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나운규님, 보고 계십니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 ....

뚝섬 2026. 3. 27. 07:04

[ 나운규님, 보고 계십니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아리랑은 원래 영화음악]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년]

[한국인 미국 이민의 역사]

 

 

 

나운규님, 보고 계십니까? 

21일 BTS 광화문광장 공연에서 아리랑 공연을 선보인 우리 국악단과 유지숙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넷플릭스

 

지난 21일 방탄소년단(BTS)의 서울 광화문광장 공연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광화문을 배경으로 국립국악원 단원들이 부른 ‘아리랑’을 꼽는 사람이 많다. 이 노래가 이토록 세계적인 노래가 됐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미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고 60여 종 3600여 곡이 전승되고 있는 ‘아리랑’ 중에서도 BTS 공연에 쓰인 ‘아리랑’이 과연 어떤 노래냐는 것이다. 그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시작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로 끝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리랑’이었다. ‘본조 아리랑’ ‘신아리랑’이라고도 불리는 노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야 마땅하다. 춘사 나운규다.

 

꼭 100년 전인 1926년, 스물네 살 나운규는 항일 민족 영화이자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아리랑’을 개봉했다. 혼자서 감독·원작·각색·주연의 1인 4역을 맡았다. 이 영화의 주제가가 바로 BTS 공연에 등장한 그 ‘아리랑’이었다. 작사 나운규, 작곡은 단성사 음악대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리랑’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1896년 채보한 ‘아리랑’이다. 하지만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은 함북 회령 출신인 나운규가 어린 시절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슬픈 ‘아리랑’의 기억을 되살리고 재해석해 민족의 정서를 담아 만든 신곡이었다. ‘아리랑’이 한반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영화음악이 전국 민요로 변한 희귀한 예였다.

 

영화 ‘아리랑’의 개봉일이 1926년 10월 1일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날은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식이 열린 날이기도 했다. 나운규는 이날 영화 선전대가 단성사에서 광화문통까지 행진하며 주제가 ‘아리랑’을 연주하도록 했다. ‘아리랑’ 자체가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당황한 총독부가 주제가를 실은 전단지 1만 매를 압수했으나 극장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막을 수는 없었다. 100년 뒤 그 총독부 청사가 철거된 자리 앞에서 다시 부른 ‘아리랑’ 노래가 세계로 전파된 것이다.

 

나운규는 한류와 K컬처의 부흥을 일찌감치 내다본 선각자였다. 1936년 11월 잡지 ‘삼천리’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을 잘 붙잡아, 조선의 산하와 정조를 기조로 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면 세계 시장 진출에 어렵지 않을 줄 알아요.” “우리 속에서도 명배우가 나고, 명감독이 나고, 큰 문호가 나서 본질적으로 그네들을 이길 생각을 해야겠어요.” 이듬해 나운규는 요절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BTS 공연이 끝날 무렵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보고 계십니까, 나운규님?”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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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아리랑은 원래 영화음악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 

 

1926년 무성영화‘아리랑’의 원본 스틸 사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로부터 고문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 영진(나운규)이 여동생 영희(신일선)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장면이에요. /영화 아리랑 개봉 100년 기념사업회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원본 스틸 사진(홍보를 위해 촬영한 영화 속 장면 사진)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최근 나왔어요. 내년에 개봉 100주년을 맞는 ‘아리랑’은 한국 무성영화 시기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영화입니다. 항일 민족 영화로 평가받기도 하지요. 무성영화란 필름에 소리를 담는 기술이 나오기 전 대사와 소리 없이 영상만 나오던 영화랍니다. 이 때문에 자막이나 해설을 맡은 변사가 있어야 했죠. 당시 영화 ‘아리랑’의 감독·원작·각색·주연까지 1인 4역을 맡았던 천재적인 영화인이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입니다.

 

영화 주제곡이 전국 민요가 되다

 

이런 질문을 하나 해 볼게요. “민요가 영화음악이 된 경우가 있을까요?” 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졸업’(1967)에선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래 스카버러 페어’가 나오는데, 옛 영국 민요를 편곡한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화음악이 민요가 된 경우는 있을까요?” 에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바로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요. 

1935년 11월 19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아리랑’관련 기사. ‘아리랑’3편은 유성영화로 개봉될 예정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조선일보DB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시작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로 끝나는,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노래였습니다. 알고 보니 나운규가 작사하고 단성사 음악대(밴드)가 작곡한 노래였어요. 무성영화인데 주제곡을 어떻게 관객이 들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서울 단성사 같은 극장에선 변사와 함께 음악대가 늘 무대에 올랐고, ‘아리랑’ 상영 때는 인기 가수 유경이가 나와 반주에 맞춰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무성영화의 상영은 일종의 공연과도 같았던 셈이죠.

 

영화가 그야말로 전국적인 히트를 쳤기 때문에 이 주제곡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민요가 됐고, ‘밀양 아리랑’이나 ‘진도 아리랑’처럼 지역 민요가 아닌 ‘전국 민요’로서 자리 잡은 겁니다.

 

청년 독립운동가, 영화판에 입성하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대한제국 군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18년 만주의 명동중학에 입학했고 3·1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920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가입해 독립 투쟁에 몸을 담았습니다. ‘청회선 터널 폭파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일제에 체포돼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도 했어요.

 

당시 국내에선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온갖 흑백 무성영화들이 제작되면서,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죠. 1923년 출소 후 나운규는 이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1924년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할로 처음 영화에 출연합니다.

 

그는 1925년 ‘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 ‘농중조’에선 뛰어난 주연 연기로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해요. 그다음 영화가 바로 나운규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맡은 대작 ‘아리랑’이었습니다.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소이다!”

 

“대담한 촬영술! 조선 영화사상 신기록! 촬영 3개월간! 제작 비용 1만5천원 돌파!” 당시 조선일보에 실렸던 영화 ‘아리랑’의 광고 문구입니다. 주인공 김영진(나운규)은 서울에 유학 갔다가 3·1 운동에 참가해 일제의 고문을 받고 실성한 채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누이동생 영희(신일선)에게 나쁜 짓을 하려던 친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죽인 뒤 일본 순사(경찰)에게 붙잡혀 끌려갑니다. 이때 주인공은 정신이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짓고, 변사는 애끊는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무대 위 가수가 노래를 부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여기서 관객들은 눈물바다를 넘어서서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미친 주인공은 일제에 저항하는 이 땅의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관객의 민족 의식을 각성시키는 항일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서울 단성사를 비롯한 전국 극장은 ‘아리랑’을 보려는 관객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극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에게 위문용으로 이 영화를 보여줬는데, 관람 후 노동자들이 울면서 시위를 벌여 일제 당국이 당혹해했다고 합니다.

 

‘아리랑’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서울에서만 아홉 번 재상영됐고, 제작된 지 12년이 흐른 1938년 조선일보가 조사한 한국 영화 선호도 결과에서 무성영화 부문 1위였습니다. ‘아리랑’은 2편(1929)과 유성영화인 3편(1936)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해방 후 2003년까지 이강천·유현목 등 나운규를 뛰어넘으려던 유명 감독들에 의해 다섯 번 이상 리메이크됐습니다.

 

한국 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을 내다보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사랑을 찾아서’(1928)와 ‘벙어리 삼룡’(1929) 등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문예봉과 함께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의 주연으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독을 맡은 영화 15편과 출연작 24편은 현재 필름 한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932년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임자 없는 나룻배’포스터 복원본. /한국영상자료원

 

나운규는 깊고 긴 안목을 지닌 예술가였습니다. 1936년 11월 잡지 ‘삼천리’의 대담에서 사회자가 ‘조선 영화가 국제적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까’ 묻자 나운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을 잘 붙잡아, 조선의 산하와 정조를 기조로 하고 만들어낸다면 세계시장 진출에 어렵지 않을 줄 알아요… 우리 속에서도 명배우가 나고, 명감독이 나고, 큰 문호가 나서 본질적으로 그네들을 이길 생각을 해야겠어요.” 혹시 그는 몰래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 이후의 세상을 미리 다녀간 것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나운규는 당시만 해도 불치병에 가깝던 결핵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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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년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고종의 측근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1906년에 간행한 그의 책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의 ‘헌사’에서 그는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라며 당시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호머 헐버트 하면 아리랑이 떠오른다. 보통 아리랑이라고 하면 1926년에 나운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아리랑은 나운규라는 지은이가 있기 때문에 전래 민요로 보기 어렵다. 잡지삼천리’ 1937 1 호에서 나운규는 자기의 고향 함경북도 회령에 철도를 놓기 위해 남쪽에서 노동자들이 부른 아리랑의 구슬픈 소리에 빠져들었으나, 이후 선율을 찾을 없어 예전에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아리랑을 지었다 했다.

 

나운규가 고향에서 들었다는 아리랑이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없으나, 1886년 10월 17일에 호머 헐버트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리랑의 8마디 악보를 그리고 나서, “동네 꼬마 녀석들이 아리랑을 어찌나 불러대는지 귀가 따가울 정도라고 편지에 썼다. 이후 1896 미국 잡지에한국의 성악(Korean Vocal Music)’ 소개하면서 다장조에 4분의 3박자, 16마디의 아리랑 악보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아리랑은 한국인의 주식인 쌀과 같은 노래이고, 서양의 어느 시인이나 작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채보한 아리랑 외에도 더 많은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언급된 아리랑, ‘조선의 유행요’란 제목으로 일본 신문에 소개된 아리랑, 홍석현이 간행한 일본어 사전에 실린 아리랑 등의 1894년 자료들, 1896년 미국에서 녹음된 아리랑, 1916년 고려인이 남긴 아리랑 등에서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던 19세기 후반에 이미 아리랑이 유행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우리 대중음악의 시작점에 아리랑이 있었던 것이다.

 

아리랑 연구는 양적으로 상당하나 어원과 유래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다양한 아리랑이 전하고 있지만, 선율이나 노랫말 중 어느 하나로 그 원천을 확정할 수 없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뿐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것을 수용하고 흡수하여 변모를 거듭하는 것이 아리랑이 지닌 생명력의 근원이리라. 한민족의 정신적 동질감을 보여주는 우리의 노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아리랑이 등재된 지 올해로 10년, 다시 아리랑을 돌아본다.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조선일보(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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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미국 이민의 역사

 

1905년까지 7000명 넘게 이주

사탕수수 농장서 하루 10시간 노동… 사진만 보고 이민 남성과 결혼하기도

 

지난 6일 미국에서 상·하원 의원 선거가 열렸어요. 한국계 미국인 영 김(56·공화당)씨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앤디 김(36·민주당)씨가 뉴저지주에서 연방 하원 의원으로 출마했어요. 아직 개표가 덜 끝나 속단하긴 이르지만 두 사람 모두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만약 두 사람의 당선이 확정되면, 1992년 김창준(79) 전 하원 의원이 처음으로 연방 의회에 진출한 지 26년 만에 새로운 한국계 의원이 탄생하는 거랍니다.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영 김씨는 미국 정치계에 독도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린 주역이에요. 앤디 김씨는 오바마 정권에서 중동 전문가로 활약했고요. 아시아계인 두 사람이 지금 위치에 오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았을 거예요. 미국에 처음 발 디딘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이들보다 더욱 심한 차별을 겪었을 테고요.

미국에 건너간 첫 조선 사람은 1883년 고종의 외교사절단으로 워싱턴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예요. 그 뒤 조선 근로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가면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이 시작됩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드림

19세기 말 하와이에선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했어요. 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해 애먹었지요. 농장주들은 궁리 끝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1858~1932)에게 노동자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알렌이 고종을 설득해 여권을 담당하는 '유민국'을 설치하고 이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지요.

1913년쯤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들이에요.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 소리’

먼저 도착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는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들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000명 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거의 모두 남자였어요.

요즘은 해외에 대한 정보가 넘치지만, 그때는 하와이가 어딘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간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런데도 이민을 결심한 건 하와이가 '풍요의 땅'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죠.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고생스럽게 살던 백성들에게 하와이는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답니다. 조선인 근로자들은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그렇게 일해봤자 임금은 하루 70센트에 불과했지요. 문화적 차이도 고통을 더했다고 합니다. 남녀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푸에르토리코 노동자들의 파티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겁했다고 하네요. 미국 역사학자 웨인 패터슨이 쓴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라는 책 속에 "조선에서 여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 기생이나 무당만 하는 일이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조선인의 회고담이 나올 정도랍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기 때문에 식료품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어떤 조선인은 달걀을 사려고 자기 주먹에 흰 손수건을 둘러씌운 뒤 엉덩이에 가져다 대고 닭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 내 달걀을 샀다고 해요. 보는 이들에겐 재밌는 광경이었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식료품점에서 암탉 흉내를 내는 심정은 썩 좋지 않았을 거예요.

사진만 보고 바다를 건넌 새 신부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조선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어요. 많지 않은 액수나마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기도 하고, 고생 끝에 약간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은 노총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사진결혼'이 등장했어요. 조선에 있는 처녀와 하와이에 있는 노총각이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혼을 약속하는 거예요.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여자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어요. 중매쟁이들은 조선 처녀들에게 "하와이로 시집가면 끼니도 땔감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득했다고 해요.

결혼을 결심한 처녀들은 우선 남자 호적에 등록한 뒤, 긴 여행을 준비했어요. 서울에 가서 비자를 얻고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게 시작이었죠. 출발하는 날까지 영어 공부도 해야 했고요. 그리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리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다시 한 번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기생충 검사를 주로 했는데, 이때 검사에 걸리지 않으려고 건강한 사람 대변을 자기 것으로 바꿔 통과하기도 했대요.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9일 동안 배를 타고 갔어요. 거기서 마지막 신체검사와 간단한 영어 시험을 봤지요. 이 힘든 절차를 거쳐야 신랑을 만날 수 있었어요.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이상형을 만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겠지요. 하와이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어요. 아열대기후에서 고된 노동을 하느라 그을린 얼굴이었죠. 비싼 양복을 빌려 입고 좋은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실제론 집도 돈도 없는 경우조차 있었어요. 하지만 사진 신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는 데다, 결혼을 취소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겨졌어요.

하와이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나중에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미국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미국 서부에 한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부터 한인들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에요.

1924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면서 미국으로 가는 조선인 사진 신부들도 사라졌어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됐기 때문에, 새 이민법을 적용받았던 거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오늘날 미국 동포들의 성공 뒤에는 이민 초창기 세대들의 고생이 있었답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조선일보(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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