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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쿠데타, 고르비에 군부 반발.. ] [고르바쵸프] ....

뚝섬 2023. 7. 9. 05:32

[1991년 8월 쿠데타, 고르비에 군부 반발… ]

[고르바초프]

[비운의 개혁가 고르비]

[반세기 냉전 끝낸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 별세]

 

 

 

1991년 8월 쿠데타, 고르비에 군부 반발…

 

1991년 8월 쿠데타

3일 만에 진압됐지만 소련 해체로

 

(위)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아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1991년 8월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의회 건물 앞에서 연설하는 보리스 옐친(앞줄 가운데). /브리태니커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반란을 일으켰어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프리고진과 그의 병사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철군하며 사태가 일단락됐지요.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1991년 '8월 쿠데타'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왔어요.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1991년 8월 쿠데타 때처럼 프리고진의 반란이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푸틴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고 분석했어요.

8월 쿠데타는 어떤 사건일까요? 1991년 8월 19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반대해 공산당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3일 만에 실패한 사건을 말해요. 그 여파로 소련 체제 아래 있던 나라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면서 결국 그해 12월 소련이 해체됐고, 고르바초프도 퇴임했답니다.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

1980년대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벨벳 혁명'이 일어나 공산 정권이 붕괴했고, 폴란드 선거에서는 비(非)공산주의자들이 의석 99%를 차지했어요.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과도한 국방비와 관료들의 부정부패, 생산력 저하 등으로 국가 경제가 점차 궁핍해지고 있었어요.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급격한 변화가 시작됐답니다.

당시 소련은 노멘클라투라(특권적 지배 계층)가 모든 정보와 부를 독점했어요. 정부 통계도 원하는 대로 조작해 국가에 정말 필요한 정책이 나오기 어려웠죠. 문제점을 파악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치며 언론 검열과 사상 탄압을 완화하고, 점진적으로 자유주의 시장 요소를 받아들였어요. 정치적으로는 대통령제를 도입해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궁극적 목표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작동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이 많았어요. 인플레이션과 대규모 실업 등으로 소련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했고, 대중의 불만도 높아갔어요. 개혁이 느리다며 더욱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도 나왔죠. 급진파였던 러시아 공화국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더 많은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결국 공산당에서 탈당했죠. 1990년에는 개혁·개방 정책에 자극받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이 소련에서 독립한다고 선언했어요. 소련을 유지하고 싶었던 보수파는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느슨하게 만들었다며 강하게 반발했어요. 고르바초프는 급진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공격받았고, 소련은 정치적·경제적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죠.

옐친, 쿠데타 규탄하며 실세로 떠올라

보수파는 소련 해체를 막고 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반란 날짜를 정했어요. 국방부 제1부위원장 올렉 바클라노프, 비서실장 발레리 볼딘 등 고위급 관료 4명은 1991년 8월 18일 고르바초프가 휴가 중이던 크림반도의 별장으로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어요. 고르바초프는 이를 거절하며 그들을 반역자라고 질책했지요.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감금당해 별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됐고, 외부와도 연락이 끊겼어요.

다음 날 쿠데타 주동자들이 결성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고르바초프가 건강 악화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며, 야나예프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다고 선포했어요. 이들은 파업과 시위를 금지했고 언론도 검열했지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급진파였던 옐친 역시 구금하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요. 이는 쿠데타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옐친이 쿠데타를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거든요.

옐친은 쿠데타가 일어난 후 사태 파악에 나섰어요. 모든 군대가 쿠데타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총파업을 결정합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러시아 의회 건물 주변에 집결해 바리케이드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옐친을 지지하기로 한 탱크와 병력 수송차도 러시아 의회에 도착했어요. 시위대 수만 명이 러시아 의회 주변에 '인간 사슬'을 형성했고, 옐친과 동맹을 맺은 소련군이 끌고 온 탱크와 장갑차 수십 대가 함께 방어에 나섰습니다. 옐친은 전차에 올라가 쿠데타를 규탄하고 총파업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어요. 그의 연설은 저녁 뉴스에 방송돼 널리 퍼졌고, 시위는 8월 20일에도 이어집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앞당겨

야나예프 부통령은 기자 회견을 통해 세계 각국 정부에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치를 이해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국제 여론은 옐친과 시위대 쪽으로 기울었어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전화로 보리스 옐친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 줬어요. 소련 연방에 속하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도 반란 세력을 비난했어요. 옐친은 군권까지 장악합니다. 옐친 쪽으로 이탈하는 병사들까지 생기자 8월 21일 쿠데타 세력은 결국 무너졌고 주도자들은 도망치려다 체포됐어요. 고르바초프는 복직했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만든 모든 법령은 무효가 됐어요. 8월 22일 고르바초프와 그의 가족이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어요. 대신 쿠데타 진압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옐친이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으로 떠오릅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개혁·개방 정책은 러시아 국민에게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 줬어요. 쿠데타 실패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앞당겼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직무를 재개했지만, 이미 권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어요. 실권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옐친에게 넘어갔죠. 옐친은 더는 소련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대통령이 옐친의 지도 아래 새로운 연방을 만들기로 합의하면서 소련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베자 조약으로 사라집니다. 대신 독립국가연합(CIS)이 결성됐지요.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조선일보(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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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영화 ‘록키4′는 미·소 대결이 한창이던 1985년 만들어졌다. 레이건 미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명명하던 때다. 영화는 소련 권투 선수를 전체주의 체제가 만든 살인 병기로 그렸다. 영화는 그해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조롱했다. 3년도 안 돼 이 평가가 뒤집혔다. 서방 지도자들은 군축과 냉전 해체, 소련의 개혁·개방에 나선 그를 ‘고르비’라 부르며 반겼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그를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2008년 10월 2일 제1회 한민족 국제평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충남 논산 한민대를 찾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환영나온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연합뉴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이전 지도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던 스탈린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자서전에선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을 길게 고백했다. 아내 라이사 여사가 혈액암으로 죽어가자 “부부싸움 때 내가 심한 말 했다”며 눈물을 흘린 남편이었다.

 

▶인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군비경쟁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소”라고 아내에게 먼저 밝혔다.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옥죄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 냉전 체제 해체 등을 추진한 것이 그 약속의 실천이었다. “누구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러시아 문학”이라 대답하고, 마르크스와 레닌 사상을 “공식 이데올로기가 먹여주는 한 줌 양식”이라 비판하는 최고 지도자를 소련 대중은 낯설어하면서도 반겼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인의 폭음 악습도 개혁하자며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했다가 국민적 분노를 샀다. 개혁·개방에 따른 혼란보다 금주법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보드카 사려는 줄이 1㎞를 넘자 화가 난 이들이 “고르바초프를 죽이자”며 크렘린궁에 갔다가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쪽 줄은 더 길어.” 당시 유행하던 우스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해체하지 않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변혁의 에너지에 휩쓸려 버렸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나쁜 정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스스로 개혁에 착수할 때라는 ‘토크빌의 딜레마’에 고르바초프가 빠졌다고 했다. ‘통제받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적 시장’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그제 영면에 들었다. 냉전 종식이란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했지만 조국에선 손가락질당하다가 갔다. 그는 동족에게 배척당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모스크바의 예수였을까. 어쨌든 우리에겐 북방 외교의 새 지평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그의 안식을 빈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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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冷戰 장벽 부수고, 鐵의 장막 걷어낸 ‘고르비’. 20세기 후반 현대사 대격변 이끌고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팔면봉, 조선일보(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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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혁가 고르비

 

1985년 3월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자 세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원고 없이 연설하고 부축 받지 않고 걷는 소련 지도자의 모습 자체가 신기했다. 소련은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제국이었다. 권력 핵심부터 늙고 병들었다. 불과 3년 사이에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로 이어지는 당서기장 3명을 포함해 지도부가 줄줄이 사망했다. 일찍이 고르비는 지도부의 단체사진을 가리키며 “모두 조만간 밥숟가락을 놓을 분들 아닌가”라고 한탄했다. 안드로포프가 “늙은 말은 밭고랑을 망가뜨리지 않네”라고 타일러도 그는 “작은 도토리가 강건한 상수리나무로 성장하죠”라며 굽히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 시골 출신의 젊은 야심가 고르비는 달랐다. 소련의 경제적 파탄으로 이미 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고르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소련 체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해체였다. 한 번 풀린 권력의 실타래를 되감기는 불가능했다. 동구권 국가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막강했던 초강대국은 15개 나라로 분리됐다. 그로선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제국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보수파의 쿠데타, 개혁파의 이반에 따른 희생양이 되어 권좌에 오른 지 7년도 안 돼 굴욕스럽게 물러나야 했다.

▷동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핵전쟁의 공포를 밀어낸 평화주의자로서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고르비지만 국내에선 동구권을 서방에 넘기고 러시아의 몰락을 가져온 배신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1996년 대선에 출마해 얻은 0.5%의 초라한 득표율은 국가적 조롱거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도 늘 이렇게 답하곤 했다. “뒤로 물러서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길을 갔을 것이다. 더욱 끈질기고 단호하게.”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비가 지난달 30일 타계했다. 향년 91세. 실패한 비운의 개혁가 고르비의 몰락 이후 러시아 정치는 보리스 옐친 10년의 혼란과 좌절에 이어 새로운 정치적 괴물을 탄생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며 옛 소련의 부활을 꿈꾼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두고 고르비는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전쟁의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냉혈한 권력자 푸틴의 앞날은 여전히 진행형인 고르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동아일보(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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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냉전 끝낸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 별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2022 개혁-개방 주도, 노벨평화상 수상
韓-소 수교 견인… 한국과도 인연
尹 “자유-평화의 유산 기억” 조전

 

첫 방미… 탈냉전 서막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이 공산당 서기장 시절인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처음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정상은 이 정상회담을 통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 보유를 금지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탈냉전의 신호탄이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중국이 이 조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를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미소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등 현대사 대격변의 주역이었던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1세.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이날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심각하고 오래된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스크바 외곽 전원주택에서 여생을 보낸 그의 시신은 1999년 사망한 부인 라이사 여사가 묻힌 모스크바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옛 소련의 낡은 정치·경제 체제에 염증을 느꼈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 최연소(54세)로 1985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가 추진한 옛 소련의 변화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반세기 가까이 드리웠던 ‘철의 장막’을 거두고 동서 냉전의 벽을 허무는 시작이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전까지 옛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판했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1985∼1988년 수차례 회담하며 데탕트(해빙 무드)를 이끌었다. 1989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몰타 회담에서 역사적인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옛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사회주의 몰락과 동서독 통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냉전 종식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한국과 인연도 깊다. 1990년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북방정책에 호응해 전격적으로 한-소 수교에 합의했다. 집권세력 내부의 반대와 북한의 반발에도 경제난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수교 10주년인 2000년 본보 인터뷰에서 “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새로운 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90년 옛 소련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지만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로 권력 기반을 잃었다. 그해 12월 소련은 해체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인의 딸인 이리나 비르간스카야 고르바초프 재단 부회장에게 조전을 보내 “고인의 결단과 지도력, 자유와 평화의 유산을 오래 기억하고 지켜낼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나”… 철의 장막 걷고 냉전 종식 선언


고르바초프가 걸어온 길


54
세에 최연소 소련 서기장 올라… 동유럽 공산권 민주화 물꼬 트고
베를린 장벽 붕괴-독일 통일 기여… 푸틴 향해 “우크라 전쟁 멈춰라”
서방선 ‘고르비’ 애칭 불렸지만, 러선 “소련 해체 장본인” 비판도

 

고르바초프, 조지 부시와 ‘백악관 회동’ 1990년 6월 독일 통일 관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6개월 전인 1989년 12월 두 정상은 지중해 휴양지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아직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생각하세요?”

1988년 5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옛 소련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산책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이렇게 물었다. 이전에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했었다.

“아뇨. 다른 시간, 다른 시대의 얘기죠.” 레이건은 이렇게 답했다. 1985년 첫 회담부터 수차례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 이제는 미소 냉전 시대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강조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다음 해인 1989년 지중해 몰타 해역 선상에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세계는 한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미국에 맞서 격렬한 전쟁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미국 대통령에게 확실히 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드리웠던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탈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레이건 “고르바초프와 케미가 맞아”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군축 협상을 위해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두 정상이 만나 7초간 나눈 악수는 해빙의 신호탄이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레이건은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 참모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소련 지도자”라며 높이 평가했다. “우리 사이에 ‘케미’가 맞는다(There’s a chemistry between the two of us)”며 “우리는 서로 경청했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공통점을 찾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후 회담은 쉽지 않았다.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연 군축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두 사람의 신경전도 이어졌다. 레이건이 “미국에서는 백악관 앞에서 나를 아무리 비난해도 잡혀가지 않는다”고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자 고르바초프가 “붉은 광장에서도 당신을 욕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고 응수한 일도 알려져 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처음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3차 정상회담을 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농담이 늘었고 분위기도 좋아졌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 생산·실험·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체결로 이어졌다. 냉전 종식으로 가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1989년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 민주화 시위가 번질 때 이 국가들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에 자유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사실상 용인했다. 이듬해 동서독 통일 협상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런 기여를 인정해 서방 언론은 그를 ‘고르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서방에선 ‘고르비’ 애칭, 고국에선 비판 여론

 

동독 호네커 서기장과 ‘형제의 키스’ 1987년 5월 동독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해인 1990년 장벽에 이 장면을 풍자한 벽화 ‘형제의 키스’를 그렸다. 베를린=AP 뉴시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옛 소련 북부 스타브로폴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1985년 3월 역대 최연소(54세) 서기장에 오르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젊은 정치인 고르바초프는 미국에 비견할 강국이던 소련이 쇠락한 이유를 낡은 리더십에서 찾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올해 4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해 “세상에 인명보다 소중한 건 없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그를 소련 해체의 장본인이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

-파리=조은아 특파원/이지윤 기자, 동아일보(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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