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권리

초등학생 우민이(가명)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데 교육열이 남다르다. 두 돌이 지나면서 영어학원 스포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저녁엔 가정교사가 동화책 읽어주고 영어 비디오를 보여줬다. 퇴근한 부모는 아들이 그날 공부한 내용을 점검한 후 잠자리에 들게 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리조트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도 수영이나 점토 교사에게 무언가를 배우며 지냈다. 우민이는 어떻게 컸을까.
▷우민이는 학원 친구들과 싸우거나 교사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고, 초등학생이 된 후로는 못 말리는 문제아가 됐다. 검사 결과 우민이는 지능은 높은데 정서와 사회성 발달은 더딘 것으로 나왔다. 교육부가 ‘놀이, 아이 성장의 무한 공간’이라는 연구서에서 ‘놀 권리’를 잃고 불행해진 아이의 대표 사례로 소개한 내용이다. 정부는 내년 아동의 놀 권리를 명시한 아동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뇌와 신체를 발달시키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놀 권리’는 ‘공부할 의무’에 밀려난 지 오래다. 초등학생의 일평균 학습 시간은 6시간 49분, 여가 시간은 49분이다(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 동아일보가 한국과 미국의 평범한 초6 학생의 방과 후 일과를 비교한 적이 있다. 한국 학생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5시까지 공부방-저녁 먹고 영어학원-주 3회 2시간씩 수학 과외-밤 12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표다. 반면 미국 학생은 오후 3시 반 하교-체육활동-밴드활동-저녁식사 후 1시간 숙제-2시간 놀기-밤 10시 취침이다.
▷놀이의 질은 더 심각하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보고 게임하고 채팅한다. 운동 시간이 늘면 자아존중감과 생활만족도가 높아지지만 미디어 이용 시간이 길면 우울감과 공격성만 강해진다. 놀이의 양과 질 모두 부실한 한국 어린이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5∼14세 우울증 환자도 2020년 9621명으로 3년 새 49.8%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 우울증 환자 증가폭은 23.2%다.
▷아동의 놀 권리란 어떻게 놀지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놀이의 기회는 균등하며, 놀이의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놀이 시간과 내용을 강요하지 않고, 정부는 취약계층 아이에게도 놀 기회를 보장하며, 피아노는 수행평가 때문에, 농구는 키 크라고 시키는 등 놀이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에겐 ‘놀이가 밥’이라고 했다. 커서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그만 놀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건 아이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밥을 뺏는 것만큼 무지하고 잔인한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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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징계권
프랑스 사회에선 자녀 체벌(體罰)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지하철이나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아이 뺨과 엉덩이를 때리는 부모가 드물지 않다. 그런 프랑스 사회에 유럽 인권 감시 기구가 "자녀 체벌을 금지하라"고 2015년 요구했다. 이듬해 프랑스 의회가 '체벌금지법'을 통과시켰지만 헌법재판소가 "훈육과 체벌 금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며 제동을 걸었다. 작년 말 프랑스 의회는 같은 법안을 또 통과시켰다고 한다.
▶캐나다엔 '형법 43조를 지키는 모임'이란 시민 단체가 있다. '합당한 범위' 안에서 부모가 자녀를 체벌하면 아동 학대로 처벌받지 않도록 한 규정이다. '사랑의 매' 옹호 단체까지 있는 것은 그만큼 체벌 제한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머리나 얼굴을 때리지 않아야 한다. 특히 2세 이하와 12세 이상 자녀라면 어떤 경우도 체벌할 수 없다. '회초리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서양 속담이 무색할 정도다.

▶'어린 시절 받은 학대는 DNA에 그대로 각인돼 다음 세대로 유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미 하버드대 연구 결과가 작년 발표됐다. "학대로 특이하게 변형된 DNA가 자손에게 전해져 정신 질환 유발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작년 국내에서 아동 학대가 2만4433건 발생해 30명이 숨졌다. 학대당하는 아이가 하루 평균 67명이다. 학대 책임자는 70~80%가 부모라고 한다.
▶'사랑의 매'가 좋으냐 나쁘냐는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손바닥으로 엉덩이나 팔다리를 때리는 정도'의 가벼운 체벌도 아이들의 공격 성향을 높이고 인지 장애 등 부정적 행동을 초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반면 '부모님의 회초리가 내 인생을 바로잡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인지 아직 구별할 수 없는 어린이에게 육체적 자극으로 분명한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 옳으냐 그르냐는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23일 정부가 "민법에 규정된 '친권자 징계권' 조항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친권자는 자녀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민법 915조의 징계권이 마치 부모가 자녀를 때려도 된다는 뜻으로 오인될 수 있어 징계 범위에서 체벌을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친권자 징계권'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 찬반 논쟁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박은호 논설위원, 조선일보(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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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애를 키워보니..
상당수 도쿄 쇼핑센터는 작은 어린이 놀이 공간을 매장 중심에 두고 있다. 이런 곳에 두 살짜리 아이를 데려가면 늘 난처하다. 놀이 공간인데도, 아이인데도 일본 아이들은 혼자 놀거나 엄마와 논다. 우리 아이는 유전자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무조건 다른 아이들에게 달려가 들이댄다. 일본 아이들은 십중팔구 피한다.
일본 아이들이 그러는 게 천성이라고 여겼는데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년 어느 날 놀이 공간에서 모처럼 우리 아이를 반겨주는 일본 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둘이 놀이 공간을 빙빙 돌면서 웃고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그러자 주변에서 물건을 고르던 일본 엄마가 달려와 자기 아이를 붙들더니 뺨을 때리더란 것이다. "조용히 해!"라며. 아내는 "놀아준 아이에게 미안해 혼났다"고 했다.
몇달 전 아이를 동물원 물개 쇼에 데려갔을 때다. 물개가 잘 보이는 앞자리가 어린이 공간이었다. 안내원이 우리 아이를 포함해 20명 정도 아이들을 세 줄로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 아이들은 홀로 물개를 보는데 우리 아이만 다른 아이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미안해 쇼가 끝나기 전에 아이를 끌어냈다. 다른 장소에서 이어진 독수리 쇼 때도 그랬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보니 다들 엄마 곁에서 보고 있는데 독수리를 만지겠다며 혼자 나서는 아이가 보였다. 우리 아이였다.
동네에 아이를 데려나가면 일본 할머니들은 "몇살이냐"고 말을 건다. "두 살"이라고 하면 "크네" "건강하네"라며 몇 가지 정해진 덕담을 건넨다. 여기가 선(線)이다. 물론 살다 보니 아이를 만진다거나 안아준다거나 뽀뽀하는 일을 일본에서 겪은 적도 있다. 관광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이다. 아이를 안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일도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직원이 "편하게 드시라"며 아이를 봐 주기도 한다. 아이와 놀아준다며 곁에서 공중 부양까지 한다.
아이와 한바탕 씨름을 하면 "이제 슬슬 박달나무 매를 깎아야 할 때인가" 하고 고민한다. 아내는 "한국 가면 우리 아이가 정상일 것"이라고 한다. "주눅이 든 아이보다 활달한 아이가 좋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남에게 폐가 되는 아이라도 좋으냐"고 바꿔 물으면 물론 아니다.
일본 식당의 직원은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대신 아기 의자와 만화가 그려진 식기, 때론 작은 장난감을 가져다준다. 한국 식당이 정을 준다면 일본 식당은 배려를 주는 것이다. 아기 의자에서 혼자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를 보면 가엾기는 하다. 그렇다고 아이가 식당에서 붕붕 날아다닐 때 달게 밥이 넘어간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아이를 만지고 껴안고 뽀뽀할 때도 곁에서 함께 웃었지만 솔직히 마음은 영 아니었다.
니시와키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12일자 본지에 기고한 에세이 '한국에서 애를 낳고 키워 보니'를 읽으면서 일본에서의 육아를 생각했다. 그가 한국 육아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듯 나 역시 일본 육아문화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듯했다. 서로 장점만 바라보면 신기할 정도로 일본에 모자란 것이 한국에 많고, 한국에 모자란 것이 일본에 많다. 연말에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가 남에게 폐를 끼칠 때 매를 들고, 다른 아이를 만났을 땐 1m 정도 거리에서 "안녕" "귀엽네" 하고 다정한 말만 전할 생각이다.
-선우정 도쿄특파원, 조선닷컴(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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