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3년간 한성판윤은 429명... 평균 한 달 엿새 근무]
[최틀러]
[한성판윤(判尹)]
고종 43년간 한성판윤은 429명... 평균 한 달 엿새 근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성판윤은 무엇을 했나

경복궁 근정전. 매서운 겨울이지만 한복 입은 관광객이 고궁 나들이에 한창이다. 조선전기 ‘경국대전’을 비롯해 각종 성문법을 완비한 조선왕국은 그 법에 의거해 백성을 통치했다. 하지만 법은 수시로 권력에 의해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백성은 부패한 관리로부터 피해를 입어야 했다. 한성판윤을 비롯해 대민 행정을 책임지는 관리들의 법정 임기도 무시당했다. 조선시대 한성판윤 평균 재직 기간은 석달에 불과했다. /박종인 기자
흔히 한양이라 부르는 조선 왕국 수도 공식 명칭은 한성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고려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한성판윤이다. 황희(태종), 맹사성(세종), 서거정(예종), 이덕형(선조)과 채제공, 박문수(영조)에서 민영환(고종)까지 숱한 명망가들이 한성판윤 자리를 거쳐갔다. 그런데 그 쟁쟁한 인물들이 거쳐간 한성판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조선 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p25)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p23)
한성판윤은 품계가 정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 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본질적 질문을 해본다. 숫자에 답이 있다.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몇 명이었고, 임기는 몇 년이었나?”
답은 이렇다.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서울역사편찬원,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 서울역사편찬원, 2017: 류시원, 앞 책) 행정 실적 기록이 있었다면 오히려 기이한 숫자가 아닌가.
후기는 어떤가. 1864년부터 1907년까지 고종 시대 43년만 따지면 1864년 음력 4월 16일 임명된 이우(李㘾)부터 1907년 양력 3월 11일 임명된 마지막 한성부윤 박의병까지 모두 429명이었다.(장경호, ‘고종대 한성판윤의 특징과 변화(1863~1907)’, 서울학연구 65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고종 시대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한 달 6일이었다.
그러니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꽉 조여 있었어야 할 나사들이 다 달아나고 없는 조선 시대 서울시장 이야기.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首善全圖). ‘수선(首善)’은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 즉 서울을 뜻한다. 그런데 그 서울을 관장하는 시장(판윤)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심각할 정도로 자주 바뀌어 행정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 서울시장, 2073대 판윤
위에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512년 동안 모두 2012명에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불완전하다. 1차 사료가 부족하다. 공무원 임면 관계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와 각종 사료들이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불타버렸거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선조 때까지 공무원 임면 기록은 실록을 일일이 들춰봐야 한다.
해방 후 역대 한성판윤에 대한 통계는 1957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성판윤선생안’이 처음이다. 그리고 2017년 그 후신인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참고해 새로운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1905년 양력 1월 임명된 박의병이 제2010대 한성판윤이다. 박의병은 다른 직을 맡았다가 그해 말 다시 한성판윤에 임명됐고 이듬해 경성부윤에 임명됐다. 연구자에 따라 총 판윤 숫자는 차이가 나지만 현재 2010명 안팎으로 정리돼 있다. 식민시대 경성부윤을 합쳐서 현 대한민국 서울시장 오세훈은 1395년 1대 한성판윤 이래 2073대째 서울시장이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처럼 장관급이다. 이 글은 ‘서울역사편찬원’이 편찬한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의 명단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성판윤이 하는 일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이 해야 할 일은 대개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등에 관한 사무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시장 업무와 다를 바 없는 종합적인 행정가였다. 그런데 여기에 민간 빚 문제(負債·부채)와 폭력(鬪毆·투구), 살인사건 검시권까지 가진 강력한 사법권자이기도 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한성부)
바로 판윤이 이 모든 사무의 최종 결정권자다. 여기에다 한성판윤은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대중국 외교에도 관여하는 막강한 벼슬이었다.
그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윤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 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박경룡, 앞 책, p45)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坐起·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1538년 8월 18일 ‘중종실록’)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市政)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 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기네스북에 기록될 재임 기간
헌종 때인 1848년 음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1848년 음11월 30일 ‘승정원일기’) 1799년 음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1799년 음9월 27, 28일 ‘승정원일기’)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한성판윤은 매일 궁궐에 들어가 국왕 및 판서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래서 ‘말단 행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적었다. 그렇다 보니 앞에 언급했듯 중종 때 ‘판윤이 출근하지 않아서 하급 관리들 업무가 마비된다’는 보고가 올라간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 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九卿)’을 두루 거치는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박경룡, 앞 책, p45) 9경은 정2품인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久任官)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판윤 자리는 파리 목숨이기도 했다. 1762년 944대 판윤 홍상한이 “소나무 가지가 말라 죽으니 군에서 감시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자 영조는 “아침 식사 자리에 나뭇가지 이야기를!” 하며 홍상한을 파면했다. 임명된 지 한 달이 안 된 판윤이었다.(1762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1790년 12월 1214대 판윤 구익은 창경궁 홍화문 앞 정조 행차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고 파면됐다. 재직 기간은 한 달 11일이었다.(1790년 음11월 4일, 음12월 15일 ‘정조실록’)
상상 초월, 지방 수령
한성 판윤만 봐도 조선왕국 행정은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 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 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은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아졌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 임기 만료 전 교체 이유가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그러니까 업무 보는 도중에 신임 부사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다. 또 신구 수령 사이에 한 달 이상 텅 빈 공백 기간이 있는 인사도 많았다. 인사행정이 법전을 무시한 채 무절제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원균, ‘조선시대의 수령직 교체 실태’, 역사와세계 3권, 효원사학회, 1979)
수령이 교체되면 지역민은 닷새에 걸쳐 신임 수령을 맞는 의전을 벌여야 했으니, 이 또한 위민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번 수령을 거치면 전답을 사고 집을 새로 짓는 자가 열 가운데 6, 7은 되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수령으로서 짐바리가 없는 자가 없다.’(1728년 음1월 11일 ‘영조실록’)

국왕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부분. 19세기 추정). 경복궁과 창덕궁, 경운궁(덕수궁) 용상 뒤에 세워서 왕권을 상징했다. 그런데 그 왕권은 왕권을 제한하는 법규를 초월해 자의적으로 행사되기 일쑤였다. /국립고궁박물관
매관매직과 부실인사의 극, 고종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12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 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행정을 책임질 수 있었을까. 1886년 좌의정 김병시가 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은 갖추어져 있으나 꼭 시행되지는 않고 수령 교체가 빈번해 영접과 전송에 곤경을 치른다. 가난한 백성이 가렴주구에 시달린다.”(1886년 음8월 16일 ‘고종실록’) 대한제국시대 황실 고문을 지냈던 전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윌리엄 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 임대업자는 뇌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12%나 받았다. 신임 지방관은 어떡하면 돈을 거둘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 관리들은 프랑스혁명 이전 세금 청부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W.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Whittlesey house, McGraw-Hill book company,1930, p118) 법은 완비됐으되 지키지 않았고, 시장이 별처럼 많았으되 시장이 아니었던 조선조 한성 판윤 이야기였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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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틀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직후 임명된 최병렬 서울시장이 간부들을 불렀다. 그는 “비난에 위축되지 말라. 잘못되면 감옥은 내가 대신 간다”고 했다. 이어 “접시를 닦다 깨는 것은 괜찮지만 접시 깰까 봐 아예 닦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다. 7개월 간 서울시 체제를 뒤바꾸고 ‘안전 시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기자 때 후배가 낙종하거나 기사를 잘 쓰지 못하면 불호령을 내렸다. 독선에 가까울 정도로 혹독했다. 간부 회의 때 선배와 책임 논쟁이 벌어지자 “어디 떠넘기느냐”며 책상을 뛰어넘어 공중 부양했다. 편집국장 시절 권력기관에서 기사 빼라는 요구가 오면 “난 못 하니 당신들이 와서 신문 만들어”라며 수화기를 던졌다. 공보처·문공부·노동부 장관 땐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불도저처럼 몰아붙였다. “목숨을 걸고 하라”고 했다. KBS 노조가 파업하자 곧바로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계의 반발에도 총액임금제를 밀어붙였다. 버스전용차선제도 시행했다. 1985년 총선에선 처음으로 여론조사 기법을 도입했다. 당대표 땐 이익 단체의 항의 집회에 직접 나가 “책임지고 대책을 만들겠다”고 설득했다. 그 추진력 때문에 ‘최틀러’(최병렬+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밖에선 독재자 같았지만 집에선 자상한 가장이었다. 처가의 반대 때문에 7년 만에 결혼한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 공처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온순한 양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내에게 하루 3~4번은 전화했다. 자녀들에게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공부하라”는 말보다 “놀려면 재미있게, 운동 많이 하라”고 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그에게 잘보이려고 돈 1억원을 보냈다. 그는 즉시 돈을 돌려보냈다. 정 회장은 “내 평생 돈 돌려받기는 처음”이라면서 최틀러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의원 시절 정치자금 수백만 원을 지갑에 넣고 있다 아내에게 들켰다. 아내가 “무슨 돈인데 혼자 숨겨 놓고 쓰느냐”고 했지만 “선거 자금이라 사사로이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장관 땐 명절·연말에 선물로 들어온 술·넥타이·음식 등을 집무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직원들을 불러 가져가게 했다.
▶그는 2003년 대선 자금 특검을 관철하려고 단식에 들어갔다. 의사들이 “당분·영양 음료를 마셔야 몸이 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원칙을 지킨다며 물과 소금만 먹었다. 열흘간 독한 단식 끝에 특검을 받아냈지만 건강이 크게 상했다. 수년 전부터는 거동도 힘들어졌다. 그는 2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선 건강했는데 단식 후유증 때문에 이렇게 됐다며 안타까워 한다.
-배성규 논설위원, 조선일보(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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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판윤(判尹)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수사·재판·시체 검사까지

서울시장을 뽑는 선거가 오는 7일 실시됩니다. 서울시장은 인구 1000만명에 가까운 수도 서울의 최고 행정 책임자이지요. 그만큼 권한이 크고 책임도 막중하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당시의 서울시장은 '한성판윤'으로 불렸어요.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을 관할하는 관청이 한성부(府)였는데, 이곳의 최고 책임자가 한성판윤이었지요. 지금의 서울시장과 한성판윤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임금에게 중대사를 직접 보고했어요
한성판윤은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어요. 종2품이었던 다른 지역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보다 더 높았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한성판윤이 장관급, 다른 관찰사는 차관급이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도 차관급 대우를 받는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과는 달리 서울시장만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죠.
한성판윤은 임금에게 중대사를 직접 보고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했어요. 수도를 다스릴 뿐 아니라 궁궐을 호위하고 중앙 정치 무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중대한 자리였습니다. 중종 때 대사헌 유세침은 한성판윤 안윤덕을 다른 자리로 바꾸라는 상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윤덕은 가볍고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은데, 판윤은 중대사를 총괄하는 자리로서 그 임무가 지극히 중대하니 그가 함부로 이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한성판윤의 주요 업무는 가옥의 건축과 철거, 호적 관리, 소방 업무, 하수 관리 등이었다고 해요. 오늘날 서울시장의 역할과 비슷했어요.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다른 관청이 맡았는데 임진왜란 도중에 이 업무도 한성판윤이 맡았다고 해요. 1593년 한성판윤 이헌국은 "서울 구호소에 나와 음식을 먹는 굶주린 백성들이 1만명이며 지쳐서 집에 있는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고 날마다 죽어가는데, 곡식은 겨우 10일 치만 남았다"며 임금에게 참상을 알리고 대책을 호소하기도 했답니다.
수사, 재판 책임도 맡았어요
지금의 서울시장과 가장 큰 차이점은 한성판윤이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주로 재산을 둘러싼 주민 간 분쟁을 맡았는데, 어쩌다 일어나는 강력 범죄가 아니라 매일같이 일어나는 분쟁이어서 골치가 아팠다고 합니다. 1536년(중종 31년) 한성판윤을 지내던 서지라는 사람은 "더 이상은 도저히 판윤 노릇을 못 하겠다"고 임금에게 호소했어요. 그는 "한성부에 소송하는 사람들은 다른 관청과는 다르게 (아주 작은) 한 치의 땅을 두고 싸웁니다. 시비하다가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오만한 말을 퍼붓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고 해요. 수도에 사는 백성들의 재산에 얽힌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는 얘기였죠. 소송에 지면 대궐이나 한성부 앞에서 징을 치며 소란을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성판윤은 도성 안팎에서 발견된 시신의 검시 업무도 맡았어요. 성종 때 한성판윤 이극균은 '급소에 상처가 없으면 타살 여부를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독살을 판단하기 위해선 은비녀가 필요하다'는 등 과학적인 검시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황희, 맹사성도 한성판윤이었어요
한성판윤은 당시 '정승이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벼슬'로 인식됐다고 해요.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는데 쟁쟁한 인물들이 한성판윤 자리를 맡았답니다. 첫 한성판윤은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성석린이었습니다. 세종대왕 때 명재상으로 이름난 황희와 맹사성, '동국통감'을 편찬한 서거정, 병자호란 때 외교 활동으로 이름난 최명길 등이 한성판윤을 맡았어요. 주로 문신이 이 자리에 앉았지만 행주대첩의 주인공인 권율 장군처럼 무신이 맡는 경우도 있었어요. 암행어사 박문수,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민영환 등도 한성판윤 출신이랍니다.
'최악의 한성판윤'은 고종 때 김홍륙인데, 그는 1898년 커피를 좋아하던 고종 황제를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아편을 탔어요. 고종은 곧바로 뱉어 버려 무사했지만 같이 마셨던 황태자(훗날 순종)는 적잖은 양의 아편을 삼켜 피똥을 쏟고 이빨이 빠지는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김홍륙은 교수형에 처해졌지요.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왕조 518년 동안 역대 한성판윤은 모두 2010대(代)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의 독점이 심해졌고, 임기는 점점 짧아져 오전에 임명된 사람이 오후에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경성부윤과 서울시장]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수도 한성부를 '경성부'로 바꿨습니다. 이때는 한성판윤이 아니라 '경성부윤'으로 불렸죠. 경성부는 경기도 산하 지방관청이 되면서 역할도 크게 축소됐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 군정 때 부윤이었던 김형민이 제1대 서울시장이 됩니다. 이후 윤보선(2대), 이기붕(3·4대), 허정(8대), 김현옥(14대), 양택식(15대), 구자춘(16대), 염보현(20대), 고건(22대), 최병렬(29대) 등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관선 시장 시대가 있었습니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되면서 조순(30대), 고건(31대), 이명박(32대), 오세훈(33·34대), 박원순(35~37대)이 민선 시장으로 선출됐죠. 이번 보궐선거로 선출될 서울시장은 제38대 시장인데, 한성판윤과 경성부윤까지 다 치면 제2072대 시장이 되는 셈입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최원국 기자, 조선일보(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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