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式 화술의 몰락]
[“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
[부자 때리기]
김제동式 화술의 몰락
[카페 2030]
공기업 준비생 취업 고민 상담에 청년들 “김제동이 뭘 아나” 반발
유독한 위로에 오랜 학습 효과.. 청년은 깨어났는데, 권력은 아직

방송인 김제동(47)씨는 억울할 것이다. 차갑게 돌아선 민심이 야속하고, 갑자기 자신의 혓바닥에 가혹해진 잣대가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의 세 치 혀가 공략하던 주요 부위는 청년층이었다. 전(前) 정권의 실정을 안마 시술 침대 삼아, 직장도 소득도 변변찮은 영혼들에게 “괜찮다, 네 탓 아니다”라고 토닥이던 구강(口腔) 마사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과 쇼에 제법 수익을 가져다줬고, 가난한 지자체로 하여금 건당 1500만원 안팎의 고액 강연료를 책정케 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청춘의 멘토”로 그를 추앙하던 청년들은 간 데 없다.
말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이고 화술도 유행을 탄다. 듣기 좋은 말, 편 들어주는 말은 위로(慰勞)의 화장발로 불티나게 팔리다가도 흥이 깨지는 순간부터 비위 상하는 ‘쌩얼’을 드러낸다. 지난주 김씨는 공기업 취업 준비생 1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고민 상담 행사를 진행하려다 “김제동이 취업에 대해 뭘 아느냐”는 거센 비아냥에 직면했다. “취업 준비생보다 스펙에 관한 노력도 경험도 적은 방송인에게 왜 진로 조언을 받아야 하느냐” “어쭙잖은 입발림 소리를 위로라고 할 거면 그냥 하지 말라”는 성토에 가까운 인터넷 댓글이 빗발쳤다. 특히 “’목수의 망치와 판사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했던 김제동씨도 다른 알바생처럼 최저 시급 받고 강의하느냐”는 일침은 뼈아플 것이었다. 립 서비스로 반짝이던 입술에 주먹 세례가 쏟아졌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2016년 한 종합편성채널 방송에서 취업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 인터넷 밈(meme)으로 자리잡았다.
감동의 수준이 그 사회 수준을 말해준다. 여러 학습을 통해, 사람들은 이른바 토크쇼용(用) 언어에 쉬이 경련하는 대신 의심할 수 있게 됐다. 그 말발의 목적이 무엇인지, 언행일치와 내로남불의 척도를 들이댈 수 있게 됐다. 이는 수차례 속아 가짜 약을 복용해오던 환자가 호전되지 않는 자신의 야윈 몸을 바라보며 다짐하는 자가면역 치료에 가깝다. 유명 래퍼 스윙스(35)씨가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 큰 화제였다. “어린 친구들에게 ‘세상이 잘못했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대우받아야 해’라는 식으로 강연하던 사람 보면서 토할 뻔했다”며 “어떻게 자기만 살겠다고 애들 병○ 만드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까”라는 내용이었다. 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많은 이가 김제동씨를 향한 저격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은 증오다. 위로의 엔터테인먼트 역시 대개 증오에 기반한다. 강자(적군)와 약자(아군)를 나누고, 약자의 고통이 강자의 전횡 탓이라는 이분법 위에서 편파적 위로는 쉽게 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적(敵)이 있고, 그에 대한 공격이 위로가 되는 순간 그 말의 정확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많이 번 사람들이 자기들 능력이 좋아서 많이 벌었습니까? 아니잖아요!”와 같은 화법, 누군가를 원망하게 하는 따뜻한 말. 증오는 사람을 아둔하게 한다. 그렇기에 김제동씨를 미워하기보다 가련히 여기는 편이 현명하다.
‘포스트 김제동’은 좌우를 막론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특정 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몇 마디 정의로운 말로 자신의 세(勢)를 불리는 자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 “외견상 지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지혜로 돈을 버는” 궤변론자들. 정확성보다 정파성에 몰두하는 화술이 세상을 위태롭게 한다. 유독한 위로를 검증하고, 맹렬히 짖어 혼곤해진 사람들을 깨우는 감시견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은 언론 악법까지 만들어가며 이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 청년들은 깨어난 지 오래인데, 여전히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고 한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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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집값은 투기 때문, 그게 다 친일파 때문” 들을 땐 기분 좋겠지만
‘듣기 좋은 말’이 그들의 진짜 이념… 말한다고 다 사실 되진 않아
점점 힘 얻는 그들만의 가상현실… 실체는 지적 게으름과 비겁함
독자와의 만남이나 강연 행사를 마치고 나서 “말하는 모습이 부드러워서 놀랐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글로만 접했을 때에는 아주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는 거다. 그럴 때면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연기이고, 글이 진짜 제 얼굴”이라며 웃으며 대답한다. 진담인데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이신다.
처음에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다. 말이 느리고 눈매가 처진 덕을 보는 걸까? 내가 혹시 이중인격자일까? 요즘은 이것이 어떤 종류의 글을 정직하게 쓰려는 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운명은 나라는 개인의 인격에 기인한 부분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말과 글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의 차이에서 나온다.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세도 없고, 고로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냄새 나는 흙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장례식장이나 예배당에서 하지는 않는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산다. 강연장에서도 그렇다.
이것이 기만인가? 위선인가? 나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존중과 지지를 간절하게 바란다. 그것을 얻지 못할 때, 경멸 어린 시선이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언행을 당할 때, 사람은 깊이 상처받는다.

그런 비참한 상황을 막고 존중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자 사회마다 독특한 규범을 개발했다. 예의다. 타인과 어떤 장소에 함께 있을 때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에 제약을 가해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 드러나게 한다. 그런 제약의 형태는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시대마다, 또 문화마다 다르다.
어떤 진실은 사람의 감정에 상처를 준다. 그 대상과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의무를 잠시 뒤로 미룬다. 병문안을 간 자리에서 환자가 자신의 체취를 걱정할 때,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라고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한다.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약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즉석에서 일종의 가면극을 함께 공연하기도 한다. 이는 쉽지 않은 기술이며, 때로 그런 노력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광경을 연출한다(이런 ‘예의의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께 김원영 변호사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추천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장소와 맥락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며, 대부분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거짓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공론이 오가는 곳이라면 더욱.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는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 간병인은 “아무 냄새도 안 난다”며 환자를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에게는 그 냄새를 알려야 한다.
나는 모든 글을 공론장에 제출한다고 생각하고 쓴다. 인간 본성과 세상의 시스템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믿는 바를 쓰면, 독자들은 그게 너무 어둡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이다. 문학이 하도 시시해지다 보니 문학의 목적이 위로에 불과하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미심쩍게 바라본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중 몇몇은 ‘더 배려하는 사회’를 넘어 예의를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로 격상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같은 다른 소중하고 섬세한 가치들을 우악스럽게 다룬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말과 글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공론장과 사적인 공간의 벽도 허물어졌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을 공론에 요구하며,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나오면서 그런 말만 골라 들을 수도 있게 됐다. 끝내 ‘현실이 아니지만 듣기 좋은 말’들이 공론의 일부가 됐다.
한국 사회의 많은 좌절이 친일파 때문이고, 부동산 가격 급등은 일부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의 불행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니까.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어서, 이런 잘못된 진단을 바탕으로 정책을 짜면 큰 부작용이 따라온다.
불행히도 그런 가상현실을 선호하는 사람이 점점 더 힘을 얻는 중이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렇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나라에 따라 달라서 어디서는 좌파, 어디서는 우파로 불리는데, 실체는 지적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이라는 듣기 좋은 말이 그들의 진짜 이념이다.
-장강명 소설가, 조선일보(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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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때리기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많은 이들은 갑부(甲富) 꿈을 꾼다. 중국인들은 이를 ‘부유함이 세상의 으뜸[富甲天下]’이라는 성어로 표현한다. 수부(首富), 일부(一富), 거부(巨富), 대부(大富) 등이 다 비슷한 맥락의 단어다.
사람이 쌓는 부(富)를 두고 중국에서 오래 전 벌어진 논쟁거리가 하나 있다. 선악(善惡)을 그에 연결한 구절이다. “부를 쌓는 이는 어질지 못하고(爲富不仁), 착한 이는 부를 쌓지 못한다(爲仁不富)”는 내용이다.
논쟁은 유교 경전의 하나인 ‘맹자(孟子)’에서 비롯했다. 책에서 맹자는 이 말을 인용하며 부유함보다는 도덕적 덕목인 어질고 착함[仁]에 방점을 뒀다. 그러나 본래의 구절은 부유함과 선량함이 함께 설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국의 갑부들은 많았다. 그러나 종말은 대개 참담했다. 부유함의 정당성을 묻는 권력의 질문에 바로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부자를 원수처럼 대하는 ‘구부(仇富)’의 심리는 현대 중국에서도 여전하다.
공산당은 1949년 새 중국을 세운 뒤 수많은 지주(地主)들을 정리했다. 당시 “토호를 때려잡고, 농지를 나누자(打土豪, 分田地)”는 정치구호가 유행했다. 그에 앞서 “부자를 털어 가난한 이를 돕다(劫富濟貧)”는 말도 성어로 이미 자리를 틀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중국 공산당 재경(財經)위원회 회의에서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은 ‘공동부유(共同富裕)’를 국정의 새 방향으로 확정하며 ‘3차 분배’를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 마지막 방도가 부자들의 자진 헌납(獻納)이다. 이에 따라 ‘부자 때리기’가 또 벌어질 전망이다.
사람은 부유하면서 착할 수 있다. 절차의 정당성을 이루는 법치(法治)가 전제다. 그 노력이 중국에 더 필요하지 않을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고치려다 일 그르친다는 성어 교왕과정(矯枉過正)도 그 흐름이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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