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백제 왕궁의 조경] [미스터리 王都 익산과 서동요(薯童謠)]

뚝섬 2022. 7. 31. 05:26

[백제 왕궁의 조경] 

[미스터리 王都 익산과 서동요(薯童謠)]

 

 

 

백제 왕궁의 조경

 

연못 만들고 인공섬 꾸미기도… 일본 문화에도 영향 미쳐

 

①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특이한 모양의 조경석이 발견됐어요.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다고 해서 어린석(魚鱗石)으로 불려요. ②과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1960년 조성한 부여 궁남지 주변에는 50여 종의 연꽃이 1000만 송이 이상 만개해 있어요. ③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이 정원 문화의 기초를 닦는 데 도움을 준 노자공(路子工)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미산상’(須彌山像)을 복원한 분수의 모습이에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부여군청·일본아스카자료관

 

충남 부여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지난 14일부터 나흘간 열린 부여서동연꽃축제에 40여 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왔다고 해요. 이곳은 백제의 옛 도읍 사비(지금의 부여)에 있었던 궁남지의 위치를 추정해 1960년 복원 사업으로 인공 조성한 곳인데요. 33만㎡(약 10만평) 부지에 50여 종의 연꽃 약 1000만 송이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해요. 백제는 언제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고 만들었는지 알아볼까요?

왕궁 속의 백제 정원

고대 국가에서는 국왕이 거주하는 왕궁 둘레에 높은 담장과 성곽을 겹겹이 쌓았어요. 국왕의 안전을 위해서였지요. 이런 '구중궁궐'(九重宮闕·겹겹이 막힌 깊은 궁궐) 안에는 인공적으로 산과 연못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러 통치자가 휴식을 취하고 즐길 수 있도록 했어요.

삼국의 왕궁이나 사찰에 관한 발굴에서 공통적으로 정원이나 조경과 관련된 여러 흔적이 발견되지만, 유독 백제에서는 정원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요. 백제가 한성(서울)을 도읍으로 삼았던 진사왕 7년(391)에는 왕궁을 수리하며 연못을 파고,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산을 만들어 새와 특이한 꽃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고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동성왕 22년(500)에는 왕궁 동쪽에 높이가 5장(약 12.5m)이나 되는 누각인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또 연못을 판 다음 그 주변에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해요.

이렇게 백제의 왕들은 수도를 옮길 때마다 왕궁에 정원을 만들었어요. 궁남지는 사비를 도읍으로 삼던 시절 무왕(재위 600~641년)이 만든 백제의 대표적인 정원인데요.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634년 왕궁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약 7.85㎞)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왔어요. 연못 사방 기슭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었는데, 이 섬의 모습이 마치 '방장산'(方丈山) 같았다고 해요. 도교에서 방장산은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과 함께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려요. 궁남지에 신선들이 사는 방장산을 본뜬 섬을 만든 것은 백제 정원에 도교 사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백제의 왕들은 기이한 동물과 식물이 모인 정원을 만들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어요.

사각 연못과 특이한 돌로 꾸며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 정원 내부의 연못은 네모난 형태가 대부분이에요. 부여 부소산성 남쪽에 위치한 관북리 유적에서는 땅속 약 1.5m 깊이에 파묻혀 있던 연못이 발견됐는데요. '깬돌'(돌을 깨서 만든 인공적인 자갈)을 이용해 동서 10.6m, 남북 6.2m, 깊이 1.2m 규모로 쌓은 석축 연못이었어요.

이 연못 바닥에서는 연꽃 줄기와 뿌리가 확인돼 백제 당시에 이미 연꽃이 조경용으로 이용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연못 내부에서는 물품에 다는 꼬리표나 문서 행정에 이용된 '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조각)을 비롯해 눈금 간격이 약 2.5㎝인 나무로 만든 자, 토기와 기와, '개원통보'(開元通寶·중국 당나라 동전) 등이 발견됐죠. 이 연못은 크기가 작고 건물 사이의 중정(中庭·마당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서 각종 의례나 잔치의 보조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돼요.

익산 왕궁리 유적은 7세기 백제 정원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왕궁리 유적은 나지막한 구릉을 깎아 땅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그곳에 동서 폭 31m가 넘는 대형 건물을 비롯한 각종 기와 건물을 세우고 뒤쪽으로는 대규모 수로가 있는 후원(後苑)을 만들었어요.

후원이 시작되는 유적 중앙 부분에서는 정원과 관련된 시설이 발견됐는데요. 물을 공급하고 저장하거나 배수하는 시설, 정원을 장식하던 특이한 모양의 돌 조경석(造景石), 정원을 감상하기 위한 소형 건물의 흔적, 둥글고 넓적한 돌을 깔아 정원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 등이었어요.

정원 가운데 부분에는 움푹 파인 커다란 돌을 설치해 이 돌을 타고 물이 흘러 직사각형 수조 안에 고이도록 했어요. 독특하게 생긴 괴석(怪石)을 이용해 인공산을 만들기도 했고요. 이곳에서는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다고 해서 '어린석'(魚鱗石)으로 불리는 2점의 조경석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어요. 이 어린석은 중국의 왕궁이나 국가적인 제사 시설에서 주로 사용했는데, 백제가 왕궁의 정원을 꾸미기 위해 특별히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한 것이랍니다.

일본 정원 문화 기초 닦은 노자공

백제의 왕궁이나 사찰·관청에서는 이처럼 크고 작은 정원을 만들었는데요. 많은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조경 전문가가 필요했어요. 국내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백제에서 건너간 노자공(路子工)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기록에 따르면, 그는 612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해요. 그는 얼굴과 몸에 흰 반점이 있어서 병든 사람처럼 보였대요. 사람들은 그의 용모를 싫어해서 추방하려 했지만, '산악(山岳·솟은 산) 모형을 만드는 재주'가 있음을 인정받아 일본에 체류하게 됐어요. 그는 당시 일본의 왕궁인 오하리다궁(小墾田宮) 남쪽 뜰에 수미산(須彌山·불교관에서 세계의 중앙에 있다는 산) 모형과 오교(吳橋·중국 남조 양식의 난간이 있는 다리)를 축조했어요. 일본 왕궁의 정원에 놓인 핵심적인 석조물을 백제에서 건너간 조경 전문가인 노자공이 만들어 준 거예요.

실제 1902년 오하리다궁 남쪽 지역인 이시가미(石神) 유적에서는 수미산 모형으로 보이는 석조물이 우연히 발견됐어요. 일본 학자들은 이를 기록에 남아있는 것처럼 노자공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 석조물은 높이 100㎝, 지름 106㎝ 크기인데, 표면에는 얕은 부조(浮彫·글자나 그림 등을 새기는 것)가 장식돼 있어요.

일본에서는 이를 '수미산상'(須彌山像)이라고 부르는데요. 일본 연구자들은 이를 광장 같은 데 분수 용도로 설치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해요. 수미산상 하단부 사방에 뚫린 구멍은 지름 0.5~1㎝ 정도로 가느다란 것이어서 현재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워요. 그래서 백제에서 건너간 노자공 같은 전문 기술자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거지요.

이처럼 일찍부터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백제에서는 많은 조경 기술자가 양성됐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원 문화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답니다.

[궁남지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에]

기록에 나오는 백제 궁남지가 현재 조성된 궁남지 주변 지역에서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주변 지역에서 10여 차례 발굴을 했지만 정원으로 추정할 만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고, 6~7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도로와 수로, 논 등만 발견됐어요. 궁남지가 만들어지고 2년 뒤인 636년 "망해루(望海樓)를 세우고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연구자들은 사비 도성 남쪽에 살짝 솟아있는 화지산 일대에 누각인 망해루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요. '바다를 조망한다'는 뜻의 망해루는 '궁남지를 바라본다'는 의미도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화지산 주변에서 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진짜 궁남지가 발견될지도 몰라요.

-기획·구성=조유미 기자/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조선일보(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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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王都 익산과 서동요(薯童謠)

 

국경 초월한 사랑 '서동요'
백제 총각과 신라 공주, 헛소문 유포 끝에 서동-선화 결혼에 성공

익산에는 거대한 왕궁터, 선화공주가 세운 미륵사, 부여에는 '궁남지'
익산… 부여… 전설 경쟁 서로 '서동요 배경' 주장

2009년 미륵사 석탑 조사 '엉뚱한 사람'이 절 주인… 선화공주 전설 와르르…
'
서동=동성왕' 설… 일본 설화와 쌍둥이 설…
선화 전설 부활 위해 익산은 열심히 발굴 중

 

일정한 직업도 재산도 없는 시골 노총각이 도시에 예쁜 여자가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뒷조사 과정에서 부유한 권력자 집안임을 알게 된 사내는 아이들에게 접근해 낭설을 퍼뜨리게 하였다. 금품 제공도 잊지 않았다. '여자가 밤마다 어떤 사내와 동침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간다.' 사내가 제공한 간식에 현혹된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댔다. 아버지는 딸을 쫓아내 버렸다. 여성은 수치심 속에 걸어가며 이를 갈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노총각이 나타나 그녀를 위로하니, 영문 모르는 여성은 점차 마음을 열고 몸을 허락하여 동거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미성년자 약취-유인죄와 허위 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죄와 모욕죄, 기망에 따른 사기죄를 저지른 끝에 성립된 혼인이 그 유명한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사랑,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은 우리말로 '맛동' '마동'이라 한다. 마동이는 무왕(재위 600~641년)이다. 명예훼손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으니 죄는 성립하지 않았다. 모욕죄 또한 고소를 해야 성립하니 또한 무죄. 나머지는 공소시효가 지나도 1000년이 넘게 지나버렸다. 이제 1300년 전, 낭만으로 포장된 서동요 사건을 추적해본다. 마동은 누구인가, 그리고 선화는 누구인가.

수수께끼의 도시 익산

백제는 크게 두 번 수도를 옮겼다. 경기도 하남 위례성에서 충남 공주로, 그리고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다. 위례 백제와 웅진 백제, 사비 백제라 한다. 세 도시는 공통점이 몇 있다.

위례는 한강 남쪽이고 웅진은 금강 남쪽이며 사비 또한 백마강 남쪽이다. 도시마다 산성이 있었다. 산성 아래 왕궁이 있었다. 왕궁 옆에 왕실 사찰이 있었다. 도시 가운데에는 국민이 다니는 거찰(巨刹)이 있었다. 또 하나는 땅 이름이다. 위례성에 만들었음 직한 흙성 이름은 몽촌토성이다. 몽촌의 '몽(夢)'은 '꿈'인데, 옛말은 '곰'이었다. 한강이 좁아지기 전 몽촌토성 앞까지 강이 흘렀다. 그 강변마을을 백제인은 곰마을이라 불렀다.

 

전북 익산 고도리에는 정체 모를 돌부처 한 쌍이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도로 하나를 건너면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왕궁 유적이 있다. 그 왕궁에서 서동과 선화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기록이 적기에, 진실은 돌부처도 모른다.

 

공주로 천도를 하니, 웅진(熊津)이라 불렀다. 곰마을이다. 공주 나루터 이름은 고마나루, 곰나루다. 훗날 고려시대 주(州)를 설치할 때 '곰'이라는 한자가 없기에 공주(公州)라 했다.

공주에서 천도를 할 때 역시 금강 변에 도읍을 정하니, 부여다. 금강이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원명 '금강(錦江)'은 비단 같은 강이 아니라 '곰의 강'을 뜻한다. 지금도 공주에서는 금강을 '곰강'이라 부른다.

이렇게 백제 왕도(王都)가 갖는 모든 요소를 전북 익산이 가지고 있다. 왕궁이 있던 곳은 왕궁리이고 거대 사찰은 미륵사이며 나루터 이름은 곰개(웅포)이며, 웅포나루가 있는 강은 금강, 곰강이다.

왕궁터 발굴도 마무리 단계고 압도적인 규모의 미륵사지 서탑(西塔)도 복원이 끝이 보인다. 그런데 누가 이 도시를 건설했고 누가 살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익산 사람을 포함해 많은 대한국인이 믿는 바는 하나 있다. 마동이와 공주가 바로 익산에서 사랑을 했다는 믿음.

미륵사지의 비밀과 선화

'선화가 엄마로부터 노잣돈으로 받은 금덩이를 마동에게 내놓았다. 마동이 물었다. 이게 뭐요? 금이오, 금. 귀한 것이오. 남편이 말했다. 이런 거, 산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다네. 그리하여 금 삼천 냥을 장인 진평왕에게 보내니 왕이 결혼을 허락하였다. 훗날 마동이 왕이 되었는데, 선화가 절을 지어 달라 하여 지어주니 그게 미륵사다.'(삼국유사)

 

익산 왕궁터에 서 있는 오층석탑.

 

익산 왕궁터에 있던 왕궁은 인공 개울이 있는 후원(後園)까지 완비한 화려한 궁궐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미완에 그친 왕도라는 설, 지금 세종시처럼 행정수도였다는 설이 오간다.

미륵사에는 거대한 목탑 하나와 그만큼 거대한 석탑이 두 개 있었다. 석재(石材)만 흩어져 있던 동탑은 1992년 저비용과 신속성과 얕은 상상력을 기초로 복원돼 역사적인 흉물로 기록됐다. 서쪽 석탑은 다 허물어져 해골처럼 서 있다가, 일제강점기 최첨단 접착제인 콘크리트로 보강 작업을 했다. 서탑은 지금 그 콘크리트를 벗고 복원을 앞두고 있다.

2009년, 탑 복원을 앞두고 마지막 조사가 시작됐다. 지상 석재를 들어내고, 탑 가운데에 있는 심주석 뚜껑을 열었다. 사리함이 나왔다. 9000개가 넘는 보물이 쏟아졌다. 금판이 나왔다. 가로 15.5, 세로 10.5㎝짜리 금판 앞뒤로 193자가 새겨져 있었다. 발굴팀 심장이 요동쳤다. 탑을 지은 사람 이름이 나왔는데, 선화가 아닌 것이다. 사택적덕(沙宅積德)이라는 고위 관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해, 선화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백제사를 공부했던 사람들은 좌절했다. 자기네 땅에서 무왕과 선화가 사랑했다고 믿는 부여와 익산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학자들은 선화의 부활을 꿈꾸며 그해에 여섯 차례나 학술대회를 열었다. 회생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굉장히 많은 주장이 쏟아졌다.

서동, 마동이와 동성왕

일연이 기록했다. '서울 남쪽 못가에서 과부와 용이 관계해 서동이 태어났다. 고서에는 그가 무강왕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삼국유사 기이제이(紀異第二)) 참고한 고서가 뭔지 알 수 없으나, 무강왕이 없으니까 무왕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신라와 열세 번 전쟁을 치렀다. 3년에 한 번꼴이다. 천하 미색이어도 결혼할 상황이 아니었다.

 

복원을 눈앞에 둔 미륵사지 서탑.

 

기록상 백제와 신라가 결혼으로 맺은 시기는 한 번이다. '493년 3월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년)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편)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삼국사기), 혹은 말다(末多)(일본서기)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딸이 둘만 나온다. 서동요에 나오는 진평왕 댁 셋째 딸은 일연만 주장하는 여자다. 그러니까 '마동' 혹은 '서동'이라는 청년은 '모대' '마모' '말다'가 본명인 동성왕이고 그와 신라 고위직 딸의 결혼이 윤색된 전설일 확률이 높다.

일본으로 간 선화와 서동?

2004년 일본에서 놀라운 논문이 나왔다. 저자는 리쓰메이칸(立命館) 아시아태평양대 교수 김찬회, 제목은 '오이타현의 마나노(眞名野) 장자 전설과 한국'.

 

익산 웅포에서 본 금강. 웅포는‘곰나루’라는 뜻이다.

 

'미에마치(三重町) 마을에서 숯 팔아 먹고사는 스미야키 고고로(炭燒 小五郞)에게 아름다운 다마쓰(玉津) 공주가 와서 같이 살았다. 어느 날 공주가 엄마로부터 받은 금덩이를 주자 스미야키는 연못에 사는 원앙에게 던져버렸다. 기가 막힌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귀한 황금이오. 스미야키가 말했다. 연못이랑 숯가마에 산더미처럼 있다네. 훗날 부부가 황금 삼천 냥을 당나라 천태산에 시주하니 백제국에 사는 연성법사가 부부 마을에 불상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스미야키는 마나노(眞名野) 장자로 불렸다.'

김찬회에 따르면 마나노 장자 설화 배경은 6세기다. 무왕보다 앞선다. 2004년 8월 '미에마치 마나노 장자 전설연구회' 회원들이 익산을 찾았다. 익산 사람들은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서로가 궁금한 게 하나둘이었겠는가.

미궁(迷宮)에 빠진 그리움

익산 사람들은 마동이가 태어난 연못이 익산 마룡지(馬龍池)이고, 그 뒷산 오금산이 마동이가 금을 산더미로 쌓아뒀다는 산이라 철석같이 믿는다. 부여 사람들은 궁남지(宮南池)가 '무왕과 왕비가 뱃놀이를 한 궁 남쪽 인공 연못(삼국사기)'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부여 궁남지는 1965년 지금처럼 정비됐다. 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 포룡정 현판은 부여 출신 정치인 김종필이 썼다.

 

무왕 부부가 묻혔다는 쌍릉 소왕묘.

 

익산에는 마룡지도 있고 오금산도 있고 왕궁도 있고 미륵사도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왕릉 쌍릉(雙陵)도 있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 부여에는 삼국사기라는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1990년대 궁남지를 파보니 대규모 인공 연못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기록은 있는데 땅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익산은 쌍릉을 재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일제강점기 발굴 유물을 다시 보니 중년 여자 치아와 신라 토기가 나온 것이다. 익산 어딘가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 남쪽 큰 연못'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 또한 발굴하기로 했다. 이래저래 선화에 대한 그리움이 증폭되고 있는 중이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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