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무엇인가]
[이 모퉁이 너머엔 뭐가 있을까]
[금덩이를 두르고 헤엄칠 수 있을까]
돈이란 무엇인가
[윤평중의 지천하 11]
1974년 철학과 신입생 면접 때였다. 백발 노교수께서 내게 어떤 철학책을 읽었는지 질문한 다음 ‘가정 형편은 어떤지’ 물었다. 당혹스러웠다. ‘인생 해답을 찾겠다고 철학과에 왔는데!’라는 치기 어린 실망감이 컸다.
나이를 먹어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자 노교수님 말씀이 갈수록 뼈아팠다. 철학 같은 기초 학문이나 순수 예술이 직업일 땐 교수·교사가 되는 것 말곤 생계가 막막한 게 동서고금 공통된 현실이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거상(巨商)이던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은 행운아였다. 일하지 않아도 유족한 학자로 살기에 충분했다. 선대의 막대한 재산이 낭비되지 않고 천재의 탄생에 기여한 드문 사례다.
운 좋게 취직해도 평생 학교와 연구실에 머문 학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울 가능성이 높다. 순수 학문과 부(富)는 서로를 차갑게 외면한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철학자들이 생생한 증거다. 주식 투자에 실패해 재산을 탕진한 고전 경제학자들 얘기도 전해진다. 학자가 이재에 밝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전혀 달랐다. 주거래 은행에 보낸 편지에서 ‘철학자라고 다 바보는 아니다!’라며 사자후를 토한다. 자기 자산 3분의 1을 관리하던 은행이 지급 불능을 선언하자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능란한 밀고 당기기로 결국 그는 다음 해 전액을 돌려받는다.
쇼펜하우어는 자산 관리에 정성을 쏟았고 ‘돈’의 중요성을 십분 강조했다. ‘인간의 숙명인 힘든 부역으로부터의 해방’인 ‘경제적 자유’를 선사하는 돈을 최대한 활용한다. 쇼펜하우어는 물려받은 돈을 기반 삼아 각고의 철학적 성취로 인류에게 채무를 갚았다는 자긍심이 컸다.
독립적 생계가 자유인의 근거라는 말은 진정 옳다. 학문과 예술을 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수입이 필수다. 그러나 ‘철학으로 먹고살지 않고, 철학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한 쇼펜하우어가 ‘철학으로 밥벌이하는 철학 교수들’을 비난한 건 궤변에 불과하다. 교수도 강의 노동과 연구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일과 근로자·자영업자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일세의 스승이 된 대학자다. 평생 겸손하고 청렴한 공경(恭敬)의 삶을 실천한 퇴계가 사실 대지주였고 이재에도 치밀한 선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퇴계가 고위 관직을 거듭 고사하고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기를 수 있었던 데는 물적 토대가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돈을 중시하는 배금주의 성향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돈 놓고 돈 먹기’식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맹렬히 질타하면서도 돈을 갈망하는 자기 분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허구적 청빈(淸貧) 신화에 매몰된 지식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청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게 청부(淸富)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시장에선 역설적으로 신용과 정직, 창의성이 함께 자란다. 경제에 어두운 ‘바보’는 견실한 생활인일 수 없고 좋은 학자이기도 어렵다. 어릴 때부터 규모에 맞게 소비하고 저축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경제는 곧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살림)이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철학도 시절엔 삶의 진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오지만 그나마 ‘시장의 철학’이란 졸저로 남았다. 돈은 몹시 더러우면서도 가장 깨끗한 재화다. 땀 흘려 번 돈으로 꾸려나가는 정직한 살림살이는 삶의 근본이다. 경제적 자립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인 것이다. 돈과 밥벌이의 지엄함을 감당해야 진짜 어른이다.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조선일보(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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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퉁이 너머엔 뭐가 있을까
[서광원의 자연과 삶]
가끔씩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다 싶으면 배낭을 둘러메고 떠난다. 가능한 한 낯선 곳으로 가서 걷는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새로운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그렇게 하루 종일, 그리고 날마다 걸으면 머릿속도 그곳을 닮아간다. 뭔가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되어 간다. 지끈거렸던 머리가 맑아지고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진다.
문제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보니 가끔은 채워주어야 할 배 속도 아무것도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저 앞에 나타나는 모퉁이 너머를 나도 모르게 기대한다. 저걸 돌면 뭐라도 나오겠지?
텅 비어 가는 배를 부여잡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골라서 왔는데 뭐가 있겠는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다. 또 다른 모퉁이만 저 앞에 무심하게 놓여 있다. 그래 그렇지. 뭐가 있겠어? 힘 빠지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음 모퉁이 너머를 또 기대한다. 그리고 또 실망한다. 날이 저물어지기라도 하면 조급해지기까지 한다. 불안이 스멀스멀 마음을 채운다. 모퉁이가 나를 속이는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나를 속이는 건데 자꾸 모퉁이를 탓하게 된다.
그러다 작은 구멍가게라도 하나 나타나면,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니 반가운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까지 든다. 작은 가게 한쪽에서 TV를 보고 계시거나 마늘 까기 같은 일을 하시는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절로 나오고 허리가 넙죽 숙여진다. 맛?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른다. 평소라면 눈곱만큼도 그러지 않겠지만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많은 걸 알게 한다.
그렇게 숱하게 모퉁이를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산다는 건 어쩌면 항상 모퉁이를 도는 일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것만 잘되면 한숨 놓을 수 있겠지?’ ‘이번만 견디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러면서 모퉁이를 돌지만 막상 돌아보면 또 다른 모퉁이만 무심하게 나타나는. 그래서 끝없이 걸어가야 하는. 돌고 돌았는데도 아무것도 없고, 애면글면 안간힘을 쓰고 죽어라 돌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인.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며 별생각 없이 모퉁이를 돌았는데 예상치 않은 작은 반가움을 만나기도 하는.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그래서 모퉁이는 새로운 시작이다. 아니 새로운 질문이다. 바라던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전환점이 될 게 분명한 2021년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데 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루시 M 몽고메리가 쓴 소설 ‘빨강 머리 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동아일보(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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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덩이를 두르고 헤엄칠 수 있을까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산속 홀로 사는 이들 다룬 TV 프로 보니… 다양한 나무 수액 ‘눈길’
無欲·순수의 물 마시는 모습에 경쟁·쾌락의 물 마셔온 길 돌아보니
욕망에 먹힌 삶은 금띠 두르고 물에 빠진 듯 그 무게로 가라앉을 뿐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TV 프로그램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과도한 연출이 거슬릴 때도 있고 인터뷰가 밋밋할 때도 있지만, 수도도 전기도 없는 오지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암을 비롯한 몹쓸 병을 얻은 뒤 산에 들어가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죽으러 산에 들어왔다가 완치됐다는 사람, 직장암에 걸려 직장 7할을 잘라내고 산에 들어왔는데 깨끗이 나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데다 또 산을 타고 집과 밭을 가꾸는 모습을 보면 정말 건강해 보이기도 했다.
암 환자만큼이나 많은 또 다른 부류는 도시에서 사람들한테 상처받은 경우였다. 이들에겐 한때 잘나갔었고 큰돈을 벌기도 했다는 공통점과, 배신이나 사기를 당했다는 공통점이 함께 있었다. 어떤 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살기 싫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같은 하늘을 이기도 싫은 것이다. “한 달 생활비로 1만원만 있으면 된다”고 한 사람은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고 했다. 이들이 돈 주고 사는 물건은 쌀이 거의 유일한 것 같았다.
그들은 대개 텃밭에서 키운 작물로 끼니를 해결하고 산에서 캔 약초와 버섯으로 물을 달여 마셨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액(樹液)이었다. 고로쇠나무에서만 수액을 뽑는 줄 알았더니 느릅나무, 자작나무, 헛개나무 같은 나무들에서도 수액이 나왔다. 그 수액을 그냥 마시기도 하고 된장을 비롯한 온갖 음식에 썼다. 나는 이 수액이야말로 병을 낫게 한 생명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오로지 생명을 유지하려고 물을 빨아들인다.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 채운다. 그 물엔 그것 외의 다른 욕심이 없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마신 나무의 물은 순수하고 검박하다. 내가 마셔온 물은 어떠한가. 남보다 앞서기 위해 마시고 체면을 차리려고 마시고 잘난 척하려고 마셨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마시고 세속적 쾌락을 위해 마셨다. 마시지 않아도 되는데 눈치 보여서 마셨다. 그것이 나의 삶을 나무의 삶과 정반대로 살게 했다.
산에 들어간 사람들도 도시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간 나무의 물을 마셔 몸속 물을 완전히 바꾸니 건강을 되찾고 머리도 맑아졌을 것 같다. 그들은 “왜 하루라도 더 빨리 산에 오지 않았을까” “인생에서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빈궁(貧窮)한 것이 아니라 물욕을 버림으로써 청빈(淸貧)해졌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래전 읽은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떠올렸다.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던 니어링은 인생 후반기에 아내 헬렌과 함께 산에 들어가 돌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단풍나무 시럽을 만들어 내다 판 돈으로 1년 생활비를 마련하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았다. 모든 잉여가치가 불행한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어링은 식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도 무례하리 만큼 자신의 섭생 원칙을 지켰다. 술과 커피, 빵과 고기와 초콜릿을 모두 사양하고 물만 마셨다. 그는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고체, 액체, 공기, 햇빛 같은 생존 환경의 요소들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런 섭취물들이 질 좋은 데다가 양까지 적당하다면, 그래서 인간 유기체가 고통 없이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한다면 그 결과는 건강이다”라고 말했다. “의사는 병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건강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말해 온 니어링은 채식과 육체노동으로 건강하게 살다가 100세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쳤다. 니어링 자서전을 다시 읽고 나서야 산에서 건강을 되찾은 암 환자들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욕망은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켜 극한의 장애를 뛰어넘게 한다. 우리가 인간 승리라고 부르는 그 모든 일들은 욕망이 선순환한 결과다. 그러나 욕망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배당하면 삶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존 러스킨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금을 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난다. 그는 금으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두르고 배에서 뛰어내린다. 그리고는 곧 금의 무게에 눌려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때 그가 금을 소유한 것인가, 금이 그를 소유한 것인가?”
삶이란 배에서 뛰어내려 뭍까지 헤엄쳐 가는 과정이다. 몸이 가라앉는 것 같다면 허리춤을 더듬어봐야 한다. 산속에 자신을 유폐한 사람들에겐 금덩이가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뭍에 닿기도 전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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