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공사 중단 부른 ‘1호 포비아’
2016년 9월 시행된 김영란법은 국민 400만명에게 ‘1호 공포’를 안겨줬다. 법 적용 대상이 애초의 공무원에서 교사, 언론인 등 총 240만명과 그 배우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바뀌자 식사 약속, 축하 난, 선물 주문 취소가 잇달았다. 그런 와중에 ‘1호 위반자는 망신당하고 직장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란 ‘1호 포비아(phobia·공포증)’가 일어났다. 결국 1호 위반자는 자신의 고소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에게 감사 표시로 떡을 보낸 사람이었다.

▶2004년 시행된 성매매방지법도 커다란 1호 포비아를 불러일으켰다. 1호 적발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지만 적발 업소에서 유출된 고객 명단을 장사 밑천으로 삼는 범죄꾼도 생겼다. 몇 해 전 광주에선 “인터넷 성매매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해 49명에게서 10억원을 뜯어낸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국내 코로나 1호 확진자는 중국 우한시에서 입국한 중국 여성이었다. 코로나가 확산되자 직장인들은 ‘사내 1호 확진자’가 될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사태 초기엔 확진자 1명이 나와도 직장 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 비난을 혼자 뒤집어쓸까 전전긍긍했다. 당시 서울대 연구팀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확진될까 두렵다(58%)’보다 ‘확진자로 비난받고 피해 입을 것이 두렵다(68%)’는 대답이 더 높았다.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 첫날인 27일 서울 시내 한 공사장에서 공사 관계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뉴스1
▶27일 중대재해 처벌법이 시행되면서 건설업계가 ‘1호 포비아’에 시달리고 있다. 산업재해로 근로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 최고경영자(CEO)에게 징역 1년 이상 형벌을 가하는 세계 최강의 산업재해 처벌법 탓이다. 고용노동부가 기업을 돕겠다며 안전 확보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400개 이상의 점검 항목에 놀란 기업 안전 담당자들이 ‘감당 불능’을 하소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CEO가 현장의 사고를 다 알고 일일이 책임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업들은 1호가 되면 기업 이미지 실추뿐 아니라 ‘시범 케이스’로 가중 처벌될 위험이 높아 “무조건 1호는 피하자”고 야단이다. 국내 5대 건설사에 속하는 현대·대우건설은 27일부터 전국의 공사를 전면 중단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중소 건설사 중에도 ‘공사 일단 중지’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 건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 인력 시장에 나왔다가 허탕을 치는 경우가 급증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양대 건설노조에선 안전관리자를 자기네 사람으로 채용하라고 건설사를 압박하고 있다 한다. 재해 처벌법이 만든 풍경들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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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줄 임원’ 급구
모 대기업 계열사 사장이 취임 직후 총수의 호출을 받았다. 총수는 금(金)으로 만든 명함을 선사하고 법인카드 사용한도도 예상보다 ‘0′을 하나 더 붙여주었다. 몇 달 뒤 총수가 청구서를 내밀었다. 비자금을 조성해 상납하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교도소 담장이 어른거렸다”는 그는 ‘바지 사장’ 역할을 거부했고 결국 중도 하차했다. 몇 년 뒤 계열사 사장 2명이 횡령·배임 혐의로 감옥에 갔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엔 철없는 아들이 불법 도박장의 바지 사장으로 취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적당히 ‘가다’(’체격’이란 뜻)가 있으면서 적당히 어수룩해서 다루기 좋고 뒤탈도 없는, ‘핫바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바지 사장’의 어원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업주의 불법 행위 책임을 대신 뒤집어 쓰는 ‘총알받이’에서 ‘받이’를 따온 것이란 해석과 ‘바지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에서 ‘바지’만 따왔다는 설이다.
▶정치권에서도 ‘바지 사장’이 논란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1985년 12대 총선 때 이민우 총재의 신민당이 민한당을 밀어내고 제1 야당 올라서는 돌풍을 일으켰다. 한껏 고무된 이 총재가 민정당이 요구하던 내각제 개헌을 수용하는 ‘이민우 구상’을 시도했다가 YS·DJ의 뜻을 거스른 죄로 쫓겨나고 말았다. ‘바지 사장’의 선을 넘은 대가였다.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바지 임원’이란 말이 새 유행어로 등장했다. 산업 재해가 발생하면 대표이사나 안전 담당 임원에 대해 징역 2년 이상 형벌을 가하는 세계 최강의 산업재해처벌법이 가동되기 때문이다. 재해 때마다 오너나 대표가 감옥에 가면 회사가 유지될 수 없으니 대신 감옥에 가는 ‘방패막이’ 임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업주가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안전책임자(Chief Safety Officer·CSO) 임원 자리를 새로 만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신설 CSO 임원들은 “우린 ‘빨간 줄(감옥행) 임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기업 대표이사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각종 법과 규제 조항이 무려 2000여 개(벌금형 포함)에 이른다. 주 52시간을 어기면 징역 2년, 화학물질 신고를 소홀히 하면 징역 5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를 제대로 못하면 징역 3년 처벌 대상이 된다. 대기업 대표가 ‘위험한 직업’이 돼가고 있다. 감당 못 할 일을 강요하면 사람은 대응책을 찾는다. 60대 대기업 중 총수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곳이 23곳에 그친다. 비난만 할 수 있겠나.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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