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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는 힐튼호텔] [ .. 정녕 부수는 게 답일까] [김우중 정신]

뚝섬 2023. 1. 2. 09:21

[철거되는 힐튼호텔] 

[40년 남산 지킨 힐튼, 정녕 부수는 게 답일까] 

[김우중 정신]

 

 

 

철거되는 힐튼호텔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긴급 방한한 IMF 협상단과 우리 정부의 비밀 협상이 힐튼호텔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본지가 먼저 알아내 동료 기자와 달려갔다. 20층도 넘는 호텔 어디에서 협상이 열리는지 찾을 길이 막막해 서성이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협상장에서 내려오던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관료와 딱 마주쳤다. 깜짝 놀라던 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협상장이 알려진 이후 힐튼호텔은 IMF 협상 내내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필자에게 힐튼호텔은 외환 위기 당시의 춥고 무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건축사에선 기념비적 공간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 철학을 한국 건축가가 한국 땅에 재해석한 건축물로 꼽힌다. 미스 반데어로에에게 수학하고 그의 건축 사무실에서 10년간 일한 ‘1세대 건축가’ 김종성씨가 설계했다. 일리노이 공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세계적 호텔을 지어달라”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요청을 받고 미국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국해서 힐튼호텔을 설계했다. 산을 등지는 배산(背山) 아니라 남산 쪽으로 출입구를 내고 남산을 감싸안은 것처럼 살짝 꺾인 모양이다.

 

▶꼭대기층인 23층의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유명했다. 또 다른 반대편 끝에 대공포대가 있어 김 회장, 객실 손님, 군인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외국 귀빈 등을 펜트하우스로 초청해 식사 대접을 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초대받았다.

 

호텔을 완공하고 경영한 사람은 부인 정희자씨였다. 미국 힐튼 본사에서 ‘터프 마담’으로 통했다. 힐튼이 1년에 경영 수수료를 25%씩이나 떼가는 것에 딴지를 걸고 저돌적으로 협상해 수수료를 깎은 여장부였다. 호텔 개관 때 조각가 헨리 무어의 ‘여인상’을 설치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호텔에 문화 예술을 접목한 선구자였다. 이런 남다른 경영 덕에 세계 500 힐튼호텔 가운데 최고의 호텔로까지 선정됐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1999년 싱가포르계 호텔 운영사에 팔렸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국내 자산 운용사에 재매각됐다. 신규 인수자가 힐튼호텔을 부수고 호텔·오피스·상업시설을 갖춘 복합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신라 범종을 녹여서 가마솥 만드는 이라며 건축계에서 비판이 거셌는데도 끝내 헐리게 됐다. 모기업 대우그룹에 이어 힐튼호텔까지 사라진다니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짓누른다.

 

-강경희 논설위원, 조선일보(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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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남산 지킨 힐튼, 정녕 부수는 게 답일까

 

김우중·김종성 합작한 랜드마크 부동산회사 팔려 곧 헐릴 운명
한류에 들떠 의기양양하면서 우리 유산은 못 보는 ‘문화 졸부’
 

 

1982년 공사 중인 남산 힐튼 호텔(왼쪽 높은 빌딩). /서울역사아카이브

 

1982년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수업 시간. 당시 강사는 미국에서 온 건축가 김종성이었다. 조국에 번듯한 호텔 하나 지어보자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제안에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귀국한 인물이었다. 그가 하루는 수업에 특별 연사를 초청했다.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을 이끈 쌍두마차 김중업(1922~1988)이었다.

 

기념사진 하나 없지만, 이날 수업은 한국 건축사에서 진귀한 장면이 됐다. 두 사람은 ‘20세기 근대 건축의 3대 거장’에게 직접 배운 딱 두 명의 한국인이다.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김종성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제자다.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세계 건축의 중심을 두드린 호기로운 청년들이었다. 두 거장의 대리전을 보기 위해 몰려온 학생들로 이날 강의실은 미어터졌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작년 두 건축가의 대표작이 엇갈린 운명에 처했다. 김중업의 청계천변 삼일빌딩(1970년 완공)과 김종성의 남산 힐튼 호텔(1983년)이다. 삼일빌딩은 건축가 최욱이 김중업의 설계안을 최대한 살려 정교하게 리모델링했다. 반면 남산 힐튼 호텔은 부동산개발회사에 팔려 철거를 앞두고 있다. 새 소유주는 호텔을 헐고 대규모 상업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호텔은 올 연말 문 닫는다. 40년간 남산 자락을 지킨 랜드마크를 싹 밀어버리겠다는 발상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남산 힐튼은 고도 성장 시대 우후죽순 빌딩이 올라갈 시절, 동시대 세계 건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김우중이 전폭적으로 밀어준 덕에 김종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배운 기량을 맘껏 펼쳤다. 무엇보다 반세기 가까이 남산과 서울역 곁에서 서울의 산업화를 굽어보고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건물이다.

 

한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올랐다고 의기양양하면서, 돈 주고도 못 사는 우리 안의 문화유산은 제 발로 걷어찬다. 전형적인 ‘문화 졸부’의 모습이다. 김승회 서울대 교수는 기자에게 “신라 범종을 녹여 가마솥 만들겠다는 처사”라며 “수익성만 따져 멀쩡한 보물을 부수는 건 ‘개발 탈레반’”이라고 목청 높였다. 당사자는 오죽하랴. 얼마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분신이 찢겨 나가는 아픔을 토로했던 미수(米壽)의 건축가는 요즘도 눈만 뜨면 관련 뉴스를 확인한다. 머리 맞대면 흔적을 남기면서 개발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앞으로 ‘제2의 힐튼’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 지은 많은 건물이 노후화돼 철거냐 리모델링이냐 갈림길에 서있다. 힐튼 사태는 우리가 먼 과거의 문화 유산에 비해 비교적 가까운 30~50년 전 근현대 유산을 도외시했다는 점을 일깨운다. 가까운 과거도 결국 먼 과거가 된다. 모든 건물을 보존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진짜 가치 있는 건물을 지킬 장치가 필요하다. 현행 등록문화재 제도는 예외 규정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5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해 이 중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정한다. 반면 역사가 짧은 미국 같은 경우는 더 적극적이다. 예컨대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위원회’는 3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랜드마크를 지정한다. 삼일빌딩의 모델이자 김종성의 스승 미스 반데어로에 대표작인 뉴욕 ‘시그램 빌딩’도, 이 제도 덕에 완공된 지 30년 만인 1989년 랜드마크로 지정돼 과거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개발 논리 앞에 그간 우리는 무자비하게 추억을 지웠다. 단성사도, 피맛골도 잃었다. 또 없애고 나서 후회해선 안 된다. 윈스턴 처칠은 1943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짓겠다면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다 부수고 나면 훗날 무엇이 우리를 만들 것인가.

 

-김미리 기자, 조선일보(2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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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정신

 

1980~90년대 대한항공 승무원들에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별난 사람'이었다. 일등석을 탔지만 의자엔 거의 앉지 않았다. 마치 노숙인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내내 잠만 잤다.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기내식조차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차를 이겨내고 이 나라 저 나라 날아다니며 '세계경영'을 하고 다녔다.

 

▶대우가 아프리카·동유럽·남미·동남아 등으로 뻗어나갈 때 그는 1년 중 200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시간을 아끼려 스케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움직였다. 직원들과 회식은 길어야 20분이었다. 한 비서 출신은 "우리가 두 숟가락 먹고 나면 회장님은 벌써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술은 한 방울도 못 하는 체질이어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는 비서가 몰래 양주잔에 넣어둔 보리차를 마셔가며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일 외엔 취미도 없고 골프조차 안 치는, 말 그대로 '일벌레'였다.

 

▶1990년대 중반 대우가 동유럽 시장을 빠르게 파고들자 현지 언론은 그를 '김기스칸'이라 불렀다. 칭기즈칸 이후 동유럽을 휘젓고 다닌 첫 아시아인이라고 했다. 초원을 휩쓰는 몽골 기마병처럼 김 회장의 '세계경영'도 지구가 좁게 보일 만큼 가공할 스피드로 진행됐다. 단순 제품 수출을 뛰어넘는 현지화 전략으로, 세계 곳곳을 '경제 영토'로 만드는 장대한 비즈니스 모델을 펼쳤다. 숨 가쁜 확장을 거듭하는 '닥공(닥치고 공격)' 경영으로 한때 재계 순위 2위까지 올랐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외환 위기의 쓰나미가 닥쳐오면서 대우는 빚에 못 이겨 공중분해가 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대우는 해체됐지만 '김우중'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말은 젊은 세대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어록이 됐다. 그는 청년들에게 입버릇처럼 "밖을 보라"고 했다. "해외에 나가면 도처에 돈이 보인다"며 세계를 무대로 뛰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00년 도피하다시피 출국해 주로 베트남에서 살았다. 하노이에 교육 시설을 차려놓고 해외 사업을 꿈꾸는 청년들을 데려다 직접 강의도 하며 교육을 시켰다. 이 인재 양성 사업이 그의 '유작(遺作)'이 됐다.

 

▶김 회장 건강에 이상이 감지된 것은 재작년 여름이었다. 투병 생활 동안 거의 말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넓은 세상'을 외쳤던 그가 자꾸만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지금 시대를 향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세계를 삼킬 기세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개척했던 '김우중 정신'이 절실한 요즘이다.

 

-윤영신 논설위원, 조선일보(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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