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해독제]
[소녀의 빨래와 비누]
[행복한 나라의 공주님]
클림트의 해독제

구스타프 클림트, 아터제 호수의 리츨베르크, 1910~1912년, 캔버스에 유채, 110×110㎝, 소장처 미상.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는 ‘황금의 화가’라고 할 정도로 눈부신 금박을 화면 전체에 바르고 그 화려함에 어울리는 관능적 여인을 주로 그렸다. 하지만 클림트는 여름이면 번화한 도시를 벗어나 연인 에밀리 플뢰게와 잘츠부르크 인근 아터제 호수로 떠났다.
눈길 닿는 곳이라면 온통 맑은 초록색 산과 파란 하늘과 고요한 호수로 가득 찬 아터제에서 클림트는 마치 신화 속 인물처럼 바닥에 끌리는 풍성한 가운을 입고 풍경화를 그렸다. 40여 점의 아터제 풍경화는 모두 같은 크기의 정사각형 화면에 역시나 초록이 가득하다. 그의 황금빛 그림들이 당대 사회에 팽배했던 퇴폐적 미감의 산물이었다면, 맑고 푸른 아터제의 여름 풍경은 해독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아터제 호수의 리츨베르크’는 유명 컬렉터 부부가 클림트에게 구입했다가 그들이 세상을 뜨면서 여동생이던 아말리 레들리히에게 넘어갔다. 유대인이던 레들리히 가족은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병합되던 1938년 폴란드로 추방됐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 그림은 1938년 게슈타포가 무단 압수했다가 1944년부터는 잘츠부르크 박물관에 걸려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2011년, 팔순 노인이 된 레들리히의 손자를 찾아 그림을 돌려줬다.
곧바로 경매에 나온 이 그림은 4000만달러, 오늘날 환율로 520억원에 팔렸다. 그 수익 일부로 레들리히의 손자는 잘츠부르크 박물관에 교육과 창작을 위한 공간 ‘아말리 레들리히 타워’를 세웠다. 이렇게 그림이 안고 있던 어둡고 참혹한 역사는 그 나름의 해독을 거쳤지만, 현재 소유주가 누군지,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3-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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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빨래와 비누

조지 던롭 레슬리, 우리는 이렇게 빨래해요, 1887년, 캔버스에 유채, 61×46㎝, 영국 베빙턴시 레이디 레버 미술관 소장.
입춘을 지내면 묵은 빨래를 하게 된다. 장밋빛 뺨의 인형 같은 여자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빨래하는 법을 보여준다. 테이블 위에 물이 흥건한 걸 보니 제법 열심히 조물거린 모양이다. 손빨래란 고된 노동이 틀림없는데, 봉긋한 뽕소매에 섬세한 레이스를 두른, 풍성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비누를 쥐고 있으니 빨래도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놀이가 된다. 이는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주로 여성들의 일상을 동화처럼 예쁘게 그린 그림으로 대중과 평단 모두의 인정을 받았던 화가 조지 던롭 레슬리(George Dunlop Leslie·1835~1921)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은 레슬리가 ‘영국 소녀시대의 달콤함’을 그려냈다고 격찬했다.
이 작품은 영국 북서부 베빙턴시 포트 선라이트 지역에 있는 레이디 레버 미술관 소장품이다. 영국의 사업가, 미술 컬렉터이자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헤스케스 레버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레이디 레버’를 기리기 위해 지은 미술관이다. 부친의 식료품점에서 일하던 레버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동물성 수지 대신 식물성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공장이 있던 동네 이름을 딴 상표 ‘선라이트’를 출원했다. 그리고 그는 광고에 사용하기 위해 레슬리의 이 그림을 산 뒤, 포장과 포스터에는 그림 속 테이블 위에 눈에 띄게 ‘선라이트 비누’를 얹었다. 그때까지 비누 브랜드란 없었고 다만 가게에 큰 덩어리를 두고 잘라 파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이토록 달콤한 영국의 소녀시대를 담은 비누가 등장하자 주부들이 열렬히 호응했고, 레버는 엄청난 부를 얻었다. 오늘날 세계적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가 이렇게 출발했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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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나라의 공주님

프리드리히 폰 아메를링, 마리 프란치스카 폰 리히텐슈타인 공주의 초상화, 1836년, 종이판에 유채, 33x27cm, 빈 리히텐슈타인 미술관 소장.
아기가 인형을 꼭 끌어안고 낮잠을 잔다. 신나게 놀다 잠들었는지 분홍빛 뺨에 웃음이 남았다. 이 아기의 이름은 마리 프란치스카 폰 리히텐슈타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작은 나라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공주다. 12세기에 일어난 리히텐슈타인가(家)는 1719년 신성로마제국에서 공국으로 독립한 이래 가문명을 국가명으로 유지하고 있다. 서울시 면적의 4분의 1도 안 되는 소국이지만 막대한 부를 소유한 대공 가문이 국가 예산 전체를 부담하기 때문에 국민은 납세 의무가 없고, 중립국으로서 군대가 없으니 병역 의무도 없다. 덕분에 리히텐슈타인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도 국민 대다수의 사랑을 받으니, 이 아기야말로 진정한 동화 속 공주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리는 대공 알로이스 2세의 열한 자녀 중 맏이였다. 알로이스 2세는 마리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두 돌 즈음이 될 때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드리히 폰 아메를링(Friedrich von Amerling·1803~1887)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당시 폰 아메를링은 오스트리아 황실 화가로서 유럽 각국의 왕족으로부터 초상화를 주문받았고, 나중에는 작위를 얻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인물을 미화하면서도 성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탁월했다.

폰 아메를링의 초상화 중에서도 이 작품은 백미로 여겨진다. 위에서 비스듬히 얼굴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막 아기를 재우고 침대에 조심스레 앉아 아기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두 돌배기를 키우는 이라면 아무리 천하의 공주님이라도 잘 때가 제일 예쁘다는 말에 동감할 것이다. 물론 아기 얼굴은 미화의 기술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도 꽃잎처럼 예쁘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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