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세종의 정치’ 배신한 세종의 인재들] [공(公)-사(私) 혼돈의 시대에.. ]

뚝섬 2022. 6. 28. 08:10

[‘세종의 정치’ 배신한 세종의 인재들] 

[공(公)-사(私) 혼돈의 시대에 ‘늘공 대통령’이 할 일]

 

 

 

세종의 정치’ 배신한 세종의 인재들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말년의 세종 힘들게 한 문제는 집현전 출신 관리들이 저지른 비리
왕의 총애 믿고서 뇌물 받고 관리 채용, 관곡 빼돌리기 등에 개입
국정 토론하는 경연 중단한 세종 잘못도 커… 公私 혼동 관리 늘어

 

“상께서 훙(薨)하셨다.”

 

세종이 재위 32년에 돌아가셨다는 1450년 2월의 실록 기사다. 이 기사를 함께 읽은 세종실록 강독 멤버들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4년 넘게 격주로 읽어온 실록 속 세종은 대부분 진중한 모습으로, 또 때론 ‘그다음은 무얼까’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 세종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어떤 분은 “마치 거대한 산이 갑자기 ‘쿵’ 하며 땅 밑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저렇게 가시면 안 되는데…, 훈민정음 후속 사업 등 진행 중인 일은 어찌하라고…, 세자가 아직 준비 안 되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런데 열일곱 번째 완독한 요즘은 ‘무거운 삶의 무게, 정치의 압박으로부터 비로소 풀려나셨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크다. 세종 스스로도 훙서(薨逝·왕의 죽음)하기 불과 일 년 전에 “요즘 내가 분노 발작을 수시로 한다. 지금까지는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있지만, 시간이 더 흘러 혼미해지면 그조차도 안 될 수 있으니, 경들은 알라”고 고백하기도 했다(세종실록 31년 1월 27일).

 

/일러스트=박상훈

 

말년의 세종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건강 문제도, 가족 문제도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세종이 즉위하면서 공들여 만든 ‘인재의 저수지’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인 집현전 출신 관리들이었다. 정창손, 이현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 하위지의 형 하강지, 그리고 당대 최고의 수학자 이순지 등은 힘 있는 부서에 배치된 후 뇌물 받고 채용하기, 다른 사람 노비를 내 것으로 만들기, 관곡 빼돌리기 등 온갖 비리에 개입했다. ‘이 나라는 전하의 것이 아니라 조상들께서 물려주신 것’이라면서 대놓고 왕을 반박하기도 했다.

 

왕의 총애를 믿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저지하거나 만족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동지 집단이 최고 권력자를 배반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정조를 결정적으로 배신한 세도정치의 주역 김조순은 정조가 가장 아끼고 키운 초계문신 출신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종이 ‘특별한 예로 대우[禮待·예대]’하던 집현전 학사들이 어떤 계기로 ‘실지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迂儒·우유]’로 전락했을까? 나는 그 원인이 세종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재위 21년 후반부터 세종은 경연을 중단했다. 경연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으로 매월 5회가량 연 국정 토론장이었다. 집현전 학사 등 젊은 인재들이 고전에 기반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그 자리에 참석한 재상들이 경륜에 기반해 정책으로 만들고, 국왕이 결정해서 추진하는 곳이 경연이었다. 그런 자리가 사라지면서 일차적으로 재상들이 타격을 입었다. 젊은 인재들과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들을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재위 말년의 정승 하연은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일으키다가 백성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른바 ‘집현좌파’로 불리는, 그저 비판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지식인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실지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라는 세종의 비판에서 보듯이, 경연이 중단되면서 사리(事理), 즉 일에 기반한 이치를 살피고, 일[事]과 이치[理]의 균형을 잡아가려던 지적 노력이 무뎌졌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일만 성사시키면 된다는 사공적(事功的) 태도도 문제지만, 일에서 동떨어진 이치만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적 자세는 국가 경영에 치명적이었다. 변경(邊境)을 침입하는 오랑캐에게도 철저하게 ‘인(仁)과 의(義)’의 관점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그 예다.

 

집현전 부수찬 하위지의 이중적 태도는 공과 사를 혼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시험 답안지에 왕의 호불(護佛)행위를 비판하지 못하는 언관들은 자격이 없다고 써서 사헌부 관리들을 사퇴시켰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직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실되게 충간하는 신하를 포용해야 “산림(山林)의 거친 논의”, 즉 보통 사람들의 의견이 왕에게 수렴될 수 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기 형이 수령 재직 시 관청 곡식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서는 ‘꾸며진 말’이라고 부정했다. 형조의 조사로 형의 유죄가 밝혀지자, 이번에는 형 옥바라지를 해야 한다며 사직서를 냈다.

 

사를 위해 공을 저버린 그의 행위는 사리(事理) 분별을 최우선으로 배우는 집현전 학풍에서 벗어난 모습이었고, 왕의 한탄을 자아냈다. 믿었던 도끼로부터 발등 찍히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측근을 관리했던 태종과 대조되는,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세종의 말년이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조선일보(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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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사(私) 혼돈의 시대에 ‘늘공 대통령’이 할 일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前 정부는 ‘남의 돈 제 것처럼 갖다 쓴’ 정부.. 公을 바로 세우라는 요구가 ‘늘공’ 尹 선출
여사들의 옷값·법카 논란은 정치 공세 아닌 공·사 확실히 구분하라는 시대정신의 요청
새 정부도 ‘공적 마인드’ 갖춰야 순항할 것
 

 

지난 정권에 여러 이름이 있지만, 나는 ‘남의 돈을 제 것처럼 갖다 쓴 정부’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국민이 낸 세금을 제 편끼리 높고 낮은 자리에 나눠 앉아 가져다 썼으니 하는 말이다.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은 국세를, 김어준 같은 인물은 지방세를 가져갔으며, 윤미향은 후원금을 편취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들은 지금도 세비로 가계를 충당하고 있다. 소박한 아파트에 살던 대통령은 양산에 큰 집을 지어 내려갔는데,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규모의 재테크다. 대부분 사적 영역에서는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이 공적 영역의 젖줄과 만나면서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린 경우다. 그들이 부를 쌓는 동안 국민은 빚더미에 앉았다. 나라는 GDP 대비 가계빚 비율 세계 1위, 기업 부채 증가 속도 세계 2위 국가가 되었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김정숙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간 후 샤넬을 걸치는 세기의 패셔니스타가 되었다. 시민 단체가 추정한 그의 옷과 액세서리 비용은 천문학적 규모다. 한국납세자연맹이 170여 벌에 이르는 옷값을 공개하라고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한 건 정치 공세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지난 대선의 여당 주자였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배우자 김혜경씨의 법인 카드 논란도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법카’를 그렇게 마구 물 쓰듯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적 조직이라면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다. 세상이 바뀌어가는데 자기들끼리 딴짓을 하니 새 물결이 밀어낸 것이다. 공적 영역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적 요구가 ‘늘공’ 출신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일러스트=이철원

 

윤석열 대통령은 인지할지 모르겠지만 청와대 개방과 용산공원 개방이야말로 정확한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원래 시민들에게 속한 것을 시민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청와대의 나무 한 그루조차 대통령이 자기 월급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모두 국민 세금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도 그 나무 그늘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공관 마련 대신 자택에서 출퇴근하고 있고, 다른 지자체장들도 공관을 줄이는 분위기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그 정도 세상 흐름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사(私)’고 어디부터가 ‘공(公)’인가. 천지창조 이전 세상처럼 혼돈스러운 우리에 비해 서양에서는 오랜 기간 구분하고 다듬어온 역사가 있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 최대의 발견인 ‘개인’은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가 되었고, 17~18세기 유럽에서는 생각하고 말하는 개인들이 계몽주의 사조를 주도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민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국가와 교회의 역할이 정돈되었다. ‘사’가 보호해야 하는 영역으로 공고해지면서 ‘공’ 역시 법과 공정이 지배하는 엄한 곳이 되어야 했다. 그 둘이 잘못 섞이면 ‘부패’가 되고 ‘이해 충돌’이 된다. 그 때문에 공과 사는 절대 구분되어야 한다. 그 둘이 합작으로 도모한 부정적 결과가 ‘대장동 사건’쯤 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에서는 공과 사가 분화된 시기를 19세기 초반으로 본다. 식민지 초기인 18세기 중반만 해도 미국은 가족과 학교와 교회가 좁은 곳에서 뒤엉켜 사는 사회였다. 당시 보스턴 우체국에서는 누가 누구한테 편지를 받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고, 심지어 편지를 돌려 읽는 일(public reading)도 흔했다고 한다. ‘사회’와 ‘국가’가 분화되지 않았던 당시 정부의 요직은 토지를 소유한 개인이 차지했는데, 오죽하면 조지 워싱턴은 “공직이란 득(gain)이 없이 부담(burden)만 되는 일”이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미국에서 유럽의 공론장 같은 공적 영역이 생긴 건 ‘미국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이후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했듯, 개인의 독립 없이 나라의 독립은 없다. 미국 독립은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성의 산물이자, 공적 국가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인재(人才)란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공적 책무를 이해하는 ‘공적 마인드’를 겸비해야 한다. 명문 대학 입시에서 성적 못지않게 사회봉사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기적인 인재는 필요 없다. 성적 위주 입시 교육의 승자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소위 ‘엘리트’와는 결이 다른 평가 방식이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포진해 있는 윤석열 정부 ‘인재’들의 공적 마인드는 지금부터 시험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전 통장에 2000만원 밖에 없던 ‘늘공’ 대통령과 달리, 부인 김건희 여사는 수십억대 자산을 가진 개인 사업가였다. ‘사인’인 그가 대통령 부인이라는 공적 역할을 맡게 되면서 여러 말이 있는 것 같다. 후보 시절 ‘약속’한 대로 조용히 내조하는 게 좋겠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고, 불가피하게 공적 활동을 해야 한다면 그에 걸맞은 공적 조직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통령실이 어떤 결정을 하든, 분명히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앞서 김정숙 여사의 옷값과 김혜경씨의 법카를 문제 삼은 시대정신이 앞으로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시대정신이란, 정권을 몰아낼 만큼 힘이 세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공-사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개인’ 영역이 꿈틀거리면서 ‘공적 영역’이 분리-재편되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좀 더 근대적인 국가로 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새 정부가 시대의 바람과 방향을 맞춰 제대로 된 정책으로 키를 잡고 나아간다면 정부도 순항하고 나라도 발전할 것이다. 우리도 그런 정부, 지금쯤 가질 때가 되었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조선일보(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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