 직후 38선은 분단의 경계선으로 변해갔다. 1947년 10월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일가족이 미군 병사와 마주하고 있다. 팻말 왼쪽에는 영어로 ‘미국 점령지, 북위 38도, 남한’ 오른쪽에는 러시아어로 ‘러시아 점령지, 북위 38도, 북한’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일보DB

 

해방 후 남한의 역사는 소련 군정 하에 이뤄진 ‘북한 혁명’의 실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 시기에 수많은 이북 사람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월남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대체 그들은 누구였으며 왜 고향을 떠났는가?

 

수정주의 학설의 영향을 받은 연구자들은 소련 군정하의 북한 체제가 민족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조치를 취한 반면,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지배 아래 친일파가 되살아나고 식민지적 억압 기구가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6·25전쟁 전 38선을 넘은 월남민의 실상과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시기의 월남민을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한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이른바 ‘민주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과 친일파, 일제 강점기 총동원 정책에 따라 북한이나 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귀환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해방 이전부터 유학이나 직장 등의 이유로 남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최근 10여 년간 월남민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이 사전적 견해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해방 후 월남민 100만여 명

 

인구학자 권태환 교수는 1944년과 1949년 인구 조사와 귀환자 관련 정부 통계를 분석해 6·25 이전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인구를 약 74만명으로 추산했다. 이 기간 약 260만명이 남한으로 유입됐는데, 일본·만주 등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자 180만명을 제외하고, 출생률 등의 변수를 감안한 수치다.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실제 월남민은 이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1947년 5월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한 월남민들의 난민 텐트촌 생활상이 담긴 영상. 소독과 예방 접종을 하는 모습./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군은 남한에 진주한 후 약 500만명 규모의 난민과 귀환자를 관리할 기구를 만들고 주요 항구와 38선 접경 지역에서 남한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국적과 출발지를 토대로 일본·만주·북한 등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구분해 월별·연도별 통계를 산출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948년 말까지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사람은 65만5678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내부 문서에서 많은 사람이 경계 초소를 피해 38선을 넘고 있기 때문에 “통계는 실제의 절반에 불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여러 신문이 1948년 9월 기준으로 140만명이 월남했다고 보도하며, 안재홍을 수반으로 한 남조선 과도정부(1947년 2월 5일~1948년 8월 15일)를 출처로 인용하기도 했다.

 

종합하면 권 교수의 74만명이라는 월남민 숫자는 미군 기록을 고려할 때 최소치에 가깝다. 만주에서 귀환한 이들과 해방 전부터 남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월남민에게 식량 배급 및 등록 업무를 담당했던 과도정부의 140만명이라는 숫자가 월남민 실체를 더 뒷받침한다. 만일 이 숫자에 만주 귀환자 31만7327명(1948년 말 미군 기록)이 포함됐다고 해도, 적어도 100만명이 넘는 이북 주민이 6·25 전쟁 전 남한으로 넘어온 셈이다. 

 

1950년 1~6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월남한 가족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문서. 전쟁 중 미군이 점령지에서 노획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누가 넘어왔나: 평남 안주군의 기록

 

6·25 전쟁 중 미군이 점령 지역에서 노획한 문서 가운데, 평안남도 안주군 정치보위부가 작성한 ‘일반 부문 투쟁 대상자 명부’(사진)가 있다. 보위부가 1950년 1~6월에 체제 위협 대상자를 조사하고 감시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토지 몰수 지주, 선거 반대 투표자 등과 함께 “삼팔 이남 도주자 가족”이라는 항목이 있다. 두 명의 월북민도 별도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한 명은 고향인 안주로 돌아온 38세의 상인이고 다른 한 명은 39세의 사무원으로 이남에서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다는 메모가 붙어 있다.

 

월남민 가족으로 총 49명의 이름과 함께 이들의 성별, 계급, 해방 전후의 직업, 소속 정당 및 종교 등이 상세히 기재됐다. 49명 중 해방 전 계급(토지개혁 이전)이 지주는 3명, 부농 5명, 중농 16명, 빈농 2명, 상인 7명이고 그 외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노동당원이 10명, 조선민주당 11명, 청우당(천도교) 2명이고, 기독교인 8명이었다. 중농과 상인이 다수를 이루고 노동당원도 2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7년 5월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한 월남민들의 난민 텐트촌 생활상이 담긴 영상. 기차를 타고 개성역에 도착하는 월남민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이 기록은 월남민이 단지 북한 혁명에 반대하는 적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소련 군정하의 현실과 삶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 중간 계층까지 포괄했음을 보여준다.

 

◇미군정 기록의 월남민과 북한 혁명

 

미군정 정보부는 한국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검열했고 정치 상황을 발췌해 내부적으로 회람했다. 함경도에서 서울로 온 공산주의자가 공산당 당수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대중 선전이 목적이 아닌 서신에서 이 공산주의자는 “이북에서 당의 정책이 너무 억압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떠나고 있으며, 일부 경찰이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돈을 받는 데 골몰해 여론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미군정은 1947년 5월에서 12월까지 월남민들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소련 군정의 실태를 의심하다 월남 동기 등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월남민과 북한 체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온 김재웅 박사가 조선통계연보를 분석한 논문이 있는데, 포함된 수치가 유사한 것을 보면 이 연보는 군정의 조사 보고서에 기반을 둔 것 같다. 조사 대상이 된 월남민은 총 10만3628명이었고, 직업군으로 사회적 성격을 분류했다. 

 

이 조사 결과는 월남민이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농업 종사자는 13.5%에 불과했는데, 안주군 사례에 비춰 보면 지주뿐만 아니라 중농층이 다수 포함됐을 것이다. 놀랍게도 공장 노동자와 광부를 합친 노동자 계층도 16.7%에 달했다. 무직과 실업자가 42%를 넘은 것은 가족 단위의 월남으로 여성과 아동이 포함됐기 때문이라고 하나, 동시에 북한 경제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1947년 하반기의 월남민들은 1946년 봄 이후 단행된 토지 개혁과 노동 법령 등을 직접 경험한 후에 38선을 넘었고, 따라서 단순히 고향을 찾아 돌아온 사람들로 간주할 수 없다. 김재웅 박사가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강원도 인제군의 북조선 노동당 조직에서 출당 처리된 월남민들의 출신 성분을 분석한 자료가 있는데, 총 284명 중 빈농이 219명, 중농이 55명이었다. 즉 빈농과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당에 가입할 정도의 핵심 지지층도 체제를 이탈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해방 직후 북한의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다. /조선일보 DB

 

◇월남민, 단순 이탈 아닌 생존 위한 결단

 

가족을 이끌고 38선을 넘는 행위는 상당한 위험을 수반했다. 그럼에도 전쟁 전에 약 100만명에 육박하는 이북 주민이 고향을 등졌다. 이산의 대열은 지주와 친일파만이 아니라 노동자, 상인, 사무직, 기술자, 실업자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회 계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 직후 조선 사회가 좌익 계열 인민위원회 주도하에 자발적 사회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수정주의적 해석과 충돌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이북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은 사실을 감안할 때, 수정주의적 해석은 당대 조선인들의 경험과 지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식민지를 겪은 조선의 역사적 현실보다 농민 혁명을 설명하는 서구 이론에 기대어 구성한 세련된 가설에 가까운 것 아닐까?

 

-문유미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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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의 뒤틀린 역사관

 

소련, 북에 우호적 공산정권 세운다는 치밀한 전략·목표 전체주의 압제 서막 열어
미국은 자유민주 정부 수립외엔 뚜렷한 목표·정책 없어

이승만 혜안과 미 도움으로 한반도 전체 공산화 막아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고향 안동에 가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과 달라,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가 이러한 왜곡된 역사관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충격적이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1일 오후 경북 안동시 경북북도 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지역 유림들에게 큰절을 하고 있다./뉴시스

 

팩트 체크부터 해보자. 군대가 적국 영토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 진주하고 주둔하는 행위를 군사적 용어로 ‘점령’(military occupation)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소련 처지에서는 한반도를 ‘점령’한 것이 맞는다. 35만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려면 점령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가 군사적 의미에서 ‘점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저의를 갖고 ‘해방군’과 차별되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다.

 

해방’은 정치적 용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이론을 신봉하고 선전 선동의 귀재인 소련은 점령군을 스스로 ‘해방군’이라 칭하며, 중국은 군대의 정식 명칭을 ‘인민해방군’(PLA)이라 한다. 우리 민족에게 미·소 양국의 점령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일본 식민 통치의 실효적 종식과 해방이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의 점령 목적은 전혀 다르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넘어 소련에 우호적인 공산 정권을 한반도에 세운다는 분명한 목표와 치밀한 전략에 따라 기민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탄이 투하되자 소련은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것을 직감하고 8월 8일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불과 사흘 후인 8월 11일 치스탸코프 대장 휘하의 소련군 제25군은 두만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다. 북한을 점령하자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 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사불란하게 소비에트식 사회 질서와 공산 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해방을 환호하던 북한 주민에게는 소련의 점령이 일본의 식민 통치보다 더 가혹한 전체주의 압제의 서막이었다.

 

미국은 소련군이 전광석화처럼 북한에 진입하는 것을 보고서야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 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하고 8월 14일 졸속으로 38선을 미·소 간 점령지 경계로 설정하고 이를 소련에 통보했다. 소련이 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우리에게는 38선 이남에서라도 자유민주 국가를 세울 희망을 살린 천운이었다. 독일과 벌인 전쟁에서 870만 병력을 잃고도 독일 영토의 3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한 스탈린이 일본 패망에 기여한 것도 없이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한 데 만족하고 미국과 충돌을 피하려고 한 것 같다.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하루속히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목표도 정책도 없었다.

 

그렇다면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을까? 소련군이 북한을 완전히 점령한 후 9월 8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한 미군에게는 점령 지역 내의 치안 유지와 군정 체제 수립이 가장 절박한 과제였다. 미 군정 책임자인 하지(Hodge) 사령관이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의 경찰과 관리들을 대거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하지 사령관의 한국 역사와 정서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사임은 분명하나, 이 실무 관리들이 군정청의 정책을 결정할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군정의 실무 인력을 승계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두고 친일 정부라고 매도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정책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3부 요인은 모두 항일 독립 투사 출신이었다. 평생을 항일 독립 투쟁에 헌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뼛속까지 반일이었지만, 일제시대에 양성된 인재를 모두 적폐 세력으로 몰아 국가 건설에 기여할 기회를 박탈했다면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이 가능했을까?

 

해방 정국에 국가 지도자들이 요구받는 중심적 과제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었다. 38선 이남에서라도 자유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의 흉계를 간파한 이승만의 혜안과 리더십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단독정부를 세운 탓에 적화 통일 기회를 놓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그 2년 후에는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여 또 한번 적화 통일 시도를 저지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을 얼마나 더 증오해야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원한과 분노를 풀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조선일보(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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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1주기에 주한美사령관 8명 추모. 美점령군과 친일파 合作 인식을 때린 죽비.

 

인천시, 시민에게 공개한 展示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민간인 몰살.” 지하의 맥아더 장군이 눈을 번쩍 뜰 일.

 

-팔면봉, 조선일보(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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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 논란, 비겁한 변명 말고 역사관 당당히 밝히라

 

[이기홍 칼럼]

이재명, “美 포고문에 있으니 점령군”식 해명 말고 실질적으로 점령세력이었다 생각하는지 밝혀야
대선 후보 역사관은 정책방향 가늠할 핵심 지표.. 주요 후보 되면 누구나 한미동맹 호국보훈 강조
돌출 발언과 과거기록 통해 본심 철저히 검증해야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자 좌파진영이 들고나온 반격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점령군 표현은 미군 포고령에도 나오는 ‘팩트’인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다. 둘째는 이런 걸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철 지난 색깔론’이라는 주장이다.

첫 주장부터 따져보자. 이 지사는 “미군 스스로 포고령에서 ‘점령군’이라고 표현했다”며 “역사지식 부재”라고 역공한다. 즉 점령군이라는 표현은 기술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인데, 당당하지 못한 대응이다. 그의 발언은 미 군정기 미군의 법적·제도적 지위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이 지사도 그런 기준으로 표현을 고른 게 아닐 것이다.

만약 실질적 내용 평가를 배제한 채 공식적·형식적 지위만을 기준 삼는다면 구한말 일본공관 경비, 갑오농민전쟁 진압 지원 등의 구실로 한반도에 들어와 침탈한 일본군을 침략군, 제국주의 점령군이 아니라 경비군, 지원군으로 불러줄 것인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중심적 표현으로는 1945~1948년을 미 군정기라 표현한다. 이 지사가 ‘자주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짓밟은 외세(미군)의 점령’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점령군 표현을 했다면 그런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게 당당한 자세다. 그런데 이 지사는 미 군정기의 미군을 실질적으로도 점령세력으로 보는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 주장을 밀고 나가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더 일관성 있다. 다만 그 일관성이 무지와 편견, 균형감각 상실의 산물이라는 점이 문제다.

저명 사학자인 노먼 네이마크 미 스탠퍼드대 교수의 저서 ‘The Russians In Germany’(하버드대 출판부·1995년)에는 소련군이 1945~1949년 동독 등 점령지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스탈린은 소련 군인들의 동구권 점령지에서의 만행에 대해 “장기간 전쟁을 치르며 죽을 고비를 넘긴 우리 군인들이 좀 그런다해서 뭐 그리 대수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1945년 8월부터 5개월간 황해도 평안남북도에서 소련군의 행태를 조사해 작성한 보고서도 우드로윌슨센터가 발굴해 공개했다. 보고서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가 만연해 있다”고 적고 있다.

필자가 최근 읽은 함경남도 북청 소작농 출신 월남민의 자서전 대목이다.

“우리 고장에는 그해 9월 초에 처음으로 소련군이 들어왔다. 미국산 G.M.C.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는 소련군을 보니 난생 처음 보는 서양사람인데다 최전방 선발대여서인지는 몰라도 무척 지저분하고 무서워 보였다. 소련 군인들은 ‘흘래발’이란 커다란 식빵 같은 것을 갖고 다니면서, 잘 때는 그것을 베개 삼아 베고 자고 식사 때는 뜯어먹었으며, 항상 해바라기씨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면서 까먹는데, 그들이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솜씨는 참새가 곡식을 까먹는 기술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들은 미개하고 아주 난폭했다. 부녀자들을 보면 무조건 끌고 가서 욕을 보이기가 일쑤여서 그들이 나타나면 부녀자들을 숨기느라 야단들이였으며, 행인들의 손목시계도 다짜고짜 뺏어 팔목과 팔뚝에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 (이학섭 저 ‘발자취’)

점령군 발언이 논쟁거리가 되자 좌파진영은 “색깔론”이라 비난한다. 하지만 후보의 현대사 인식 검증은 색깔론이나 퇴행적인 논쟁이 아니다. 대선 후보가 현대사를 어떻게 보는지는 집권 시 어떤 정책을 펼칠지의 가늠자다. 특히 한국에서의 반미 문제는 종교나 수탈관계 논쟁에서 빚어지는 중동이나 중남미의 반미와 달리 이념적 성향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다. 집권자의 이념 성향에 따라 외교·경제·사회정책은 물론 교과서 내용과 학교 시스템까지 바뀌는 게 우리 사회다. 이념적 스탠스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지표가 현대사와 미국·북한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데 어느 후보든 당선권을 넘보는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생각은 숨긴 채 공약집과 TV토론, 연설 등에선 한미동맹과 호국보훈을 강조한다. 다들 현충원도 참배한다. 평소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온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이들이 6·25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해, 3만6000여 젊은이의 목숨을 바친 미국의 참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들의 희생을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6·25 내전설·남침유도설·통일전쟁 등의 주장이 횡행하며 중고교생들에게 전파되고, 중국이 노골적으로 항미원조를 찬양하고 전쟁진실을 왜곡하는데도 왜 침묵만 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때로 본심은 준비 없이 툭 던져지는 말이나 당선권 후보가 되기 이전의 기록들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국민은 후보의 역사관을 끊임없이 묻고 검증해야 하며, 후보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혀야 한다. 투표일까지 가면 뒤에 숨으려하는 건 당당하지 못하다.

대선은 정부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저수지의 물을 댈지를 정하는 일이다. 선거 때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지만 막상 집권하면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리고, 진영 내에서도 가장 과격한 인사들이 수많은 자리를 점령해 역사를 재단하고 사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을 우리는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혹독하게 겪고 있지 않은가.

-이기홍 대기자, 동아일보(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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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청춘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아무리 ‘흙수저 청춘’이라도 이젠 인생 선택권 갖고 있다
해방 땐 절체절명의 체제 선택… 청춘이여, 역사·진실 놓치지 말자
 

 

“청춘은 청춘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이런 말을 버나드 쇼가 했다. 요즘도 여러 칼럼이 즐겨 인용한다. 청춘이 얼마나 귀중한 시기인지 강조하는 척하다가 청춘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어쩌랴. 꽃은 자신이 꽃인 줄을 모른다. 최근 나온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대담집을 보니 버나드 쇼가 인용돼 있다. 너무도 찢어지게 힘들었던 청년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이었다.

 

민태원은 수필 ‘청춘 예찬’의 첫 대목을 이렇게 장식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중장년은 교과서에서 읽어 오래 기억하는 문장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듣기만 해도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흐느낀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이런 대목이 무슨 뜻일까 궁리할 필요는 없다. 청춘을 찾은 화자(話者)가 술을 마실 땐 몽롱하게 삶의 리듬을 타고 있을 뿐이다. 비관과 퇴폐도 청춘의 낭만적 특권이다.

 

가수 양희은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처녀 가장(家長)이 되어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때가 그만큼 버겁고 힘겨웠다는 뜻이다.

 

중국에도 한국에도 몇몇 유튜버가 ‘늙은 내가 젊은 나에게’ 형식의 영상을 띄워놓고 있다. ‘예순 살 내가 서른 살 나에게’ ’40세 내가 20세 나에게' 이런 식이다. 돈에 대해 공부해라, 담배 피우지 마라, 치아를 소중히 해라, 취미를 가져라, 외국어를 익혀라, 시간을 아껴라, 남의 말을 너무 믿지 마라,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 노력하지 마라끝이 없다. 하긴 그때 나도 이빨로 병마개를 따곤 했다.

 

서른여섯 청춘이 야당의 당대표가 되자 사람들은 ‘현상’이라고 했다. 최종 평가는 잠시 미뤄놓더라도 ‘변화의 징조’라는 점은 다들 인정했다. 그가 ‘훗날 76세인 나’를 상정하고 ‘지금 36세인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를 떠올려보면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 힘들 것이다. 늙은 오만보다 젊은 오만이 몇 배 위험하다.

 

어떤 노익장 대선 후보가 20대처럼 가죽 점퍼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동영상을 찍었다. 국회의장에 총리를 지낸 어른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가슴이 아렸다. 두 살배기 앞에서 늙은이 재롱이 흥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선거 때문이라면 너무 서글프다. 꼰대가 꼰대다우면 왜 안 되는 것일까.

 

청춘이여. 1945년 8월 ‘북쪽 소련군은 해방군, 남쪽 미군은 점령군이었다’는 유비(流蜚)통신에 속지 말라. 제발 양쪽 포고령의 전문(全文)을 보라. 북을 점거한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탸코프 대장의 포고문은 “위대한 수령이신 스탈린 대원수”를 무려 8차례나 언급하며 찬양하고 있다. 1930년대 이미 수백 만을 학살한 스탈린은 ‘조지아의 도살자’였다. 치스탸코프 포고문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였고, 맥아더 포고문은 그냥 실용문이었다.

 

아마 청춘들은 큰 관심 없을 것이다. 흙수저 청춘은 그저 부모 선택권이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 선택권은 있다. 그것도 해마다 갱신된다. 잊지 말기 바란다. 1945년 해방 공간에서 선대들은 체제 선택을 고뇌해야 했다. 본인 자신을 위해, 그리고 대대손손 자식들을 위해 그것은 절체절명의 선택이었다.

 

민태원은 ‘피 끓는 청춘’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청춘이 역사와 진실을 놓치면 안 된다. 버나드 쇼는 묘비명을 손수 이렇게 적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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