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 .. 日 급진적 극우 정당 약진] [ .. 한일의정서] [노구교(蘆溝橋) 사건]

뚝섬 2022. 7. 21. 05:30

[우려스러운 日 급진적 극우 정당 약진]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수용할 수 있다’-한일의정서]

[노구교(蘆溝橋) 사건]

 

 

 

우려스러운 日 급진적 극우 정당 약진

 

[특파원칼럼]

막말-역사 왜곡 쏟아내는 정당, 세력 키워
우경화 치닫는 日 막을 브레이크는 어디에

 

집권 자민당 압승으로 막을 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뒤늦게 주목을 받는 정당이 있다. 참정당(參政黨)이라는 군소 정당이다. 비례대표 투표에서 175만 표를 얻어 1석을 획득해 원외 정당 중 유일하게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선거 기간 매스미디어는 참정당을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인터넷과 거리에서는 달랐다. 유튜브 구독자 20만5000여 명으로 자민당(13만5000여 명)을 훌쩍 앞섰고 유세장에는 수백 명이 모여 환호했다. 일본 우익이 즐겨 쓰는 ‘일본민족혼(大和魂) 부활’을 앞세우며 ‘일본인 자존심을 고양하는 역사교육 실시’ ‘외국인 배척’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코로나19는 음모’ ‘백신은 가짜’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도 내놨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정당이 나타났다”며 열광하는 지지자가 적지 않았다.

오사카 군소 우익 정당이던 일본유신회는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리며 어엿한 주요 야당으로 자리를 굳혔다. 자민당에 “헌법을 개정할 거면 날짜부터 잡자”고 압박하고 ‘자위대 헌법 명기’를 강하게 내세우며 개헌 세력의 주요 축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도통신 출구조사에서 참정당의 20대 득표율(5.9%)은 100년 역사 일본공산당(4%)을 앞섰다. 일본유신회는 비례대표 8명을 당선시키며 비례만 놓고 보면 자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언제나 자민당이 이기는 ‘고인 물 정치’ 같지만 일본 정치사를 돌아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1990년대 신당(新黨) 붐, 2000년대 민주당 정권 교체 같은 변화의 바람은 늘 있었다. 과거 이런 변화의 바람이 정치권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면 최근에는 야당이 지리멸렬해진 틈을 타 급진 정당이 고개를 든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정당의 약진은 유럽의 급진 정당 인기와 다르지 않다. 장기 경기 침체, 코로나19 방역 피로감, 기성 정당에 대한 실망 등으로 유권자들이 자극적인 구호에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를 도모할 변변한 야당이 없는 일본 정치 현실에서 급진 정당은 비논리적이지만 그럴싸한 구호로 유권자를 유혹한다.

이들 급진 정당을 소수 정당으로 무시할 게 아니다. 이들은 드러내놓고 역사 수정주의, 혐한(嫌韓) 현상을 조장하고 있다. 올 4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한일 정책협의단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면담하자 일본유신회는 “외교의 ABC도 모른다”고 비난했다. 지난해 일본유신회 의원이 국회에서 교과서에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자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와 강제 연행 표현의 삭제 및 변경을 결정했다.

 

과거에는 국회의원 개인이 망언을 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달라졌다. 급진적 극우 정당이 조직적으로 역사 왜곡과 ‘무례한’ 외교를 요구하면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식으로 도발을 정당화한다. 자민당이 외부 눈치를 보느라 못 하는 말들도 거침없이 쏟아낸다. 당장 참정당이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일본유신회가 정권을 잡지는 않겠지만 이들의 주장은 그럴듯한 정치권 목소리로 포장돼 일본 사회 구석구석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헌법 개정, 방위비 배증(倍增)을 추진하는 일본 정치권에서 우경화 가속 페달을 막을 브레이크는 갈수록 사라져 간다.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겸허히 반성하길 기대하기에는 일본이 너무 멀리 가버린 건 아닐까.

-이상훈 도쿄 특파원, 동아일보(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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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수용할 수 있다’-한일의정서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04년 한일의정서 한 장에 사라진 용산 둔지미 마을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경원선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있는 이 건널목 이름은 ‘돈지방’이다. 조선 후기 이 일대 행정명 ‘둔지방(屯之坊)’이 변형된 명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둔지방’이었고 현 한강대로 서쪽 지역은 ‘용산방(龍山坊)’이었다. 각각 해당지역 최고봉인 ‘둔지산’과 ‘용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둔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 전 지역을 ‘용산’이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둔지산’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둔지산기슭에 있던 마을 ‘둔지미’와 그 주민들에 대한 기억도 실종됐다./박종인 기자 

 

‘일본군이 서빙고와 둔지미, 이태원 등 12개 동 토지에 말뚝을 박았다. 이미 내부(內部)와 약정이 된 사안이지만 내부는 주민에게 이를 알리지도 않았고 집행 예고도 없었다. 때가 이르러 일본군에 쫓겨난 주민이 각 동별로 수천이니 하루아침에 집도 밭도 없는 신세가 되어 거리에서 통곡을 했다. 파헤쳐진 무덤 또한 백 군데가 넘었다. 하늘을 찌르는 원망으로 만민이 함께 내부에 고발했지만 관리들과 백성 사이 싸움이 벌어져 사무실 유리창이 돌에 깨지고 내부대신 이지용은 뒷문으로 도주했다.’(김윤식, ‘속음청사’ 下, p148, 1905년 8월 19일, 국사편찬위)

 

도대체 무슨 일인가. 대한제국 ‘행정자치부’가 제국 영토 그것도 제국 수도 한성 남쪽 12개 동에서 난동한 외국군을 방치하고 이를 고발하는 주민들을 피해 장관이 도망가다니. 바로 러일전쟁 개전 직후 한일 두 제국 사이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이를 체결한 고종 정권과 이로 인해 날벼락을 맞고 사라져버린 용산 둔지미 마을 이야기다.

 

기습적인 ‘중립 선언’

 

동아시아를 넘어 근대 세계 강국이 된 일본과 태평양을 향해 동진 정책을 벌이던 러시아는 충돌이 필연적이었다. 그 사이에 낀 대한제국에 살길은 중립 혹은 한쪽에 연합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종 정권은 중립을 택했다. 1903년 내내 고종은 각국 주재 제국 공사를 통해 ‘러일전쟁이 터지면 대한제국은 중립을 지킨다’는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했다. 일본과 러시아에 주재하는 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재적 전쟁 당사국인 러일 양국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면 본국은 관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고 국내에 공식 선언했다.(1903년 11월 23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월 21일 중국 지부(芝罘)에서 고종이 보낸 특사가 전시 중립 전보를 각국에 타전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 정부는 황명을 받들어 엄정 중립을 선언한다.’(‘일본외교문서’ 37권1책 332, 박희호,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선언시말’, 국사관논총 60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전쟁에 임박해 대한제국을 병참기지로 이용하려던 일본에는 말 그대로 불의의 한 방이었다. 그런데 전혀 대미지가 없는 주먹이었다. 황제의 선언에 그 어느 국가도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외면당한 중립선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중립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예산을 투입했지만 대한제국은 ‘무기제조창을 설치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총알 한 개 주조하지 못했다.’(1904년 3월 1일 ‘승정원일기’) 또 제국 건국 2년 뒤인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군부대신이 25명 바뀌었다.(장영숙, ‘고종의 정권 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 한국학 31권3호,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2008) 그래서 ‘장수는 병사를 모르고 병사는 장수를 모를 정도로’ 군기 또한 전쟁은커녕 중립 유지도 불가능할 정도였다.(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이런 상황을 당시 러일전쟁 종군기자 F. 매켄지는 이렇게 묘사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턱이 있는가.”(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1920, p78)

 

정부 관료들조차 국가 운명을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중립선언을 주장하는 중립파와 일본과 연합하자는 밀약파가 목숨을 걸고 갈등했다. 중립파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노선을 걷던 고종과 고종 최측근 이용익이 핵심이었다. 밀약파는 외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이 주도했다. 이지용은 직접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접근해 ‘운동비’ 1만엔을 수뢰했다. 친러파였던 원수부 회계국총장 이근택도 가세했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의정서 체결에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할 정도였으니(‘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0)한일밀약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904년 1월 19일) 단순한 정책 갈등을 넘어 사욕(私慾)이 국익을 넘은 대표적인 매국노들이라 하겠다. 

 

‘한일의정서’(1904) 제4조.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제국정부 행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제국정부는 이를 위해 군사 목적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국사편찬위

 

공(公)과 사(私)의 양다리, 고종

 

‘황제 폐하께서 망명자들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계시다 하니 저들을 변경 깊숙한 곳에 보내서 엄중하게 구속해 둘 터이니 명단을 폐하께서 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1903년 12월 27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보낸 전문이다. 고무라는 “이런 내용을 황제에게 알려달라”고 주문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상당한 금액을 증여하는 것도 무방하므로 이유와 금액을 알려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 한국망명자 처리에 관한 건)

 

본질적인 원인은 황제 자신이었다. 고종은 1895년 민비 암살 사건 직후 아관으로 파천한 이래 민비 암살 복수에 집착해 있었다. 일본은 바로 이 심리를 이용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암살범들 처리를 미끼로 던진 것이다. 다음 날 공사 하야시는 “망명자 처리에도 고종이 요지부동이면 경성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고무라에게 주문했다.(위 같은 책 (4) 한국조정 회유책에 관한 품신 건)

 

고종은 즉시 ‘일본법으로 망명자 엄중 처벌’ ‘대한제국 황실 안전과 독립’ ‘대한국 영토 특히 수도 한성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외부대신 이지용에게 의정서 협상 개시를 명했다. 그리고 암살범 우범선을 죽인 고영근에 대한 관용 또한 요구했다.(위 같은 책 (5)한국인망명자 처분 교섭에 대한 칙지) 이듬해 1월 4일 고영근이 특사로 풀려나자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암살집단 27명 명단을 일본에 통보하고 이 가운데 주범인 이두황과 권동진은 국내 송환을 요청했다. 이틀 뒤 하야시는 이지용과 민영철, 이근택에게 1만엔을 뇌물로 제공했다.

 

1월 18일 의정서 초안이 나왔다. ‘망명자에 대한 상당한 제재’가 조항에 삽입됐고 ‘전쟁 수행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충분한 편의 제공’ 조항이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일본 측은 ‘망명자 조치’ 조항을 본문에서 삭제하고 하야시 공사의 공문(公文)으로 보장하기로 방침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사흘 뒤인 1월 21일 고종은 ‘황제 본인이 아닌’ ‘외부대신 명의’로 ‘중국에서’ ‘실현 불가능한 중립’을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고종은 공인(公人)으로서는 중립화안을 고집하면서도 그나마 발표를 외부대신에게 미루고, 사인(私人)으로서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중립화안과 배치되는 일본 측 밀약 체결에 응한 것이다.(박희호, 앞 논문) 개인적 원한으로 시작한 협상은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어 기습적 중립선언 후 일본군이 하야시가 주문했던 ‘경성 무력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고종이 원하던 ‘망명자 처분’ 조항은 삭제돼 버렸다. 대신 ‘대일본제국이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는 한층 강화된 조항이 본문에 삽입돼 버렸다. 그 조항 그대로,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개전 직후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닷새 뒤인 2월 28일 고종은 고종 본인과 두 아들인 황태자와 영친왕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명목으로 일본에 백동화 18만원을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한 달 뒤인 3월 22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30만엔이 입금된 제일은행 경성지점 통장을 헌납했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97, ‘3월 20일 이토 특파대사 내알현시말’·2022년 7월 19 본지 <이토 히로부미를 짝사랑한 고종> 참조) 

 

용산공원 부지 미군 드래곤힐즈 호텔 정원에 있는 둔지미 마을 흔적. 신분이 높았음 직한 무덤 석물들을 미군 측이 호텔 앞에 세워놓았다.

 

슬픈 둔지미 마을

 

그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본군은 대한제국 각지 1000만평을 마음대로 수용했다. 그 가운데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리는 한성 남쪽 ‘둔지방(屯之坊)’이 있다. 지금 개방을 눈앞에 둔 용산공원 부지다. 부지 한가운데에 둔지산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 마을을 ‘둔지미’라 불렀고 행정명은 둔지방이 되었다. 원래 용산(龍山)은 현 마포대교 쪽에 있다. 그쪽 행정구역은 ‘용산방’이었다. 용산 기슭 용산방과 둔지산 기슭 둔지방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일본군이 신시가지를 형성하면서 둔지방과 용산방은 용산이라는 명칭 하나로 합쳐졌다. 둔지방은 동부이촌동 철길 ‘돈지방건널목’처럼 관습적인 명칭에나 남아 있다.

 

용산공원 부지에는 대한제국정부에 외면당하고 일본제국 폭력 속에 고향을 떠난 둔지미 마을 추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일본군이 직선화한 옛길도 남아 있다. 개울도 남아 있다. 둔지산 기슭에 있었음 직한 무덤가 석물(石物)들도 미군이 보존해 놓았다. 서글프지 않은가. 글로 표현하기 힘든 옛 권력자들에 대한 배신감. 

 

일본군이 용산기지 부지를 수용한 뒤 강제철거시킨 둔지미 마을 석물. 뒤쪽 철담장 안은 대통령집무실 공간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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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蘆溝橋) 사건

 

다리 근처에서 한밤중에 울린 총성… 중일전쟁의 발단

 

①노구교(蘆溝橋) 사건은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 군대가 베이징의 다리에서 충돌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은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의 발단이 됐어요. 과거 노구교의 모습. ②노구교 사건이 일어난 뒤 중국군이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③노구교는 다리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아름다운 돌사자상으로도 유명해요. 마르코 폴로는‘동방견문록’에서“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위키피디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지난 8일 선거 유세 연설 도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어요. 이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는데요.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일부 중국인이 아베 전 총리의 죽음을 조롱하며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논란이 됐습니다. 술집 전광판에 '普天同'(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경축한다), '天喜地'(대단히 즐겁다)라는 문구와 함께 아베 전 총리의 영정 사진을 띄운 모습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퍼지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이렇게 반일 감정이 고조된 이유는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일인 7월 8일이 '7·7 사변'과 일자상으로 하루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7·7 사변은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 군대가 베이징의 다리(교량) 노구교(蘆溝橋·루거우차오)에서 충돌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노구교 사건'으로도 불리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은 8년간의 중일전쟁을 이어가는데요. 7월 7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세기 중국 청나라와 일본

19세기 중국 청나라는 경제 위기와 부정부패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새로운 세상을 꿈꾼 유학생과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향했는데, 많은 이가 일본을 택했어요. 1907년부터 30년 동안 약 3만명의 중국 학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죠.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배우고자 한 거예요. 일본은 청나라 정부의 정치 탄압을 피하는 도피처 역할도 했어요. 중국의 정치가인 쑨원(孫文)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후 대외 침략의 길을 걷고 있었어요. 1894년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한 데 이어 1905년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며 제국주의의 발판을 만들었지요. 특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승전국 위치에 서며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국가로 급부상했어요. 그러면서 아시아의 패권을 잡겠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러일전쟁 승리하고 만주까지 점령

그 첫 번째 대상이 된 지역이 만주예요. 일본은 일찍이 만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근대 일본의 계몽 사상가이자 근대화의 스승이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0년부터 "러시아의 남하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열강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 지역을 손에 넣을 기회를 얻게 되는데요. 전쟁 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철도 건설 권익과 만주에 살고 있는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에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킵니다. 처음에는 1만명 규모였는데, 점차 늘어 1930년대 초에는 10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했어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에 괴뢰정부를 수립합니다.

중국 본토 노리던 일본

만주를 차지한 일본의 다음 목표는 중국 본토였어요. 일본군은 이전부터 만주뿐 아니라 중국 본토에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요. 일본군의 중국 본토 주둔은 '의화단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화단(義和團)은 외세 배격을 주장한 청나라의 반(反)제국주의 단체인데요. 1900년 의화단이 일으킨 봉기를 이듬해 미국 등 열강이 진압하고 청나라와 열강 사이에는 '신축조약'(辛丑條約)이 체결됐어요. 조약에 따라 열강은 베이징 공사관 구역과 베이징·산하이관 철도 주변 요지에 대한 군대 주둔권을, 그리고 1902년에는 톈진에 대한 군대 주둔권을 얻었습니다.

일본도 이 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어요. 당초 일본에 할당된 병력은 1600명 정도였는데, 1936년 5월 병력을 3배나 늘려 베이징의 서남쪽 교외인 펑타이에 주둔시켰죠. 군대 주둔권을 보유한 열강 가운데에는 이 30여 년 사이에 주둔군을 폐지하거나 단계적으로 감축을 단행한 경우도 있었는데요. 일본은 오히려 5600여 명으로 늘린 거예요. 그러자 중국은 일본에 항의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에 중국군은 일본군의 도발에 대비해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강화했어요. 즉,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중국의 동북 지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겁니다.

중일전쟁으로 이어진 우연한 사건

1937년 7월 7일 노구교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베이징 남서쪽 10㎞에 있는 노구교는 중국 금나라 시절인 1192년에 지어진 아치형 석조 다리로, 길이 266m에 너비 9m에 달했어요.

이탈리아의 상인으로 중국 각지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다리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아름다운 돌사자상과 주변 경치에 매료돼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당시에는 베이징과 내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어요.

오후 11시쯤 이 다리 근처에서 총성이 울립니다. 그리고 야간 훈련을 하던 일본군 한 명이 실종됐어요. 일본군은 이것이 중국군 소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에 이튿날인 8일 오전 두 나라 군대 간에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죠.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1887~1975)는 사태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일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사태 규명을 위한 교섭을 진행했지요.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됐어요. 그러다 7월 11일 밤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하지만 일본 내각은 이날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병사의 실종은 발포와는 관련이 없었고, 병사는 무사히 원대로 복귀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은 이 사실을 숨기며 병사 실종 사건을 중국 침략의 계기로 삼은 거예요.

당시 일본 군부는 3개월이면 중국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0여 만 육군 병력을 파견해 중국을 침략했어요. 7월 말에는 베이징과 톈진이 연이어 함락됐고, 일본군은 8월 13일 상하이로 진격하며 난징을 위협합니다. 이튿날인 8월 14일, 중국 국민정부는 대일 항전을 선포했어요. 당시 중국 민중 대다수가 "일본에 어떠한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12월 난징은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이에 국민당 정부의 관리 등 많은 이는 충칭으로 옮겨 항전해야만 했지요. 이후 중일전쟁은 8년간 이어졌어요. 일본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2년 만인 1939년에 하와이를 공격하며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전장은 더욱 확대됐죠. 하지만 일본이 1945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중일전쟁도 이때서야 끝나게 됩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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