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에 대하여
[백영옥의 말과 글]
편파 판정 시비가 잦은 베이징 올림픽을 보다가 로마 황제 ‘네로’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네로 역시 고대 올림픽 전차 경주에 출전한 적이 있다. 이 경기에서 그는 꼴찌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경기의 룰을 바꿔 버렸다. 꼴등이 일등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지인이 들려준 마트 에피소드도 있다. 길게 늘어선 고기 시식코너 앞에 선 여자가 종이컵 안의 고기를 뒤에 있는 그에게 양보하듯 건네고, 자신은 그가 받을 차례인 종이컵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혹스럽게도 지인이 건네받은 종이컵 안에 든 것은 비계만 한 가득인 고기였다.
가끔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을 만난다. 이런 사람들은 예고 없이 출몰해 우리의 정신 건강을 갉아먹는다. 의사인 친구가 건강을 위해 지켜야 할 제1 원칙을 말한 적이 있다. “좋은 거 찾아서 먹을 생각하지 마. 해로운 걸 멀리해!” 건강을 위해 비타민을 챙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금연이나 금주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쁨보다 슬픔에 더 민감하다. 1000개의 선플이 있어도 기어이 단 하나의 악플에 상처받는 게 우리 인간이다. 살면서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일도 있지만, 피하기만 해도 성공인 일도 많다. 복잡한 이 세상에서 더 각광받기 시작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공통된 충고는 명료하다. ‘쾌락’보다 ‘고통 없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 있는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낸다. 단 한 명이 불법 유턴이나 횡단을 하면 나머지 차들도 따라 한다. 뻔뻔한 행동은 전염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에도 이 원리는 적용되는데, 여러모로 동료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팀은 그렇지 않은 팀에 비해 성과가 무려 30~40% 뒤처진다는 데이터도 있다. 유능한 인재 선발만큼 중요한 게 이런 사람을 파악해 내보내는 것이다. 네거티브와 음모론이 가득한 선거철에는 뉴스를 가급적 멀리하는 것으로 정신 건강을 챙겼는데, 좋아하는 올림픽 채널까지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아는 게 힘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약일 때도 많다.
-백영옥 소설가, 조선일보(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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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등도 27등도 응원합니다
분노로 출발한 이번 올림픽, 순위·승패에 온통 관심 쏠려
올림픽 출전한 선수 누구나 눈물의 드라마를 쓰고 나왔다
5위라는 기특한 성적을 거둔 차준환 말고도, 베이징 동계 올림픽 남자 피겨에는 또 한 명의 한국 선수가 있었다. 스물두 살 이시형이다. 그의 어머니는 한참 전부터 아들 경기를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한다. 못 해준 것들이 생각나서, 늘 경기장 주위를 돌며 기도만 해왔다고 했다.

이시형이 8일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경기에서 '프린스 이고르' 음악에 맞춰 연기를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이시형은 쇼트프로그램 29명 중 27위로 첫 올림픽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어려운 4회전 점프는 버텨냈는데, 평소 잘하던 3회전 연결 점프를 하다가 빙판에 등이 닿을 만큼 크게 넘어졌다. 벌떡 일어나 남은 스핀과 스텝을 마쳤다. 경기 전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는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 분께 감사하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말대로 올림픽 무대를 밟기까지 많은 이의 응원과 후원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TV에서 김연아를 보고 어머니를 졸라 스케이트를 시작했다. 엄청나게 돈이 드는 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어머니는 종일 김밥집에서 일하며 혼자 뒷바라지했다. 고시원에서 산 시절도, 빙상장 탈의실에서 잠든 날도 있었다. 두 차례 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어깨 수술까지 받고 나선 한동안 기초생활수급 지원으로 생활했다.
국가대표로 안정된 지원을 받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2016년 1점 차로 탈락하고 말았다. 제때 바꿔주지 못한 부츠, 침만 맞으며 달래온 부상도 문제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했을 때, 도움의 손길이 하나둘 나타났다. 동사무소에 전화해 지원을 당부한 피겨 팬, 십시일반 모금해준 얼굴도 모르는 이들, 자기 차를 내준 교장 선생님, 스케이트를 선물한 연예인, 훈련비를 지원해준 기업 회장님, 지자체, 어린이재단… 그들은 이 재능 있는 소년이 환경 때문에 간절한 꿈을 꺾지 않길 바랐다. 이시형은 하루하루 끈질기게 훈련을 이어가 국내 2인자로 성장했다.
시련을 극복하는 데 익숙한 그는 키가 186.7㎝까지 커도, 코로나로 대회가 취소되고 운동할 곳이 문 닫아도 방법을 찾아내 이겨냈다. 두 손 들고 뛰는 기술을 노력 끝에 익혀, 피겨에 걸림돌이 되는 큰 키를 오히려 돋보이게 만들었다. 해외 코치 찾아갈 형편이 안 돼도 4회전 점프에 몰두해 결국 몸에 익혔다. 이 점프 덕에 차준환과 함께 한국 남자 피겨 최초로 올림픽 출전권 두 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도와주신 수많은 좋은 분께 내가 가진 최선의 기술, 내 진심이 느껴지는 경기를 보여드리고 싶다”고 다짐하며 베이징을 향했다. 그의 올림픽 출전은 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 많은 이의 소망과 선의로 이룬 드라마였다.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했던 우리 사회에 결과만큼 과정을, 성적만큼 참가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는 소중한 분위기가 지난해 도쿄올림픽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런데 중국의 판정 문제가 베이징 올림픽 시작부터 모든 이슈를 장악했다. 분노할 일엔 분노하고, 바로잡을 일은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다시 우리가 메달 색, 승패, 등수, 스타에게만 온통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50등, 60등을 하더라도 올림픽까지 편하게 온 선수는 없다. 온몸을 감싼 경기복과 무거운 장비에 저마다의 놀라운 이야기, 우여곡절과 극복의 드라마가 가려져 있다. 알려지지 않은 선수에게도, 낯선 종목이라도, 땀과 투혼과 열정에 박수 보내는 분위기가 되살아났으면 한다. 이시형의 포털 사이트 응원 페이지에는 1만개 넘는 댓글이 그를 격려한다. ‘한 번 넘어졌다고 좌절 금지!’ 이시형은 소셜 미디어에 썼다. ‘감사합니다! 이번 경험으로 더 성장하는 선수가 되어서 2026 올림픽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최수현 기자, 조선일보(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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