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터지면 ‘윗선’은 숨고 실무진만 수난 겪는 비겁한 나라

대장동 사업 특혜 의혹 사건에 연루돼 수사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1처장이 사망 직전까지 3개 기관으로부터 4건의 조사나 감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 처장의 유족은 “고인이 검찰 2곳, 경찰 1곳의 조사와 성남도공 감사를 동시에 받았는데 누가 견디겠느냐”고 했다. 김 처장은 이 과정에서 체중도 10㎏ 가까이 빠졌다고 한다. 김 처장 동생은 “형이 숨진 당일에도 집 화장실에서 한 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고 했다. 김 처장은 대장동 개발에서 화천대유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1·2차 평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점수를 몰아줬다는 의혹을 받았다. 공사에 수천억 손실을 안기면서 화천대유에 특혜를 밀어주는 배임 행위가 실무자 수준에서 벌어졌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검경과 공사 측은 김 처장을 주범처럼 몰아붙인 것이다.
문 정권 들어 권력형 범죄에 대한 사정 기관의 수사나 조사가 실무자들만 희생양으로 삼는 ‘꼬리 자르기’식으로 마무리되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2019년 말 월성 원전 1호기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산업부 공무원들이 관련 문건을 삭제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초 산업부 실무자들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반대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내부 보고 시스템에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하냐’고 댓글을 달고 백운규 전 장관이 좀 더 가동시키자고 보고한 과장에게 ‘너 죽을래?’라고 질책하면서 조기 폐쇄가 강행됐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는 청와대 앞에서 멈췄고 대신 휴일 한밤에 사무실에서 증거를 인멸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부 공무원들이 구속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다. 경찰이 이용구 전 법무차관의 택시 기사 폭행 사건을 축소·은폐한 사건 관련해서도 청와대와 경찰 수뇌부 개입 의혹이 제기됐지만 경찰은 일선 실무자만 징계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자 징계를 받은 경찰관들이 최근 이 조치에 불복해 인사혁신처에 소청 심사를 내며 집단 반발하고 있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북한에 비판적인 내용을 무더기로 삭제하고 현 정권 입맛에 맞게 213곳을 수정한 교육부 과장과 연구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검찰은 고발된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은 제대로 조사도 안 했다. 어떤 공직자가 지시도 없는데 이런 범죄를 저지르겠나. 일이 터지면 지시했던 ‘윗선’은 자취를 감추고 실무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비겁한 행태가 정권 말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선일보(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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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쓰는 유서
[태평로]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가 소멸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극단적 선택이든 아니든 삶의 경계는 그토록 삼엄한 것이다. 이제 나는 인생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다. 나라를 구하는 거창한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뒤집어씌우기 때문에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한이 맺힌다.
성남 도개공에서 일해온 김문기 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세상이 놀랄 것이다. 남겨진 식구들은 원통 절통한 피울음을 울 것이다. “결국 몸통은 놔두고 꼬리 자르기를 한 겁니다.”
나도 안다. 힘없는 조직은 희생양을 찾아서 위기를 모면하려 든다. 그렇게 내몰리면 마지막 구명 요청도 소용없을 줄 알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깜깜한 절벽만 사방에서 다가선다.
첫째 절벽은 수퍼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다. 한때 내가 모셨던, 나의 생살여탈권을 쥔 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장동과 관련된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게 증거물이고, 모든 이가 증인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딱 떨어지는 증거는 없고, 모두가 침묵이다.
둘째 절벽은 회사 내부 분위기다. 누구보다 이해하고 감싸줄 줄 알았던 동료와 조직이 등을 돌렸다. 감사실이 중징계 의결 방침을 통보해왔다. 까딱 잘못하면 수천 억 배임 혐의마저 뒤집어쓸지 모른다. 형사 고발이 있을 것이란 소리도 귀에 들린다. 계선 라인에 있었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열흘 전에 목숨을 끊었다. 그보다 윗선은 이미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위치로 옮아가 버렸다. 희생양 찾기에 외통수로 걸렸다는 느낌뿐이다.
또 하나의 절벽은 검찰이다. 그것은 공권력이요, 국가 권력이요, 한마디로 정권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그 검은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을 실토하라는 것인지, 적당히 입 다물라는 것인지, 그 속이 음침할 뿐이다. ‘선수들끼리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눈치도 보인다. 회유와 협박에도 지쳤다.
이때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가족들, 그리고 명예다. 나는 적어도 저들이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살아오지 않았다. 저들은 이런 나를 눈곱만큼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입증 근거를 내놓아도 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결론은 내려졌고, 내가 걸려든 것 같다.
뭐라고? 초과 이익 환수 조항을 넣었다 뺐다 했던 것이 내 책임이었다고? 그것이 내 권한으로 내 책임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지나가는 성남시 강아지들한테 물어봐라.
그나저나 이 일은 이제 내 손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 먼 훗날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은 만신창이가 돼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선택은 그것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만배 유동규 남욱 정영학,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돈이라도 챙겼다. 대장동 4인방, 그런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권순일 박영수 곽상도, 이런 이름은 나에겐 구름 위에 있는 세상이었다.
야당에서는 “연쇄 죽음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억울함을 알아주는 체하지만, 그들은 말만 하고 끝이다. “초과 이익 환수 조항을 삭제해 ‘화천대유 몰빵’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 “검찰이 조사를 안 하고 뭉개고 있으니 애꿎은 사람이 자꾸 죽어 나간다” 이렇게 호통치는 사람들이 때론 더 원망스럽다. 정말 세상을 바꾸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표를 구할 뿐일 것이다.
영화 ‘아수라’에서는 악덕 시장 박성배의 측근인 은충호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뒤 덤프 트럭에 깔려 살해된다. 박성배는 빈소에 가서 “아이고 우리 은충호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오열한다. 이제 내 빈소에는 박성배 같은 사람을 못 오게 하라. 오로지 가족에게 미안할 뿐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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