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은 어쩌다가 K정치용어가 됐나]
[‘오리무중’부터 ‘과이불개’까지… 사자성어를 보면 한 해가 보인다]
[사자성어 말잔치]
‘내로남불’은 어쩌다가 K정치용어가 됐나
외신도 ‘naeronambul’ 보도
한국 정치의 서글픈 자화상

지난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조국 전 법무장관의 모습.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지난 4월 언론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은 도덕성마저 상실했고 조국은 내로남불의 상징이다. 진보 이미지는 오염될 대로 오염돼 버렸다." /박상훈 기자
“우리 당에 지독하게 따라붙는 내로남불의 꼬리표부터 떼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직시하지 않은 채 남의 허물만 지적하는 것이 내로남불입니다. (중략) 전당대회의 돈 봉투 의혹, 코인 논란 등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내로남불과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우리 스스로 혁신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15일·더불어민주당 송갑석 최고위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조어 ‘내로남불’이 한국 정치권의 전문 용어처럼 사용된 지 오래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등장한 기사는 2만건에 육박한다. 2015년 9건, 2016년 36건이던 기사 수는 2017년 1063건으로 폭증했고, 2021년 6736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2021년 위키피디아에는 ‘naeronambul’이란 표제어가 등재됐다.
많은 신조어가 반짝 유행하고 사라지는 것과 달리, 내로남불의 생명력은 끈덕지다. 나에겐 관대하고 상대엔 엄격한 이중적 행태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똑같은 퍼주기 공약도 우리 당은 ‘따뜻한 정치’인데 상대 당은 ‘포퓰리즘’이다. 개헌 주장도 우리가 하면 ‘구국의 결단’이지만 상대가 하면 ‘국면 전환용 음모’가 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를 내로남불당이라고 비난하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민주당에서는 드문드문 자당의 내로남불식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1980년대 대학가 유행어가 여의도 정가로
“세상에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부동산을 사면 부동산 투자고 남이 사면 투기다, 자기의 여자 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 관계는 스캔들이다, 이런 웃기는 주장과 꼭 같습니다.”
1996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박희태 당시 신한국당 의원(전 국회의장)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신한국당의 의원 영입을 비난하자 “야당이 (의원을) 영입한 것은 헌법에 위반 안 되고, 우리 당이 영입한 것은 헌법에 위반되느냐”며 한 말이다. 국회 공식 기록에는 박 전 의장의 발언이 최초이지만, 이런 유의 말들은 19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하면 숙달운전, 남이 하면 얌체운전’ ‘내가 사랑에 빠지면 로맨스, 네가 사랑에 빠지면 스캔들’ ‘내가 못생긴 건 개성, 네가 못생긴 건 원죄’ 등이다. 작가 이문열은 1987년 발표한 소설 ‘구로아리랑’에서 “지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란 표현을 썼다.
2015년 7월 전병헌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이른바 ‘배신의 정치’ 발언을 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과거 대통령 본인이 했던 모든 것을 스스로 질타하는 유체 이탈 화법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누리꾼 사이에선 ‘내로남불’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무렵 정치권에서는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설명 없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구한 韓 정치권 내로남불의 역사

로이터통신이 2021년 4월 보도한 한국의 4·7 재보궐 선거 관련 기사. 내로남불을 'My romance, your adultery(나의 로맨스, 너의 불륜)'로 옮겼다. /로이터통신
미 뉴욕타임스는 2021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참패한 소식을 전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로 내로남불(naeronambul)을 꼽았다. 박원순·오거돈·조국 등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은 문재인 정부 진보 인사들의 위선적 행태에 대한 냉소를 ‘내로남불’이란 말로 표출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문재인 정부 집권 여당에 환멸을 느낀 한국인들은 그들이 위선적이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며 내로남불을 소개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정부 여당에는 내로남불이란 꼬리표가 뒤따랐다. 야당 시절 민주당은 병역 면탈,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의 이유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무위원 후보자 27명에 대해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나서는 비슷한 의혹이 있는 이들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다주택자들에게 집을 팔 것을 강요했지만, 적지 않은 고위 공직자들이 다주택자로 남거나 집을 팔더라도 서울 강남의 ‘똘똘한 한 채’는 남겨뒀다. 야당 시절에는 청와대 특활비의 투명한 집행과 공개를 요구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옷값을 문제 삼았지만, 집권 뒤엔 특활비와 김정숙 여사 의전 비용 등에 대한 시민 단체의 공개 요구를 거부했다.
클라이맥스는 이른바 ‘조국의 강’이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 법무장관을 지낸 조국 전 장관은 공직에 나서면서부터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과거 정의와 공정의 화신인 양 상대 진영을 엄중하게 꾸짖고 비판했는데, 막상 그를 검증해보니 자녀 교육과 재산 축적에서 문제 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2009년부터 트위터에 차곡차곡 쌓아온 1만여 개의 글은 자신은 물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에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이 밖에 특목고를 없애자면서 정작 자기 아들들은 모두 외고를 보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전·월세 보증금 인상률을 5% 이내로 제한한 임대차 보호법을 대표 발의해놓고 법 국회 통과 전 자신이 보유한 아파트 전세금을 9%가량 올린 박주민 의원 등도 내로남불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문재인 정부 집권 4년 차인 2020년에는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를 선정했다. 아시타비는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최근 논란은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이 당 안팎의 압박으로 탈당한 것과 관련돼 있다. 이들은 검찰 조사가 개시되지도 않았는데 사실상 출당시켜 놓고, 숱한 비리 의혹으로 기소된 이재명 대표는 왜 대표직을 유지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김남국 의원의 코인 의혹과 관련해 일부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상대 진영의 흠결은 힐난하면서, 제 식구 감싸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이 우리 정부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시찰을 비난하는 것도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문재인 정부 때는 오염수 방류를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대선을 앞둔 작년 1월 “국민들께서 ‘내로남불’이란 이름으로 민주당을 질책하기도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사과하는 모습. /뉴스1
보수 진영의 내로남불 역사도 짧지 않다. 2015년 8월 정종섭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은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이란 건배사를 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지지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소추했었다. 야당을 중심으로 정 장관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새누리당은 “의례적 덕담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의 정치 공세가 과하다”며 그를 두둔했다.
지난해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 입시 특혜 의혹에 휩싸이자 야당을 중심으로 윤석열 대통령(당시 당선인)이 내로남불적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임명 철회 요구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두고 그가 ‘조국 사태’ 때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최근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김태우 전 서울 강서구청장의 실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에 국민의힘이 반발하자, 민주당은 “그동안 정부 여당은 검찰이 수사만 해도 범법자로 낙인찍어 왔다. 그런데 자기 편은 대법원이 확정 판결한 사안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고 비판했다.
◇인간 본성? “정치 미숙과 양극화가 원인”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서 '내로남불'을 키워드로 하는 기사의 연관어 분석 결과. 연관어 글자 크기가 클수록 분석 뉴스와 연관성(빈도수)이 높은 것이다. /빅카인즈
내로남불은 왜 만연해졌을까. 심리학은 내로남불을 인간 본성의 하나로 본다. 잘못을 했을 때 자아 붕괴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로남불이라는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행위자-관찰자 편향, 허구적 독특성 효과 등이 있다. 전자는 내가 한 행동의 원인은 상황 등 외적 요인에, 타인의 행동 원인은 그 사람의 성격 등 내적 요인에 귀인하는 경향을 뜻한다. ‘내 잘못은 실수, 네 잘못은 실력’과 같은 논리다. 후자는 자신은 남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착각을 의미한다. 남이 뇌물을 받으면 중대한 범죄지만, 내가 받으면 사정이 있다는 궤변이다. 철학자 허경은 저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에서 “내로남불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었던 적이 없으며, 사실상 (오직 줄이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 영원히 근절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점 중 하나”라고 했다. 오늘날 내로남불이 사회적 의식 전면에 부상한 이유는 “내로남불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형준 배제대 석좌교수(정치학)는 한국 정치의 미숙함과 정치 양극화에서 내로남불이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내로남불과 같은 윤리적 문제가 터지면 국민들로부터 응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내로남불 정치인이) 이슈메이커로 주목을 받게 된다. 실제 논란이 있었던 의원들이 후원금도 많이 받지 않나. 또 거짓을 얘기해도 우리 편은 옳고, 참을 얘기해도 상대편은 틀렸다고 보는 ‘탈진실’ 시대의 정치 양극화도 원인이다.” 김 교수는 “내로남불이 자라나는 토양을 만든 게 문재인 정부”라며 “조국 사태가 대표적이다. 서민을 위하는 척, 도덕적인 척, 개혁적인 척했지만 모두 위선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겐 관대하고 상대방에겐 엄격한 편의주의적 도덕성 잣대를 지녔다”고 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이 강력한 도덕성을 갖고 있었다면 민주당이 위축됐을 테지만, 양쪽이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그렇지 못했다”며 “내년 총선, 2027년 대선에서 도덕성이 쟁점이 되지 않으면 정치권 내로남불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옥진 기자, 조선일보(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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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부터 ‘과이불개’까지… 사자성어를 보면 한 해가 보인다
22년째 전국 교수들이 선정·발표
사회상 집약해온 사자성어들

전국 교수들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사자성어 ‘과이불개’ 휘호.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상옥 전 동방문화대학원대 총장이 썼다. /교수신문
해마다 세밑이면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뉴스를 장식한다. 2022년에 뽑힌 사자성어는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이불개는 논어 위령공편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是謂過矣·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라 말했다. 과이불개를 추천한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그 이유로 “여야 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혹은 ‘야당 탄압’이라고 말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이불개에는 이태원 참사와 같은 국가적 비극에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태, 잘못을 인정하면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강박에 일단 우기고 보는 풍조가 반영됐다는 시각도 있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2001년 11월 교수신문 편집회의에서 ‘우리도 한 해를 정리하는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한 해를 한자 한 글자로 정리해 발표했는데, 우리도 비슷한 작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2001년 12월에 발표된 첫 올해의 사자성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9·11 테러로 인한 국제정세 불안, 꼬리에 꼬리를 문 각종 게이트,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교육정책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돈스러운 한 해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의 사자성어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등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외교·경제 등 각 분야에서 정책 혼선이 빚어졌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이듬해 선정된 사자성어는 ‘당동벌이(黨同伐異)’였다. 이는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 정치권이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놓고 정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1년 내내 대립만 한 것을 적확히 묘사해 호응이 컸다. 처음으로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자성어가 등장했다는 점도 큰 반향에 일조했다. 당시 하도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 말을 인용해,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명박 정부 때는 소통 부재와 독단적 국정 운영을 우려하는 표현이 많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첫해의 사자성어는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의 ‘호질기의(護疾忌醫)’.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촛불 시위, 미국발 금융위기 등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반영된 것. 이를 추천한 김풍기 강원대 교수는 당시 “호질기의는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귀를 열고 국민들과 전문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2011년의 사자성어는 ‘엄이도종(掩耳盜鐘)’,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으로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된 것은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비난이나 비판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통과, 내곡동 사저 부지 불법 매입 의혹 등이 한 해를 달궜지만, 국민을 향한 정부의 소통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의 사자성어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의 ‘도행역시(倒行逆施)’였다. 미래지향적 가치를 주문하는 국민의 열망을 읽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 모습을 보이는 정부에 대한 우려가 담겼다. 경제민주화 같은 대선 공약이 파기됐다는 점도 지적됐다.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 2015년 ‘혼용무도(昏庸無道·나라가 암흑에 뒤덮인 듯 온통 어지러움)’ 등을 거쳐 2016년에는 ‘군주민수(君舟民水)’가 선정됐다. 군주민수는 ‘백성은 물, 임금은 배와 같다’는 뜻. 강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국민이 나라의 지도자를 세울 수도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당시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성난 민심이 대통령 탄핵소추를 이끌어낸 상황을 빗댄 것이다.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힌 '아시타비' 휘호.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는 뜻의 아시타비는 신조어 '내로남불'을 한자화한 것이다. 정상옥 전 동방문화대학원대 총장이 썼다. /교수신문
2017년에는 처음으로 긍정적 의미를 담은 ‘파사현정(破邪顯正·사악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이 선정됐다.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담겼다. 하지만 3년 뒤인 2020년 뽑힌 말은 ‘아시타비(我是他非)’였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의 아시타비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로 사용량이 폭증한 신조어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교수들은 “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고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소모적 싸움만 무성하다” “코로나 발생을 두고서도 사회 도처에서 ‘내로남불’ 사태가 불거졌다” 등의 평을 전했다.
그간 발표된 사자성어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교수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최영진 중앙대 교수는 “선정된 사자성어에 부정적인 표현이 많은 것은 (사회가) 좀 더 잘됐으면 하는 바람과 아쉬움이 담겼기 때문”이라며 “비판을 통해 반성을 촉구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이옥진 기자, 조선일보(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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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말잔치

몇 년 전 방영된 ‘SNL 코리아’에서 개그맨 유세윤이 사자성어 아닌 사자성어를 구사하고 있다. 해설만 번지르르하다. /tvN
자고로 문자 가려 써야 한다. 상황 파악 못 하고 교양을 과시하려다 되레 수준을 의심받는다. 조선 후기 설화집 고금소총(古今笑叢)에 나오는 ‘문자 쓰다 장인 잃은 사위’ 이야기는 그 오랜 증거다. 밤중에 호랑이가 나타나 장인을 물고 갔는데, 얼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글깨나 읽은 사위는 “원산맹호(遠山猛虎) 래오처가(來吾妻家)…” 문자 늘어놓으며 유식한 티 내느라 바쁘고, 그사이 장인은 호랑이 밥이 된다.
교수신문은 20년째 연말마다 당해의 세태를 대변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해 내놓고 있다. 전국 대학교수 880명이 투표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다. 중국 당나라 역사서에 나온 말로, 고양이와 쥐가 한데 있다는 뜻이다. 관리와 도둑이 한패이니 나라 꼴을 알 법하다. 2위로 꼽힌 사자성어는 인곤마핍(人困馬乏)이었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피곤하다는 의미라 한다. 역시 배우신 분들답게 모두 낯선 어휘였다. 서당 아랫목에 앉아 근엄히 훈계하듯 늘어놓는 훈장님 가라사대가 솔직히 마뜩잖다.
사자성어는 재치를 함축하는 매력적인 화법이다. 그러나 유구무언(有口無言)이어야 할 때, 아무리 근사한 단어를 동원한들 엄이도령(掩耳盜鈴)이다. 얼마 전 은수미 성남시장은 내년 시정 방향을 제시하는 사자성어로 승풍파랑(乘風破浪)을 발표했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나간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은 말이다. 취임 후 뇌물 공여 및 직권 남용 등의 범죄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한 네티즌은 댓글로 사자성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추천했다. 민심이 진정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고사성어와 달리 사자성어 중에는 끼워맞춘 말, 억지스러운 조어(造語)도 여럿이다. 이따금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에서 청학동 댕기동자로 분장한 개그맨 유세윤이 꼴 보기 싫은 상대에게 “시발남아(時發男娥)”라고 외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발음은 상욕이지만 “때 되면 떠날 줄 아는 아름다운 남자가 되자는 뜻”이라고 우기는 장면이었다. 지난여름 탄생한 희대의 영어 사자성어 ‘GSGG’가 그러했다. 언론중재법 상정이 무산되자 김승원 의원은 누가 봐도 욕설 초성인 이 단어로 페이스북에 불만을 드러냈고, 뒤늦게 “Government Serve…” 어쩌구의 줄인 말이라며 일수차천(一手遮天)하려다 여론의 십자포화(十字砲火)를 맞았다.
새해를 앞두고 희망과 각성의 사자성어가 전국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전라북도는 견인불발(堅忍不拔), 충청북도교육청은 교자채신(敎子採薪), 대전시의회는 집사광익(集思廣益) 등의 다짐을 내놨다. 권장해야 마땅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여러 획으로 이뤄진 그 말은 뜬구름처럼 멀리 있다. 오히려 갑남을녀들은 화천대유(火天大有), 민생파탄(民生破綻) 같은 현실의 언어를 더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의 앞에서는 정작 묵묵부답(默默不答)이던 자들을 비웃을 것이다.
이제 지겨운 말잔치는 끝내자. 대한민국(大韓民國) 네 글자가 너무 위태롭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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