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와 유토피아]
[허심탄회(虛心坦懷)의 의미]
[언어와 국력]
['대통령'은 어느 나라 말인가]
코카콜라와 유토피아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입에 착 감기는데 즐겁기까지…. 미국의 코카콜라가 이런 의미로 중국인 사회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이른바 가구가락(可口可樂)이다. 중국어로는 ‘커커우컬러’로 읽는다. 영어 발음에 맞춰 한자로 옮긴 역어(譯語) 중에는 거의 으뜸이다.
그 경쟁사인 펩시콜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기쁘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한자 명칭이 백사가락(百事可樂)이고 발음은 ‘바이스컬러’다. 역시 공전의 히트를 터뜨린 번역어다. 유사한 사례는 몇 개 더 있다.
프랑스 동남부 작은 마을에서 나오는 맑은 물 에비앙(Evian)을 ‘구름 걸린 곳’이라는 뜻의 의운(依雲), 조립식 가구로 유명한 이케아(IKEA)를 ‘화목한 집’이라는 의미의 의가(宜家)로 옮긴 케이스다. 번역 ‘명품’은 그 전에도 있었다.
영국 토머스 모어가 지은 ‘유토피아’의 번역어다. 청나라 말기 지식인이었던 엄복(嚴復)이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서양 언어를 오탁방(烏托邦)이라는 한자어로 옮겼다. 직역하자면 ‘근거[托] 없는[烏] 나라[邦]’라는 뜻이다.
까마귀를 가리키는 오(烏)는 거짓, 허무 등의 개념으로 종종 쓰인다. 여기서의 용례가 꼭 그렇다. 그리스어 ‘Utopia’라는 말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니 이 글자 ‘오’의 인용이 아주 그럴듯하다. 유토피아의 역어는 더 있었다.
장자(莊子)가 언급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무하유향(無何有鄕), 불가의 궁극적인 이상이 펼쳐진다는 화엄계(華嚴界) 등이다. 그러나 의역(意譯)과 음역(音譯)을 겸비한 ‘오탁방’만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공산당이 내세웠던 중국몽(中國夢)이 시들해졌다. 높은 실업률에 길거리를 헤매는 숱한 중국의 청년에게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오탁방’에 불과할 것이다. 이 단어가 아마도 차가운 올겨울의 중국 최고 유행어일지 모른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조선일보(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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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심탄회(虛心坦懷)의 의미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예전 외교부 근무 시절 일본 외교관들이 회담을 앞두고 비공식 만남을 제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당시에는 허심탄회를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일본의 허심탄회는 한국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심탄회라는 사자성어의 유래는 일본에서도 오리무중이다. 특별히 중국 고전 등에 그 전거가 보이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허심(虛心)’은 노자(老子)의 무위(無爲) 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풀이된다. 도덕경의 ‘허기심 실기복(虛基心, 實基腹)’, 즉 성인(聖人)의 다스림이란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는 것이라는 구절에 허심의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바라는 바를 인위적으로 이루려는 욕심이나 집착을 버리는 것이 비움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평평할 탄(坦) + 속마음 회(懷)로 이루어진 ‘탄회’는 거리낌이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내심 노림수나 불순한 저의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탄회는 그러한 동요가 없는 평정(平靜)한 마음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일본어 사전은 허심탄회의 뜻을 ‘마음속의 응어리나 고집을 내려놓은 채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로 풀이한다. ‘솔직함’ 또는 ‘털어놓음’보다 ‘내려놓음’ 또는 ‘받아들임’에 방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당사자 간에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간에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애초부터 갈등이 생기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 만큼 현실 세계에서는 ‘허심탄회한 대화 제의’가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만 ‘동의하지 않는 데에 동의(agree to disagree)’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일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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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의 돈과 세상]
번역은 두 언어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원문 뜻이 종종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는 성경 구절에서 낙타는 원래 밧줄이었다는 설이 있다. 중동의 언어인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옮길 때 예수 말씀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제2의 창조임이 틀림없다. 메이지 유신 시절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가 그랬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기간은 2년밖에 안 되지만, 엄청난 관찰과 고민을 통해서 서양 문명의 정수를 하나하나 신종 한자어로 옮겼다. 철학, 과학, 예술, 이성, 기술 같은 말은 그의 머릿속에서 서양의 개념을 재창조한 결과다.
중국에는 옌푸(嚴復)가 있었다. 그는 2년간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원부(原富)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고, 그의 연구를 부학(富學)이라고 소개했다. 논리학은 명학(名學)이라고 번역했다.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문장이 있는데, 그 말씀(logos)에서 서양의 논리(logic)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통찰이다.
옌푸는 다윈의 연구를 천연(天演)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중에 진화(進化)로 대체되었다. 명학은 논리학으로, 부학은 경제학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옌푸의 생각은 일본의 번역어에 밀려 대부분 도태되었다. 역설적으로 그가 만든 ‘자연도태’라는 말만 자연도태되지 않았다.
영어의 소사이어티를 니시 아마네는 사회(社會)로, 옌푸는 군(群)으로 번역했다. 사(社)는 원래 토지신(土地神)을 뜻하므로 사회는 ‘제사 지내는 모임’처럼 들린다는 것이 옌푸의 생각이다. 하지만 군(群)은 일본에서 만든 ‘사회’에 밀렸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언어도 생각도 도태된다. 국력이 한글의 버팀목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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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어느 나라 말인가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은 고려대 이한섭 명예교수가 1970년대부터 연구해 온 결과물을 집대성한 책이다. 1880년대 이후 우리말처럼 돼 버린 일본어 3634개 단어를 소개했다. 이 어휘들 중 90%가량은 우리말 발음으로 들어왔다. 교육, 가족, 국민 같은 단어들이다. 나머지는 일본어 발음으로 들어왔다. 모나카, 만땅, 무데뽀 같은 말이다. '마호병'처럼 일본어와 우리말이 결합한 말도 있다.
▶경기교육청이 관내 초·중·고교에 공문을 보내 일제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수학여행' '파이팅' '훈화' 같은 단어들도 일본에서 왔으므로 일제 잔재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일제 잔재의 개념은 무엇이고 어떻게 청산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이 문장에서도 '본인' '개념' '청산'은 일본에서 온 단어다. '단어'도 일본어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공부해 박사를 땄다. 도이칠란트를 '독일'이라고 번역한 것도 일본인들이다. '대학' '대학원' '신학' '종교' '박사' 모두 일본에서 온 말이다. 국어·영어·수학은 물론 과학·철학·물리·역사·미술·음악·체육도 그렇다. 심지어 '대통령'이란 단어도 일본인들이 'president'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일본은 1773년 네덜란드어로 쓴 의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를 펴냈다. 일본 최초의 서양책 완역본이다. 이 책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번역과 사전 편찬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켰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일본은 영일사전을 내놓았는데,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번역하는 일은 일본에 없던 관념을 만들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단어들이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 강제로 대량 유입됐다. 해방 후에도 일본인이 번역한 단어들은 계속 들어왔다. 나라를 세우려면 일본 서적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거 우즈가 나오는 골프공 광고에서 우즈는 "좋아요, 대박"이라고 말한다. 싸이 노래 덕분에 서양인들은 '강남'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교류하는 시대에 언어가 섞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은 우리말을 해치는 일본어와 일본식 표현은 걸러내야 한다. 그러나 완전히 한국화돼 일상에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쓰는 말들까지 '일제 잔재'라고 쓰지 말자면 어쩌자는 건가.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1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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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만든 단어 '췌장(膵臟)'
얼마 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스미노 요루(住野よる)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데, 그로테스크한 제목과 달리 내용은 젊은 남녀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청춘물이라 한다. 많은 한국인이 췌장 하면 췌장암을 떠올린다. 췌장암은 생존율이 아주 낮은 위험한 암으로 알려져 있다.
췌장의 췌는 한자로 '膵'라고 쓴다. 19세기 초, 일본의 난의학(네덜란드의학) 학자인 우타가와 겐신(宇田川玄眞)이 새로 만든 한자이다. 중국 전통의학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기(臟器)이기에 그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었다. 서양 의학에서 췌장은 pancreas라고 하는데, pan(모든·entire)에다 creas(육신·flesh)를 더한 게 어원이다. 서양 해부학 서적 번역에 고심하던 겐신은 원어의 어원으로부터 육달월(月) 변에 모일 췌(萃)를 더해 膵 자를 조자(造字)하고, pancreas를 췌장으로 번역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를 화제한자(和製漢字)라고 한다. 의학 용어 중에서는 분비선, 갑상선 등에 쓰이는 '腺'도 화제한자이다. 신체 기능에 필수적인 호르몬이나 화학물질을 생성하는 조직 또는 기관인 gland의 번역어다. 腺도 겐신이 만든 한자이다. 육달월 변에 샘 천(泉)을 더하니 '몸에서 샘솟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번에는 어원이 아니라 기능에 착안한 조자라는 점이 신통방통하다.
일본은 이처럼 근대화 시기 이전에 기존 지식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기존 한자를 조합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서구의 개념과 지식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현재 '腺' 자와 '膵' 자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 자전에 기본자로 수록돼 있다. 한자의 오리지널 중국도 한 수 배우는 일본 근세 지적 역동성의 한 단면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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