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층 불량배’는 왜 나라를 구하러 나섰을까]
[실세·핵관은 편히 잘 권리가 없다]
그 ‘하층 불량배’는 왜 나라를 구하러 나섰을까
작년에 이사 와 살게 된 곳 가까이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있다. 그곳엔 나라가 주권을 상실했다 회복했던 고난의 시기에 독립운동을 해서 더 고달픈 삶을 살았던 이들의 기록이 있다.
어릴 적엔 전래동화처럼 심상하게 들어 넘겼던 독립투사 이야기에 머리가 굵어진 후 언제부턴가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백성을 보호할 군사력도 먹여 살릴 경제력도 없는 나라, 무능한 왕조와 부패한 벼슬아치의 나라를 지키려다가 고초를 겪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은 사람들의 결단이 의아했다. 내가 만일 그 시절에 살았다면 독립운동하자고 꼬실 것 같은 지인과 안 마주치려고 길을 멀리 돌아다녔을 텐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

김훈 소설가의 신작 ‘하얼빈’은 “썩은 왕조의 탐학으로 껍질만 남은 조선 민중이 무너져가는 왕조를 치열하게 옹위”한 이야기다.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거사를 도모했던 우덕순의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지방 토호의 아들이었고 교육자였던 안중근과 달리 우덕순은 “극빈의 하층민”이었다. 그를 수사한 일본 검찰관이 이런 “하층 불량배에게 정치사상이 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정신의 용력이 있다”는 걸 인정 못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라에서 받은 거 없이 뜯기고 시달리기만 했을 우덕순 같은 이들은 왜 나라를 구하려 나섰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구하려던 것이 가렴주구와 학정을 일삼던 왕조와 지배계급이 아니라 백성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의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침탈당하지 않을 권리, 억압당하지 않고 평화로울 권리라는 ‘대의’를 들고서 우덕순은 채가구역으로, 안중근은 하얼빈역으로 총을 들고 갔을 것이다.
내 한 몸의 안전을 공동체나 대의를 위해 절대 포기 못 할 나 같은 소인배와 우덕순 사이의 아득한 괴리감을 좁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용기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선택에 신중하리라는 자세다. 독립운동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진 나라에서 무명의 독립투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혜택을 받아 누린 엘리트 정치인들은 국민을 받들어 위하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자격 있는 이를 가려내 권력을 맡기려 했던 노심초사 선택이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새 정부가 이루어야 할 노동, 연금, 교육 분야 개혁은 갈 길이 멀고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의 악순환에 대한 불안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이 시기에 집권당도 야당도 실망만 준다. 이들은 국민이 인간답게 살 권리에 관심은 있는가. 한국 정치의 새 바람이라고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젊은 당대표는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린다는 사생결단으로 소속 정당과 대통령을 들이받는다. 집권당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당대표발 가처분 소송에 맞서 마치 쌓았다가 허무는 모래성인 양 비대위 설치와 해체를 반복한다. 야당은 더 심하다. 사법 리스크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걸려 있는 당대표를 철통 방어하는 것이 민주주의 수호라는 궤변 아래 똘똘 뭉친 모습엔 정치 혐오만 생긴다.
안중근과 우덕순, 가진 것 없는 두 청춘이 총 한 자루만 들고 하얼빈과 채가구로 떠나던 시절엔 상상도 못 할 만큼 부강해진 나라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건만 국민의 몫을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다. 권력자의 말이 내로남불인지 적반하장인지 밝은 눈으로 알아보고 정치의 폭력에 수탈당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어쩌겠는가. 정치인들 이전투구가 신물 나지만 더욱 눈을 크게 뜰 수밖에. 누구에게 권력을 줄 것인지 신중한 감시로 우리가 우리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오진영 작가·번역가, 조선일보(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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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핵관은 편히 잘 권리가 없다
[朝鮮칼럼]
지독했던 지난 정부 실세
조간 기사 보려 밤새우다 새벽 3시부터 비판 기사 항의
現실세들, 욕망은 보이지만 자기 희생과 열정은 안 보여
벼랑 끝 새우잠이 핵관의 숙명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을 전후로 새벽 3~4시쯤이면 눈이 번쩍 떠졌다. 이른바 ‘문핵관(문재인 정부 핵심 관계자)’ 때문이었다. 그는 신문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가는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 수시로 기자에게 항의 또는 설명, 아니면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냈다.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전화나 카톡 메시지를 놓쳤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어 휴대폰과 연동하는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차고 잠을 잤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그의 메시지에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사는 이미 인쇄돼 수정할 수는 없었지만 다음에 관련 기사를 쓸 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 시간대가 지났다고 방심할 일이 아니었다. 오전 6시에는 실세로 불리는 국회의원이 다시 잠을 깨웠다. 이건 사실이 아니고, 저건 그렇고 하는 내용이다. 참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문핵관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대체 몇 시에 잠자리에 드느냐고. 새벽 4시까지 조간신문 기사를 보고 오전 8시쯤 일어난다고 했다. 그들과는 여러번 충돌했지만, 그들의 열정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기자에게 이 정도면 다른 분야에선 오죽했을까. 이런 열정과 극성이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다. 핵관과 실세들은 불면의 밤을 보냈겠지만 이런 참모를 둔 대통령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고 수습도 빨랐다.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며느리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노 대통령 가족사진을 싸이월드에 수십 장 올렸다. 새벽 5시에 전화를 건 청와대 대변인은 “나도 몰랐다”며 취재 과정을 물어봤다. 아침이 되자 인터넷에 올라간 사진들은 모두 삭제됐고, 오후에는 관련 청와대 직원을 징계했다. 참모들이 “며느리가 올린 사진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대통령이나 영부인에게 물어보고 시간을 끌었다면 ‘보안 사고’ 여파는 더 컸을 것이다. 그는 노 대통령 사후 몇 년간 건강 문제로 아무 일도 못 했다. 이 사건이 떠오른 건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비공개 사진에 이어 경호 일정까지 김 여사 팬클럽에 먼저 공개되는 ‘보안 사고’에 대해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일과 비교됐기 때문이다.
핵관, 실세 또는 핵심 측근으로 불리는 이들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욕망이고 또 하나는 열정이다. 핵관들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자리와 이권을 챙겼다. 인사가 발표될 때마다 저 사람은 누구 라인, 저 사람은 누구 라인이라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사람들은 ‘캠코더 인사’ ‘회전문 인사’라고 했지만 핵관들은 “철학을 공유하는 분들을 모셨다”고 포장했다. 핵관이라는 자동차는 욕망과 함께 열정이라는 또 다른 바퀴로 움직인다. 열정은 때론 궤변으로, 때론 협박으로, 아주 가끔은 불법이라는 영역까지 넘나들었다.
박근혜 정부 핵심 관계자는 최근 윤석열 정부의 어려움을 보며 “정권에는 돌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권을 나누는 일에만 몰두하고 남에게 욕먹거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꺼리는 핵관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핵관들의 욕망과 열정이 균형을 이뤄야 정권은 유지되고 공무원들은 정부를 위해 몸을 던진다. 그게 핵관과 실세들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 주변 실세들에게는 무슨 자리를 둘러싼 욕망은 아주 잘 보이는데 나를 던져 성공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잘 안 보인다. 지난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것은 분명한데, 새로 건설할 질서와 목표가 무엇인지는 희미하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직원 조회에서 “여러분 모두 대통령이 되라”고 지시했다. 그는 “어디서 ‘짱돌’이 날아올지 모르니 항상 철저히 리스크를 점검해달라” “사명감을 갖고 일해달라”고 했다. 다음에 어디로 갈지만 신경 쓰지 말고, 이 정권의 명운이 당신들에게 달렸다는 주인 의식과 열정을 가져달라는 말이다. 실세와 핵관은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편안하게 잠잘 권리조차 없는 천형(天刑)이다. 대통령 측근들이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자야 나라가 평안하다. 왜 국민들이 정치 초보인 윤 대통령을 통해 정권교체를 하려 했는지 그 뜨거운 열망부터 다시 새겨보길 바란다.
-정우상 정치부장, 조선일보(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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