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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위안부 합의는 정말 ‘굴욕’이었나] [日, 한 세기 전 꽃핀.. ]

뚝섬 2022. 6. 24. 10:23

[그때 위안부 합의는 정말 ‘굴욕’이었나]

[日, 한 세기 전 꽃핀 ‘다이쇼 민주주의’에서 후퇴]

 

 

 

그때 위안부 합의는 정말 ‘굴욕’이었나

 

의미 작지 않았던 日 책임인정
진영논리에 휘둘리다 물거품
5년간 피해자들 恨만 더 쌓여
尹 정부 반면교사 삼아야
 

 

윤미향 의원.

 

다음 주 나토 정상회의 무대에서 한·일 관계 돌파구를 찾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시작된다.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미래 지향’ 의지가 충만해도 현실적인 과거사 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강제징용과 함께 과거사 이슈의 한 축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최근 공개된 ‘외교부-윤미향 면담’ 문건은 수년간 공들인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에서 우리 정부가 수십 년간 일본에 요구해온 핵심은 ‘사과와 책임 인정, 그에 따른 배상’이었다. 그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들의 수용 여부였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협상을 한 당국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들은 합의 후 피해자들이 반대하면 자신들이 ‘매국노’로 몰릴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합의 전에 10차례 이상 피해자 측과 만나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당시 정의연 대표였던 윤미향 의원은 “나를 (피해자 측) 창구로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외교부 문건에 따르면 합의 발표 전날에 협상단은 윤 의원에게 ‘아베 총리 직접 사죄·반성 표명’ ‘일본 정부 예산 10억엔 출연’ 등 핵심 골자를 미리 알려줬다. 그 무엇으로도 피해자들 한(恨)을 100% 풀 수는 없겠지만, ‘일본 정부 예산 출연+총리 사과’는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의미가 작지 않았다. 윤 의원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상가들은 ‘피해자 동의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 의원은 우리 측 조치, 즉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해결 노력’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 자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부분을 듣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정부가 굴욕 합의를 숨겼다”고 했다.

 

이 부분은 따져봐야 한다. 소녀상이나 국제사회 비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책임 인정, 배상을 외면하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납득할 만한 사과·배상을 얻어내면 굳이 국제법적 논란을 일으키며 외국 공관 앞에 소녀상을 둘 필요는 없다.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의미 있는 공간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또 사과·배상을 받으면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욕할 이유도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최종적·불가역적으로 문제는 해결된다. 만약 일본이 합의를 안 지키고 딴소리하면 그때 다시 소녀상, 국제사회 비판을 동원하면 된다. 이걸 갖고 합의 전체에 ‘굴욕’ 딱지를 붙이는 게 맞을까.

 

책임 인정, 배상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면 윤 의원은 사전 설명을 들었을 때 피해자들과 공유하고 ‘절대 안 된다’고 제동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 등은 “윤미향이 합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합의 발표 후 여론에선 소녀상만 부각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국면이 됐다.

 

한번 꼬인 매듭은 계속 엉킬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전 정부 공격 수단으로 활용했고, 외교부는 전후 맥락을 뻔히 알면서도 ‘엄청난 흠’이 있었다며 사실상 합의를 파기했다. 이 때문에 가해자인 일본이 “한국이 국가 간 합의도 안 지킨다”고 큰소리치는 상황이 되자 문재인 대통령은 뒤늦게 “양국 간 공식 합의가 맞는다”고 했다. 위안부 합의가 죽도 밥도 아닌 상태가 된 5년 동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사이 35명이던 생존자 중 24명이 세상을 떠났다.

 

안 그래도 난제인 한·일 문제에 국내 정치, 진영 논리, 여론 몰이가 얽히고설키면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윤석열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임민혁 기자, 조선일보(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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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한 세기 전 꽃핀 ‘다이쇼 민주주의’에서 후퇴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요즘 일본을 경시하는 풍조(저팬 패싱)가 확산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부진과 한국의 급격한 성장이 맞물린 탓일 것이다. 특히 경제는 아직 몰라도 민주주의는 단연 우리가 낫다는 생각은 꽤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듯하다. 한국 민주주의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일본 시민도 꽤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전후 대부분을 자민당이 집권한 일본 정치는 내가 봐도 뭔가 침침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일본 민주주의는 오랜 전통과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살펴보자.》

 

日의회, 1890년에 생겨


일본에 의회가 생긴 것은 1890년이다. 당시 비유럽 세계에서는 유일한 의회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일본판 민주화 운동, 즉 ‘자유민권운동’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 지도자들은 의회 설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은 천황의 뜻만을 받들 뿐, 의회에는 초연하여 독자적으로 정책결정을 한다는 자세를 고집했다(초연주의·超然主義). 그러니 스스로 정당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5·16군사정변 후 공화당을 만든 김종필과는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의회를 장악한 반대파들은 증세와 예산편성을 둘러싸고 메이지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부정까지 해가면서 선거를 다시 치러도 정부는 의회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려고 할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의회와 정당의 힘이 커지자 메이지 원로 중 개명파에 속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당시 최대 정당 정우회(政友會) 총재에 취임했다. 다만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공화당을 직접 만들다시피 한 데 비해 이토는 기성 정당에 ‘영입’된 편에 가까웠다. 정우회는 “드디어 이토를 사로잡았다”며 쾌재를 불렀다.

 

‘다이쇼 정변’과 서양화 물결

 

1912년 ‘다이쇼 정변’ 이후 약 20년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조가 사회 전반을 휩쓴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이 기간에 보통선거, 언론 자유, 남녀평등을 강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청년층에선 서양문화가 빠르게 퍼졌다.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에 서양식 복장을 한 ‘모던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왼쪽 사진). 1928년 보통선거제에 따라 실시된 첫 총선 투표장에 줄지어 선 유권자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20세기 들어 메이지정부의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전 인구의 1%에 불과했던 유권자 수는 1919년엔 5.5%에 이르렀다. 이제 의회나 정당을 무시하고는 내각을 구성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토와 함께 메이지정부의 한 축이었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여전히 정당에 대해 고압적이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1911년 야마가타와 연결된 군부가 온건 노선의 사이온지(西園寺) 내각을 무너뜨리고, 육군 대장 출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우리에게는 가쓰라-태프트조약으로 잘 알려진 인물)를 총리로 만들자 민중이 봉기한 것이다. 1912년 2월 10일 가쓰라가 의회를 정회시키려 하자 민중들이 몰려와 국회의사당을 포위했다. 시위대는 친정부 신문사들을 습격하고 86곳의 파출소, 26대의 전차(電車)에 투석·방화했다. 이튿날 가쓰라 내각은 결국 총사직했다(다이쇼 정변). 4·19혁명 49년 전이다.

이로써 번벌정권(藩閥政治·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에 의한 정권)은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군부는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못했으니, 정당의 독무대가 펼쳐졌다. 이때부터 정치테러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1932년까지를 일본사에서는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로 부른다. 정치는 더욱 민주화되어 1925년에는 25세 남성 전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됐다. 총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는 관례도 형성되어, 정우회와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의 거대 양당이 번갈아 정권을 담당했다. 도시에는 서양 문물이 넘쳐났고, 정당조직은 농촌에까지 침투했다. 세련된 서양식 치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카페에서 ‘비-루(beer)’를 마시는 ‘모보(모던 보이)’, ‘모가(모던 걸)’는 이 시대의 상징이었다. 정말 일본의 ‘서양화’가 완전히 달성되는 듯 보였다.

 

군부에 짓밟힌 日민주주의

 

다이쇼 정변 당시 군부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며 의회에 몰려든 민중. 사진 출처 jugyo-jh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다. 그 핵심에는 군부와 농민층이 있었다. 선거 결과가 모든 걸 좌우하다 보니 정당들은 선거에 필사적이었다. 방대한 정치자금을 위해 대기업과 유착했고, 부패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정치운영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번벌 정치가들의 호쾌한(?) 정책 결정에 익숙하던 일본인들에게, 지루한 협상과 주고받기식 거래를 하는 정치 과정은 지리멸렬하게 보였다. 때마침 등장한 나치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식 정치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군부였고 1931년 9월 발생한 만주사변은 그 계기였다. 이때부터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치가에 대한 암살과 군부 쿠데타가 빈발했다. 마침내 1932년 5월 해군 장교들이 정당정치의 거물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당시 총리를 암살했다. 총리 임명권을 갖고 있던 천황은 정당정권을 포기하고, 해군 대장이자 조선총독을 두 번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총리로 임명했다. 정당내각제는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군부가 일방적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정당은 직접 총리를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의회를 거점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40년 10월 나치당 모델을 본뜬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만들어져 정당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런 군국주의하에서도 의회는 폐지되지 않았고, 의원은 여전히 정당 출신들이 다수였다. 많은 의원들은 군부독재에 협조했지만 개중에는 음으로 양으로 이에 저항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국제 정세를 예의 주시하면서 군부독재의 몰락을 기다렸다. 미군의 일본 점령 후 일본이 그토록 신속히 의회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힘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87년 이후 정당·의회 중심의 정치가 이미 35년째다. 국회의원의 힘은 날로 세지는데, 그들을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시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뢰도 역시 늘 바닥이다. 주변에 누가 정당원이라고 하면 도통 멋있어 보이질 않는다. 이러니 국회가 결정한 중요 사안을 민의기관이라고 할 수 없는 헌법재판소가 뒤집어도 국민 누구도 이런 제도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이 나라 최종 결정권자는 헌재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시민들에게 정당정치는 정말 울며 겨자 먹기인 것으로 보인다. 정당과 국회에 대한 이런 극도의 불신이 나는 불안하다. 혹시 어떤 선동가가 이를 대신할 그럴싸한 비전을 들고 한국 민주주의를 한 세기 전 다이쇼 데모크라시처럼 망가뜨리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면 기우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일보(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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