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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설립자 전형필] [명품은 값을 깎지 않는다] ....

뚝섬 2022. 5. 1. 05:55

[간송미술관 설립자 전형필] 

[명품은 값을 깎지 않는다] 

[결함투성이 인간 향한 젊은 의학자의 연민, 獨 문학의 전설이 되었다]

 

 

 

간송미술관 설립자 전형필

 

영국인 소장 명품 고려청자, 기와집 400채 값 내고 되찾아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

 

우리나라 대표적 사립 미술관인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에서 7년 만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요. 이 미술관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고려청자, 신윤복의 '미인도' 등 국보 12점을 포함해 1만6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한 곳이죠. 누가 이 귀중한 유물들을 모아 미술관을 세웠던 걸까요? 숱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 '문화 독립운동가'로 불린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습니다.

논 1만마지기 내놓으며 지킨 고려청자

1937년, 일본 도쿄에 살던 한 영국인은 몹시 불안한 심정이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일본을 뜰 때가 된 것 같은데.' 1930년대 들어 일본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냈고, 한 해 전인 1936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2·26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일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죠. 이 영국인은 귀족 출신 변호사 존 개스비였는데,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져 고려청자 명품들을 많이 수집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청자들을 처분할 때가 된 건가!'

그때 이 소문을 듣고 그의 앞에 나타난 조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른을 갓 넘긴 간송 전형필이었죠. 개스비의 소장품을 본 전형필의 눈이 번쩍였습니다. 아기 원숭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표현한 '청자 모자(母子) 원숭이형 연적', 상상 속 동물의 자태를 기품 있게 나타낸 '청자 기린형 향로', 고려청자 특유의 상감 기법(표면에 무늬를 새겨 그 속에 보석이나 자개 등을 박아 넣는 기법)이 유감없이 구현된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그의 눈에 비친 청자들은 모두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명품이었고,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지킬 기회였습니다. "제게 파십시오! 조선에도 이렇게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마침내 전형필은 '개스비 컬렉션'의 청자 등 도자기 20점을 40만원에 사들인 뒤 전세 비행기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고 하는데, 1930년대의 1원을 현재 가치 약 12만원으로 친다면 480억원이 됩니다. 전형필은 이 거래를 위해 논 1만마지기(약 661만㎡)를 내놓았다고 하는데 그가 물려받은 토지의 4분의 1 정도였습니다.

'문화유산 지키는 독립운동' 펼쳐

서울 출신인 전형필은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는 한국 문화유산의 역사에서 무척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라 없는 백성을 돕는 변호사가 되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을 만나 큰 감화를 받습니다. 오세창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영원히 합병되는 역사는 동서고금에 없네. 그래서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유물을 가져가려 하는 것이지."

전형필은 "서화(글씨와 그림), 전적(책과 문서)과 골동(오래됐거나 희귀한 예술품)은 조선의 자존심"이라고 확신한 뒤 문화유산을 감식하는 눈을 키웠습니다. 그는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고서적과 고미술품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김홍도·김득신·심사정의 그림들과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같은 도자기, '동국정운' 같은 귀중한 고서들이 그에 의해 안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사카 골동품상의 손에 넘어간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되찾아온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지킨 우리 문화재는 어느 것 하나 귀중한 유물 아닌 게 없습니다만,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유물은 역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 연구자들이 탄압받던 1943년 전형필은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했습니다.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달라"는 소장자에게 "그건 그 책의 가치에 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며 그 10배인 1만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해례본은 한글이 어떻게 창제됐는지 그 과학적인 제작 원리를 설명한 책입니다. 그가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원리를 여전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6·25 때 북한 약탈 간신히 막아내

전형필은 수집품을 관리하고 전시하기 위해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을 세웠습니다.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은 뒤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보화각에 초청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감격스러운 순간도 있었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보화각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유산을 평양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형필은 근처 빈집에 몸을 숨겼고, 북한군은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고미술 수집가 손재형에게 유물 포장 업무를 맡겼습니다. 이들은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더 튼튼한 상자가 필요하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포장하고 꺼내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끌었고, 미 군정 시절 손님 접대용으로 마련했던 미제 위스키를 꺼내주면서 술판을 벌이게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천상륙작전 직후 서울이 빨리 수복되면서 북한군은 유물을 그대로 놔둔 채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듬해 1·4 후퇴 때 전형필은 중요한 유물을 기차에 싣고 피란을 갔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수 유물이 흩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육 사업을 벌였던 그는 재단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도 끝까지 보화각의 유물을 지켜냈다고 합니다. 전형필은 만 56세에 급성 신우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2014년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훈장 등을 줌)됐습니다.

 

[간송미술관과 보화각]

보화각(葆華閣)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란 뜻이에요. 1938년 간송 전형필이 고미술품과 고서적 등 문화유산을 전시하기 위해 지었죠.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한 모더니즘 양식 2층 건물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을 지켜냈다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건물 자체도 2019년 등록문화재가 됐습니다. 보화각은 1966년 '간송미술관'이란 간판을 걸었습니다. 오랜 기간 1년에 두 차례 특별전 때만 문을 열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미술관으로 인식됐었는데, 대구 간송미술관이 내년에 개관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보화각은 이번 전시가 끝나는 6월 이후 약 1년 반 동안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청자 모자(母子) 원숭이형 연적’이에요. 아기 원숭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청자 특유의 상감 기법이 구현된 보물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기획·구성=조유미 기자/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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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값을 깎지 않는다

 

[조용헌 살롱]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1906-1962). 필자는 15년 전쯤 간송 집안 사람들을 집중 인터뷰하면서 내린 결론이 ‘문화재로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었다. 왜정 때 조선의 부자로는 호남에 인촌 김성수가 있었고, 영남에는 경주 최부자, 충청도에는 공주 갑부 김갑순이 있었다. 서울에는 간송 전형필이다.

 

당시 간송의 재산은 10만석. 이 재산으로 조선의 미술품을 수집하였다. 간송은 죽어서 문화재를 남겼다. 간송 덕택에 한국에서 미술사라는 분야가 자리 잡을 수 있었고, 후학들이 미술품을 감상하는 안목이 배양될 수 있었다고 본다. 간송은 미술품을 수집할 때 특징이 값을 깎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값을 깎는다고 소문나면 골동상들이 일급 물건은 가지고 오지 않는다.

 

1937년 도쿄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30년 동안 거주했던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가 그동안 수집했던 고려청자들을 팔고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평소 개스비의 청자들을 주목하고 있던 간송은 황해도 땅 5000석을 팔아서 그 돈을 들고 도쿄로 날아갔다. 3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 사람이 자신의 청자 컬렉션을 전부 사겠다고 덤벼드니까 개스비는 ‘네가 감히 이걸 사겠다고. 돈은 가지고 있어?’ 하는 심정으로 간송을 대하였다. 당시 쌀 1만석에 해당하는 거금을 요구하였다. 간송은 그 자리에서 군더더기 없이 ‘OK, 내가 사겠다’고 결정하였다. 공주에 있던 땅 5000석을 추가로 팔아서 값을 지불하였던 것이다.

 

피카소부터 모네에 이르기까지 세계 일류 작품들을 수집한 이건희도 간송처럼 물건 값을 깎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수는 깎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충분히 알아보는 ‘지물지감(知物之鑑)’이 있어야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안목, 이것이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이건희는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덕후’ 스타일이었지 않나 싶다. 이런 내성적 성향의 인간들이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고 거기에서 통찰력을 뽑아내게 된다. 후천적인 교육도 작용하였다. 아버지 이병철의 컬렉션을 보고 안목이 길러졌다. 명품을 많이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사용해 보아야만 안목이 깊어진다. 보는 것 외에도 촉감으로 느끼고 심지어는 그 작품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도 감지할 수 있어야만 안목이 숙성된다.

 

간송이 일본 부자들과 경쟁을 하였다면 이건희는 루이비통 회장을 비롯한 세계의 부호들과 경쟁을 하였다. ‘李컬렉션’이 한국의 문화 산업을 일으키는 종잣돈이 될 것이다.

 

-조용헌 교수, 조선일보(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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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투성이 인간 향한 젊은 의학자의 연민, 獨 문학의 전설이 되었다

 

[박종호의 문화一流]

 

리마트강에서 바라본 취리히 도심

 

스위스 최대의 도시 취리히는 도심 가운데로 리마트강이 흐르면서 도시를 동서 양편으로 나눈다. 스위스 하면 떠올리는 은행이나 시계점이나 초콜릿 가게 등이 즐비한 화려한 곳은 서안(西岸)이지만, 깊은 매력은 동안(東岸)에서 맛볼 수 있다. 그곳은 대학이 모여 있고 학생과 예술가가 많으며, 골목마다 중립국으로 피신했던 망명객들의 자취가 배어 있다.

 

그 동네의 경사진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바로 레닌이 살던 집이다. 러시아에서 도망친 레닌은 슈피겔가세 14번지의 작은 방에서 살았다. 그는 여기서 중앙도서관까지 매일 걸어 다니면서 자신의 이론을 집필하고 혁명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을 성공시켰으니, 그야말로 공산 혁명의 성지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옆집인 12번지에도 현판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알아보는 사람은 레닌에 비하면 아주 적다. 거기에는 “1837년 2월 19일 여기서 게오르크 뷔히너가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뷔히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짧은 한 줄에 얼마나 많은 아쉬움이 들어있는지 울컥하는 감상이 밀려온다.

 

게오르크 뷔히너/위키피디아

 

1836년 9월에 23세의 젊은 독일 의학자 게오르크 뷔히너(Karl Georg Büchner·1813~1837)는 취리히대학 의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1월부터 같은 대학에서 해부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직장을 위해 취리히로 이사한 뷔히너가 얻었던 방이 슈피겔가세 12번지였다. 여기서 골목을 따라 취리히대학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뷔히너는 이 집에 묵으면서 철저하게 신경비교해부학 강의를 준비한다. 그러나 가을 학기가 개강하자 수강생이 적어서 실망한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훌륭한 교수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이 방에서 자신이 쓰던 원고를 꺼내서 집필을 계속한다. 이 희곡이 문학사상 불세출의 문제작인 ‘보이체크'다.

 

그러나 단 한 학기만을 보내고 겨울방학에 뷔히너는 병석에 눕고 만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인데, 해부학 표본을 만들다가 감염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결국 뷔히너는 봄 학기를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앞날이 창창하던 젊은 교수는 학문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죽었지만, 그가 써놓았던 글로 세계 문학계를 뒤흔들게 된다. 지금도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다.

 

취리히 대학 본관/취리히 대학 홈페이지

 

뷔히너는 의사인 아버지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하고 글을 썼다. 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의대에 진학하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해부학자가 되었지만, 틈틈이 희곡과 소설을 집필하였다.

 

뷔히너의 작품들은 세상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천재들이 연구실이나 서재에 갇혀서 사회와 단절하거나 독선적인 성향을 가지기 쉬운 데에 반해, 뷔히너는 항상 남을 생각하고 다 함께 나아가려고 했던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교수로서도 강의 준비에 최선을 다하였고 늘 학생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선생이었다. 그의 죽음도 학생들을 위한 강의 준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운명은 그에게 비록 단 한 학기만을 허락하였지만, 만일 계속 강의를 했다면 학문적으로도 업적을 남기고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수가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뷔히너는 짧은 삶에서 ‘당통의 죽음'과 ‘레옹스와 레나' 그리고 미완성의 ‘보이체크’ 등 희곡 3편과 소설 ‘렌츠’ 1편을 남겼다. 아주 적은 숫자지만, 23세라는 짧은 삶과 의학도이자 의대 교수였던 직업에 비추어보면 열정과 성실의 소산이다. 그리고 단 4편으로 그는, 비록 죽은 다음이지만 독일 문단에 폭풍을 일으킨다.

 

괴테와 실러로 대표되던 독일 문단에 뷔히너가 창작해낸 극 중 인물들은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 주인공은 이상적이거나 적어도 이상을 지향하는 인간상이었으며, 그런 태도와 행동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에 반하여 뷔히너는 ‘결함을 가진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그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과 애정을 환기했다.

 

뷔히너의 이른 죽음으로 그의 작품들도 함께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두 세대나 흐른 뒤에 봇물이 터지듯이 공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최대 걸작인 ‘보이체크'가 미완성 부분을 수선(修繕)하여 초연되었다. 주인공 보이체크는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던 실존 인물로, 이미 정신 질환 판정을 받았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컸던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뷔히너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보이체크'에서 한 기층민을 살인자로 만들어가는 인간들의 모순과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다.

 

우리는 위인을 말할 때면 주로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승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쓰러져 간 사람 중에도 생각이나 시도만으로도 기억하거나 존경할 사람은 많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쓰러져 갔던 젊은 학자이자 예술가를 생각한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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