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대원군도 추사도.. ]

뚝섬 2022. 8. 31. 08:17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대원군도 추사도 한바탕 꿈이었더라]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울 공덕오거리에 서 있는 흥선대원군 별장 금표비

 

서울 마포구 공덕동은 용산과 함께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른 지역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도로는 넓다.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서 옛날부터 만리재, 애오개 두 길과 새로 뚫린 백범로 모두 언덕길이다. 그 세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공덕오거리인데, 이 로터리에서 지하철 6호선도 만난다. 사통팔달한 땅 위로 빌딩 숲이 울창하다.

 

그 지하철 공덕역 3번 출구 옆에 공원이 있는데 공원 모퉁이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限一百二十步 孔德里禁標 同治庚午八月日’(한일백이십보 공덕리금표 동치경오팔월일)

이곳부터 120걸음 공덕리에 경작과 목축을 금한다-동치 경오년 8월.

 

동치 경오년은 1870년이다. 다름 아닌 당시 권세가 하늘보다 높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미리 봐뒀던 자기 묫자리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권세가 하늘보다는 높았지만 청나라 황제보다는 못했는지 날짜는 청나라 연호 ‘동치(同治)’를 사용했다. 그렇다. 이 자리에서 서쪽으로 120걸음만 가면 그가 묻히겠다고 낙점해놓은 가묘가 있었고, 가묘 아래에는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 있었다. 이름은 ‘아소당(我笑堂)’이다. 자기 묫자리를 대원군은 ‘우소처(尤笑處)’라 불렀다.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고 ‘더 웃는 곳’이라는 뜻이다.(황현, ‘매천야록’ 1 上 14.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참 많은 일이 아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제 돌표 하나 남았다. 

 

서울 마포 공덕오거리 빌딩 숲속 작은 공원 모퉁이에 비석 하나 서 있다. ‘限一百二十步 孔德里禁 同治庚午八月日’(공덕리 금표 120보 안쪽 통행금지 동치 경오(1870년) 8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이 용산방 공덕리였던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미리 봐뒀던 자기 묫자리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대원군은 묫자리 아래 집을 지어 ‘아소당(我笑堂)’이라고 불렀고 묫자리는 ‘우소처(尤笑處)’라 불렀다.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고 ‘더 웃는 곳’이라는 뜻이다. 참 많은 일이 아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제 돌표 하나 남았다. /박종인 기자

 

묫자리 정하던 날

 

1870년 추석 열흘 뒤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김병학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원군이 공덕리로 행차할 때 신들이 동행했는데, 그 경계를 사방 100보(步) 안으로 하니 만백성이 기뻐했나이다.”(1870년 음8월 25일 ‘고종실록’)

 

미리 대원군이 짚어뒀던 자기 수장(壽藏: 생전에 봐둔 묫자리) 경계를 확정하는 날이었다. 대원군은 이미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 땅에 이장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경험이 있지 않았는가. 무소불위한 권력을 더 확장하기 위해 대원군은 자기 묘 또한 천하 길지를 택했다. 한성 성곽 남서쪽 바깥에 있는 용산방 공덕리는 ‘국도(國都)의 진산(鎭山)이 서쪽으로 꺾여 꾸불꾸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맥(脈)을 결성한’ 언덕이었고 ‘신령스럽고 깨끗한 기운이 실로 다 모인’ 언덕이었다.(이유원, 가오고략(嘉梧藳略) 10, ‘아소당명(我笑堂銘)’)

 

그 묫자리 경계가 100보였다. 이를 새긴 표석에는 스무 걸음 더 나간 120보라고 돼 있으니 종친에게 허용된 사방 100보 법정 상한 면적과 대동소이했다.(대전통편, ‘분묘정한(墳墓定限)’) 천하의 대원군이 그렇게 좁게 묘계를 정했으니 어전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근처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얻을 수 있게 됐다”며 흡족해했다. 대원군은 그까짓 묫자리 사이즈로 까탈을 부릴 사내가 아니었다.

 

내가 웃는다, 아소당(我笑堂)

 

1870년은 대원군 권력이 정점에 오른 때였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던 경복궁 중건이 완료됐고 1868년 이후 당쟁 아지트였던 서원 철폐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해 조선 500년 사상 처음으로 양반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혁명적 조치도 실행되고 있었다. 그런 흡족한 상황에서 대원군이 자기 수장을 골라 경계를 정했으니, 권력을 즐기려는 쾌감이기도 했고 풍수라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전주 이씨 왕실 미래를 확장하려는 기획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아소당 금표비

 

그 경계를 밝히는 금표에서 21세기 공덕오거리를 지나 서쪽으로 걸어가면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나온다. 남자 어른 보폭으로 120걸음 얼추 된다. 그 학교 교정이 아소당 터다. 중간에 만나는 공원 이름도 아소정이고 식당 이름도 아소정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당인데 어찌어찌하여 식민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격이 팍 떨어지는 아소정으로 바뀌어버렸다. 조선조 관습에 따르면 건물 격은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이니 서열 2위 ‘당(堂)’이 현대에 맨 꼴찌 ‘정(亭)’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래도 건물 이름은 아소당, ‘내가 웃는 집’이다. ‘기쁘면 즐거워지고 즐거우면 웃는다(喜而樂樂而笑·희이락락이소)’ 여러 사람이 아소당 명칭에 대해 글을 썼는데, 1888년 좌의정 신응조가 쓴 ‘아소당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소당 건축이 1870년인데 이 아소당기는 무려 18년 뒤에 쓴 글이다. 그사이 임오군란(1882)이 터져 대원군은 3년 동안 청나라로 끌려가 유폐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리 껄껄대며 웃었다. 예순두 살임에도 권력에 곧 복귀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묫자리 아래 아소당을 지으며 묫자리는 ‘더 웃는’ 우소처(尤笑處)라고 불렀다. 전남 광양에 살던 황현은 이 ‘우소처를 덮는 집을 짓고 아소당이라 했다’고 알고 있으니(위 ‘매천야록’), 대원군은 ‘살아서 웃고 죽어서 더 웃는’ 영화로운 삶과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이다.

 

대원군 생전에 촬영된(추정) 흑백사진은 그 자신만만한 나날을 잘 보여준다. 번듯한 아흔아홉 칸 사대부 집 오른쪽 언덕 위에 작은 집이 한 채 서 있다.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당(堂)을 지어 묫자리[壙·광]를 가렸다.’(황현, 앞 책) 웃음 가득한 별장과 ‘더 웃으며 묻힐’ 징표가 한눈에 들어와 있으니 이런 무서운 풍경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대원군 생전 일본 장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는 오른쪽 언덕이 그가 정한 묫자리다. 왼쪽 아래는 대원군이 즐겨 찾던 별장 아소당이다. 이곳에 살았던 동도중·공업고등학교 설립자 가족 김인수에 따르면 해방 후 6.25전쟁 때까지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관사로 사용했다. 운니동 운현궁에서 죽은 대원군은 이곳에 묻혔다가 파주를 거쳐 남양주에 이장됐다. /동도김형천기념사업회 제공

 

내 아버지를 유폐한다”

 

1885년 음력 8월 27일 청나라로 납치됐던 대원군이 3년 만에 귀국했다. 3년 전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사를 불러 난을 진압한 이래 고종 정권은 20대 중국 장교 원세개 치하에 놓여 있었다. 아들 고종은 “나의 기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아비를 반겼다.(1885년 음8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한 달 뒤 아들은 ‘대원군 존봉 의절’ 9개항을 발표했다. 제대로 모시라는 어명인데 이 중 3개항은 이러했다. ‘운현궁 대문에 차단봉 설치’ ‘대문에 24시간 숙직’ ‘왕명 전달 외에는 관료들 일체 면회 금지’.(1885년 음9월 10일 ‘고종실록’)

 

가둬버린 것이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여름 청일전쟁이 터졌다. 고종은 개혁정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일본은 갑오개혁 정부 수장으로 대원군을 앞세웠다. 하지만 의견이 사사건건 충돌하며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서 추락했다. 이듬해 4월 대원군 손자 이준용이 쿠데타를 기도하다 적발됐다. 대원군은 유배형을 언도받은 손자 운명에 항의하며 아소당에 은거했다.

 

그달 23일 아들 고종은 2차 대원군 존봉 의절을 발표했다. 24시간 숙직 인력은 관리 대신 경찰이, 외국 관리들은 왕실을 거쳐 왕실 직원 입회 하에 면담, 출입은 왕실에 사전 보고 및 경찰 동행. 더 심한 유폐령을 내린 것이다. 그해 10월 존봉 의절을 뚫고 잠시 아소당에 머물던 대원군은 일본인 무리에 이끌려 경복궁으로 입궐했다.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무리들이 며느리 민비를 죽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개혁의지는 사라졌고 권력욕이 번뜩이던 순간이었다. 이듬해 아관파천 이틀 뒤 고종은 3차 존봉 의절 시행을 명했다.(1896년 2월 13일 ‘고종실록’) 대원군은 영원히 유폐됐다.

 

마침내 왕이 된 사내

 

1898년 1월 8일 대원군 아내 여흥 민씨가 운현궁 이로당에서 죽었다. 장례 준비에 한창 어수선하던 2월 22일 대원군이 죽었다. 역시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준 운현궁 노안당에서 죽었다. 아내 병구완을 위해 운현궁에 들르겠다는 고종을 거듭 말린 아버지였지만 임종 직전에는 “주상이 아직 오지 않았느냐”고 세 번이나 큰 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된 아들은 끝내 아비를 찾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그리고 예정된 대로, 대원군은 공덕리 아소당 언덕에 묻혔다. 금표에서 120걸음 오르면 나오는 명당이었다.

 

을사조약 2년 뒤인 1907년 10월 1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손자 융희제 순종에 의해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됐다. 마침내 스스로가 왕이 된 것이다. 이듬해 1월 30일 황실은 파주 대덕동으로 묘를 이장하고 원(園)으로 격상했다.(이상 ‘순종실록’) 묘원 이름은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 했다. 국태공은 바로 대원군을 이르는 말이다.

 

1966년 파주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국태공원은 다시 한 번 이장된다.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이다. 78년 긴 세월 부침을 거듭하며 개혁의지는 사라지고 권력을 바라보던 사내의 종착역이다. 처음 묻혔던 공덕동 아소당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해방 후 송산학원을 세운 김형천이 설립한 동도중, 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본채는 신촌에 있는 봉원사로 팔려나갔다.

 

그 장구한 세월, 그 덧없고 쓸쓸함을 보려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지하철6호선 공덕역 3번출구 옆 공원에 가보라. 의미 사라지고 없는 금표(禁標)를 보라.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교문 오른쪽에 서 있는 ‘아소당’ 표석.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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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도 추사도 한바탕 꿈이었더라

 

서울 봉원사에 숨어 있는 근대사의 비밀들

 

서울 봉원사 대방(大房)에는 추사 김정희와 그 청나라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걸려 있다. 처음부터 이 절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다. 대방은 흥선대원군 이하응 별장인 염리동 아소당을 이건해 만든 건물이다. 대원군 스승이 김정희였고, 그래서 아소당에 있던 작품들도 함께 절로 이사를 왔다.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하고 철거한 충남 예산 가야사 동종도 봉원사에 있다. 구한말 개화파 승려 이동인도 봉원사에 주석하며 갑신정변 주역들을 길러냈다. 근대사가 응축된 절, 봉원사다./박종인

 

서울 신촌 안산에 있는 봉원사 대웅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 조선 후기 명필이다. 대웅전 옆 또 다른 법당 대방(大房) 대청에는 현판이 여럿 걸려 있는데, 주인공은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선배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하다고 혹평한 서예가였다. 그 현판이 걸려 있는 대방 원주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정이고 원래 있던 자리는 염리동이었다. 산으로 가는 계단 왼편 명부전(冥府殿) 현판은 정도전이 썼고, 주련은 이완용이 썼다. 계단 입구에는 이동인이라는 스님 기념비가 서 있다. 쇄국을 주도한 대원군과 동시대 인물 이동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화(開化)를 주도한 각승(覺僧)이었다. 김옥균과 서재필은 이 절집에서 이동인을 만나 대오각성하고 혁명을 꿈꿨다. 개국 공신 정도전과 망국 관리 이완용, 시대를 뛰어넘은 앙숙 원교와 추사, 쇄국과 개화의 극을 걸어간 이하응과 이동인 그리고 젊은 혁명가들. 세기가 두 번 지난 오늘, 그들이 봉원사 대가람에 모여 있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웃는다’, 대원군의 아소정

 

어느 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시를 한 수 짓는다. 제목은 ‘아소당(我笑堂)’, ‘내가 웃는 집’. ‘내가 날 저버렸으니 그 책임 가볍지 않구나/ 나랏일 물러나 한적한 날 술잔만 기울인다/ 지난 일들 모두가 꿈이었구나/ 남은 삶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기만 하다/(중략)/ 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내가 웃는다(我笑前生又此生·아소전생우차생)’(‘대동시선’ 권10, 장지연 편, 신문관, 1918)

 

1873년 겨울 친정을 선언한 아들 고종에 의해 하룻밤에 권력을 박탈당하고 쓴 시다. 이후 이하응은 그가 쓴 시 그대로 삶을 살았다. 1882년 왕십리 하급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잠깐 궁궐로 복귀했지만 곧바로 청나라 군사에게 납치돼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3년 뒤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아들 고종은 대원군 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만들어 대원군이 사는 곳 대문에 차단봉을 설치하고 감시초소를 만들고 관리들 접견을 금지시켜 버렸다. 숨만 쉴 뿐, 권력 냄새조차 맡지 못 하도록 가둬버린 것이다.(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에 의해 갑오정부 수장에 올랐지만, 이 또한 헛되이 끝났다.

 

그래서 대원군은 참 헛되이 살았다. 원래 살던 운현궁에 머물기도 했고 서울 염리동에 있는 별장에 살기도 했다. 별장은 지금 서울 염리동 서울디자인고교 자리에 있었다. 원래는 그가 미리 봐뒀던 묏자리였는데, 1870년 대원군은 그 자리에 별장을 짓고 일찌감치 묏자리 위에 살았다.

 

그 별장 이름이 아소정(我笑亭)이다. 대원군은 ‘자기 주검을 감출 가묘를 만들고 이를 감출 집을 지어 아소당이라 명명했고’(황현, ‘매천야록’ 1권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아들 고종은 집 주변 100보를 묏자리 경계로 삼았다.(1870년 8월 25일 ‘고종실록’) 1895년 갑오 개혁정부를 해산시킨 고종은 대원군을 아소당에 유폐시키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면담을 금지해 아비를 산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1895년 4월 23일 ‘고종실록’) 대한제국 건국 넉 달 뒤인 1898년 2월 대원군이 “주상을 보고 싶다”고 세 번 외치다 죽었다. 그가 묻힌 곳이 아소정 자리였으니, 전생이든 이생이든 웃음밖에 안 나온다’고 했던 상남자 대원군의 끝은 그러했다.

 

지금 봉원사 대방 건물이 그 아소정이다. 1966년 아소정 자리에 들어선 동도중고교가 마침 중창불사 중이던 봉원사에 아소정을 팔았다. 봉원사는 화재로 불탄 염불당 자리에 아소정을 이건해 대방(大房) 법당을 지었다.

 

당호 아소당은 위세가 천하를 떨게 하던 1870년에 지었다. 그때 그가 웃었던 웃음과 말년에 웃었던 웃음은 매우 다르지 않겠는가. 아소당이 언제 아소정으로 바뀌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충남 예산 남연군묘 자리에 있던 가야사 동종. 지금은 봉원사에 있다.

 

대원군의 꿈, 가야사 동종

 

봉원사 대웅전 동쪽 문 옆에는 작은 동종이 앉아 있다. 이 또한 대원군과 악연이 깊다.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이하응은 부친 남연군 관을 상여에 싣고 자그마치 500리가 넘는 길을 내려갔다. 1845년 대원군은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지관 정만인 귀띔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정식으로 이장한 자리가 지금 남연군묘라 불리는 충남 예산 가야산 기슭 옛 가야사 터다.(‘남연군비’) 묏자리 주변에 산재한 절들을 총칭하던 가야사는 철거되고 말사 격인 묘암사에 있던 거대한 석탑 자리에 묘가 들어섰다. 과연 아들 명복(命福)과 손자 척(坧)이 황제가 되었지만 아비는 유폐돼 죽었고 나라는 사라졌다.

 

그 가야사에서 만든 작은 동종(銅鐘)이 봉원사 대웅전에 앉아 있다. 종에는 1760년 덕산, 예산, 회덕, 천안 같은 충청도 주민들이 추렴해 만들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왜, 언제 이 종이 봉원사로 왔는지는 기록이 없다. 남연군묘 이장 사건을 제외하면 두 사찰은 함께할 인연이 희미하다. 옛 아소정과 봉원사 거리는 10리밖에 되지 않으니 이 또한 대원군이 남긴 흔적일 확률이 크다. 지금 남연군묘는 발굴 작업이 한창이니, 조만간 이 비밀 또한 풀리지 않을까.

 

대원군의 스승, 김정희

 

아들이 왕이 되기 전 대원군은 난(蘭)을 치며 살았다. 그가 그린 난초는 대원군 호를 따서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린다. 난을 치는 그 기법과, 글을 쓰는 그 서법을 대원군은 추사한테 배웠다. 스승 김정희는 석파란 그림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 이 노부(老夫)도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김정희, 완당전집 2권 ‘석파에게 주는 다섯 번째 편지’) 글씨와 그림 스승이니, 당연히 아소정에는 추사 작품이 많았다.

 

청련시경 현판(추사 김정희)

 

그래서 1966년 봉원사가 아소정을 구입하고 보니 추사 글씨가 딸려와 있지 않은가. 횡재라. 옛 아소정인 봉원사 대방에는 추사 글씨 두 점과 청나라 학자 옹방강 글씨 한 점이 걸려 있다. 추사 것은 ‘靑蓮詩境(청련시경·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와 ‘珊瑚碧樓(산호벽루·산호처럼 푸른 누각)’, 그리고 ‘無量壽閣(무량수각)’은 김정희의 청나라 스승 옹방강(翁方綱) 글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도 가고 그 스승도 갔다. 인연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남았다. 

 

산호벽루 현판(추사 김정희)

 

대웅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명필인데, 김정희(1786~1856)는 자기 전 시대 명필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한 필법”이라고 악평했다. 원교와 추사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기로 한다.

 

대웅전 현판(원교 이광사)

 

개화승 이동인, 그리고 갑신정변

 

‘하루는 김옥균이 여럿을 데리고 새 절로 놀러가자고 했다.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을 만났다.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책을 받아서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지.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나서게 된 근본이야.’(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서재필이 기억하는 ‘새 절’은 봉원사다.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은 봉원사에 있던 개화승 이동인(1849?~1881?)이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 이동인을 찾아서 김옥균과 박영효와 서재필과 그 무리들이 봉원사를 들락거렸다. 이동인은 이들을 ‘혁명당’이라고 불렀다.(이용희, ‘동인승의 행적上’, 국제문제연구1권1호, 서울대국제문제연구소, 1973) 이동인은 왕실 밀사로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파견에 큰 역할을 맡았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젊은 엘리트들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서재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동인 스님이 우리를 인도해줬고, 새 절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위 같은 책)

 

사라진 이동인은 계단 옆 기념비로 인연을 잇고 있다. 한때 쇄국을 주장했던 권력가 흥선대원군과 개화로 변혁을 꿈꿨던 혁명가들 흔적이 절에 남아 있다. 명부전과 대웅전, 그리고 추사와 원교가 들려줄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기로 한다.

 

 

 

 

 

대원군 별장인 아소당 건물. 지금은 봉원사로 옮겨와 법당이 됐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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