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과 왕따
윌리엄 골딩의 장편 ‘파리대왕’은 아이들만 태운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한 뒤 섬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다. 모든 소년이 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뚱뚱하고 행동 굼뜬 한 소년만은 돼지라는 뜻의 별명 ‘피기’로 불린다. 이 별명이 사악한 힘을 발휘한다. 별명 부르기가 거듭될수록 소년들은 피기가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잊어간다. 왕따가 된 피기는 무리 밖으로 내쳐져 죽는다. 1950년대 소설이지만, 왕따가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내다본 작품이다.

▶별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보는 전통 유교 사회에선 타인을 존중하는 뜻으로 별칭인 자(字)와 호(號)를 썼다. 유교 성인식인 관례 때 받아 평생 쓰는 자(字)보다는 성격, 취미 등을 반영해 스스로 짓거나 지인이 지어주는 호(號)가 오늘날 별명에 더 가깝다. 친구면 “여보게, 율곡”, 후학이면 “율곡 선생님” 했다. 사임당 신씨처럼 거처 이름인 당호(堂號)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인터넷 아이디(ID)도 현대판 당호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 기틀을 다진 카이사르가 별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무찌른 카이사르의 조상이 코끼리라는 뜻의 카르타고어인 ‘카이사이’를 별명으로 얻은 게 성(姓)이 됐다고 한다. 별명이 본명보다 유명한 사례도 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 농구 스타 매직 존슨 본명은 어빙 존슨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별명을 정적 조롱하는 데 썼다. 연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슬리피 조’, 단신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은 ‘미니 마이크’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별명을 금지하고 이름 뒤에 우리의 씨(氏)에 해당하는 상(さん)을 붙여 부르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교토 공립 초등학교 160곳 중 절반 넘게 ‘상’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별명이 친구를 놀리는 데 쓰여 왕따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직장에서 경직된 상하 관계를 허물자며 ‘상무’ ‘부장’ 등 직책이 아닌 ‘상’으로 통일했는데, 이를 학교에서 왕따 퇴치용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왕따의 폐해가 심각하다. 사회적으로 파문당한 것과 같은 왕따는 스트레스 대응 능력이 미숙한 청소년에게 감당 못할 충격이 된다. 가해자를 엄벌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어린 시절 친구를 괴롭혔던 일로 활동을 접는 것도 안타깝다. 어려서부터 서로 존중하는 언어 습관을 갖도록 유도해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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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초등생 별명 금지

학창 시절 별명 하나 갖지 않은 이는 찾기 어렵다. 키가 작으면 ‘땅꼬마’, 얼굴이 사각형이면 ‘도시락’, 얼굴이 까무잡잡하면 ‘시커먼스’ 같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장점을 추켜세우는 것보다는 외모 특징이나 신체적 약점을 잡아서 놀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문제의식이 약했던 과거에는 장난처럼 넘어갔지만 요즘은 학교폭력으로 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대구에서는 동급생을 ‘진지충’, ‘설명충’이라고 불렀던 중학생이 법정에까지 섰다.
▷최근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끼리 별명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성 뒤에 존칭인 ‘상(さん)’을 붙여 부르도록 교칙을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한국식으로 하자면 초등학생들끼리 서로 ‘○○ 씨’에 가까운 존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학생들이 별명을 부르는 게 ‘이지메’(집단 따돌림)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2020년 전국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42만여 건의 ‘이지메’ 사례 중 60%가 ‘친구들의 놀림’이었다.
▷별명 금지 교칙을 놓고 일본 내에서는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상대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줘서는 안 되겠지만, 별명 자체가 사라지면 학교가 너무 삭막해지는 게 아니냐는 항변이 나온다. 금지를 명문화해 놓으면 아이들이 오히려 더 별명을 부르고 싶어지는 역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교사들도 있다. 학교 밖에서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일본의 한 리서치 회사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별명 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27.4%로 찬성(18.5%)보다 많았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은 과거부터 집단 따돌림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왔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소수자에 대한 배척 현상이 두드러진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감염자가 나온 학교를 상대로 “불 질러 버리겠다”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사이버 따돌림 등으로 일본 초중학생의 자살 건수는 역대 최고치까지 늘어났다.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상’ 존칭을 붙이도록 한 데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당국의 절박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부터 다시 증가 추세인 학교 사이버폭력 중 언어폭력은 42.7%로 가장 많다. ‘이백충’(부모 월수입이 200만 원)처럼 가정형편을 가지고 놀리는 저급한 별명까지 생겨났다. 거주하는 아파트 종류나 평수를 조롱하는 별명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사용되는 게 현실이다. 일본의 별명 금지 교칙을 수입해야 할 판이다. 꼭 ‘님’이나 ‘씨’ 같은 존칭을 붙일 필요도 없다. 상대의 소중한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게 존중과 존경의 시작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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