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깃발 작전

공산당이나 파시스트가 일으키는 전쟁에서는 가짜 깃발 작전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날 SS대원 7명이 폴란드인을 가장해 국경 인근의 독일 라디오 송신탑을 장악하고 그 사실을 알리는 방송을 내보냈다. 히틀러는 자국 시설이 공격받았다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같은 해 핀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한 한 러시아 마을이 포격을 받았다. 소련은 핀란드군이 포격을 한 것이라며 핀란드를 상대로 겨울전쟁을 개시했다. 포격은 실은 소련 보안기관의 자작극이었는데 소련 해체 이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비로소 그 사실을 시인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는 러시아 군복을 입었지만 부대 기장을 달지 않은 사람들이 무장한 채 크림반도와 동부 돈바스 지역에 나타났다. 러시아는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지배에 반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군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번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가짜 영상을 만들어 뿌리는 작전을 펴고 있다. 영상 속에는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포탄 공격을 받고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피란하는 모습이 담겼다.
▷가짜 깃발이란 말은 해적들이 상선에 접근하기 위해 그 상선에 우호적인 나라의 깃발을 건 데서 비롯됐다. 가짜 깃발 작전은 나중에 국제해양법에 의해 해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가짜 깃발을 걸고 공격한 직후에는 즉시 진짜 깃발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금까지도 진짜 깃발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을 둘러싸고 공격 준비를 끝낸 지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자극해서 얻을 게 없다. 군사력도 러시아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 세력 관계에 비춰 우크라이나의 선제공격은 날조다. 그러나 러시아의 자작극 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측 도발에 피치 못해 한 대응을 우크라이나의 선제공격인 양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면 보는 이들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가짜 깃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번에는 당하고 있을 수만 없다고 판단했는지 러시아가 제작하는 가짜 영상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공개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 폭파 자작극에 이어 화학공장 폭파 자작극까지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전 세계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시대다. 스마트폰을 통해 한쪽에서는 가짜 영상을 뿌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짜임을 폭로하고 있다. 누가 하이브리드라고 불리는 이 미래형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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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전쟁

기습공격으로 전면전을 유발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전쟁을 시작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여섯 달 뒤인 12월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은 소련과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초래한 기습공격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도 북한 김일성의 전격적인 남침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연 이것이 전쟁의 시작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2001년 알카에다가 납치한 비행기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충돌했을 때 미국인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범죄와의 전쟁’처럼 비유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으로 불렸던 것은 실제 전쟁이었다. 미군은 곧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최근에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는 아직 남아 있다.
▷2006년 제2차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34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벌인 전쟁이었지만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열었다. 전쟁과 평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국적을 뛰어넘어 뒤엉켜 싸운다고 해서 하이브리드다. 제2차 레바논 전쟁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면적 도발보다는 단계가 낮은 로켓포 공격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공군으로 헤즈볼라의 은신처를 공격했으나 계속 로켓포 공격을 받았고 레바논에 진입해서는 친(親)헤즈볼라 의용군을 상대하느라 힘들어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장악한 우크라이나 사태도 하이브리드 전쟁의 양상으로 진행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친(親)러시아 우크라이나인이 반(反)러시아 정부에 항거해 분리주의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포장했다. 실제로는 군복에서 부대 기장을 떼어낸 러시아 군인들이 러시아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는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반군들과 함께 싸웠다.
▷러시아가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배치해 다시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얼마 전 정부 홈페이지가 일제히 해킹 공격을 받아 시스템이 마비됐다. 미국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영토 또는 친러시아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를 공격하는 가짜 영상을 입수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력 사용에 앞서 사이버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한 정보전과 선전전을 펼쳐 상대방의 싸울 의지 자체를 꺾는 것 역시 하이브리드로 개념화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수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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